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리뷰
2008년작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 18년 만에 국내 개봉을 알렸다. 긴 시간이 지나도 이 영화가 비추는 편집된 진실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일까. 영화는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 아이의 시선에서 재구성된 세계를 비춘다.
브루노는 아버지의 승진으로 정들었던 베를린을 떠나 삭막한 폴란드의 수용소 인근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여덟 살 소년에겐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 놀 친구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농장과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사람들'은 약간 이상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한다.
아이의 순진무구함은 유대인 수용소를 농장으로 교도소복을 잠옷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어른들은 소년에게 진실을 감추기 위해 다른 정보를 정정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적'이자 '악마'이기에 접근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브루노는 8살 소년, 한참 모험이 더 재미있을 때이다. 놀거리도 적고 친구도 없고 학교도 가지 않는 무료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 뒷마당 너머 숲으로 '탐험'을 시작한다. 숲을 가로질러 도착한 철조망 담장에서 소년 슈무엘을 만난다. 서로의 이름이 이질적이라며 신기해하던 두 소년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매일 만나 비밀스러운 우정을 쌓아간다. 당장이라도 담장을 넘어 함께 공놀이를 하고 싶은 유일한 친구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소년이 탐험 끝에 우정을 쌓는 동안 가정 내부에는 균열이 일어난다. 누나 그레텔은 젊은 장교 코틀러 중위와 가정교사의 주입식 교육에 매료되어 급격히 나치즘에 물든다. 인형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방안을 선전 포스터로 도배하는 장면은 외부의 물리적 폭력이 평범한 가정 내부를 어떻게 잠식해 나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레텔이 폭력적으로 변한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지하실에 버려진 인형들이다. 한때, 소녀의 가장 친밀한 대화상대였던 인형들을 버리고 나치 선전 포스터를 붙인다. 젊은 장교 코틀러 중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가 속한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 모습을 본 엘자는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브루노는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는데, 그 냄새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굴뚝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는 바로 남편이 지휘하는 수용소에서 시신을 태우며 발생하는 것이었다. 영화의 공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들이 누리는 안락함의 뒤편엔 끔찍한 비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리 없는 비명과 살점을 태우는 악취는 그녀가 인지하기 전에는 알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 환경이 그레텔과 브루노를 조금씩 스며들어 회복불가능한 상태로 오염시킬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아이들은 아빠를 '세상을 옳게 만드는 영웅'으로 믿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기에 아이들의 영혼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기 위해 '이사'를 감행한다.
브루노의 시점에서는 온통 수수께끼였다. 한때 의사였던 파벨이 왜 우리 집에서 감자를 깎는 농부가 된 건지, 왜 저 사람들은 하나같이 번호가 적힌 잠옷을 입고 있는지 소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악마'라 칭했던 유대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담장 너머에 있는 슈무엘도 조금 야위었을 뿐 친구와 놀고 싶어 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슈무엘에게 물어봐도 아버지가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렇게 두 소년은 어른들이 세운 견고한 선을 비웃듯 넘어간다. 브루노는 굶주린 친구를 위해 몰래 빵을 챙기고 슈무엘은 허겁지겁 먹어치운다. 비록 중간에 두려움 때문에 친구를 외면했던 잘못도 있었지만 아이들의 세계에서 화해는 진심 어린 사과로 충분했다. 어른들이 수조 원의 전쟁 비용을 쏟아부으며 증오를 키울 때, 두 아이는 담장 밑 작은 틈으로 손을 맞잡으며 우정을 키웠다. 거창한 이데올로기보다 더 값진 우정이었다.
아버지가 보여준 홍보 영상 속 수용소는 카페와 축구가 있는 낙원이었지만, 브루노가 담장 틈으로 목격한 진실은 그와 전혀 달랐다.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겪던 소년은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심한다. 브루노가 슈무엘에게서 잠옷을 건네받고 수용소로 넘어간 순간부터 사령관의 아들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잃게 된다. '제거 대상'이다. 유대인을 처리하기 위해 만든 가스실은 그 안으로 들어온 존재가 누구인지 구별하지 않는다. "Just Shower"라는 단어는 진실을 가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을 멈춰 세우지 못하는 복선이 되어 돌아왔다.
이 영화를 보며 최근의 수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평범한 악과 방관, 무관심의 소재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극대화했다면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는 아이의 순진무구함으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극대화한다. 두 영화 모두 가해자가 안락하고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비춘다. 꽃이 가득한 정원을 가꾸며 비극을 외면했듯 이들은 아이들이 바라보는 사실을 편집한다. 하지만 그렇게 편집된 진실은 악취와 연기처럼 새어 나와 집안에 침투한다. 어른들이 세워 올린 이데올로기의 성벽은 평범함을 침범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18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도 편집된 진실이 존재한다. 우리는 지금 어떤 담장 앞에 서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