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도착하다
덥다.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대부분 유럽 내 비행기가 그렇듯, 비행기에서 내리면 연결된 통로가 아닌 착륙한 활주로에 계단을 통해 내린다. 리가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탑승했기에 다운재킷과 긴팔을 입고 온 우리는 부랴부랴 옷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덥다.
전철로 우리가 사는 치프로 역으로 이동하는 내내 가벼운 긴팔을 입고 있었기에 계속 땀이 났다. 주변에 사람들은 다 잠바와 겉옷, 그리고 스카프까지 하고 있는데 나 혼자 헥헥 데고 있었다. 나도 어느새 추운 나라 사람이 되어 있던 걸까.
아내는 지금껏 가본 나라 중 가장 따듯한 곳이 한국이었다. 그러다 보니 야자수를 볼 일이 없었고, 도착하자마자 처음 보는 야자수에 넋이 나갔다. 평생 책으로만 봐 온 식물을 처음 눈으로 맞이했을 때 느끼는 그 이국적인 이질감. 소름이 돋는다면서 한창 눈을 떼지 못한다. 아내가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니 여기까지 온다고 고생한 게 싹 가시는 것 같다. 그래, 이러려고 여행하기로 한 거였지.
나는 어렸을 적 아우구스티노 계열 신부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다소 주입식 가톨릭 교육을 받은지라 (우리 가족 전부 가톨릭 신자는 없지만) 성 어거스틴의 삶과 관련된 묘사를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끊임없이 봐왔다. 아내가 야자수에서 느낀 부분을 난 구름처럼 생긴 소나무에서 느꼈다. 말 그대로 학교에서 반(?)강제적으로 읽은 성어거스틴의 삶 만화책을 보면 소나무가 항상 저렇게 그려져 있어서 의아해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생겨서 그런 묘사가 있었을 줄이야. 그 해당 화가 스타일이 아녔구나.
3일 이상 지낼 에어비앤비를 구할 땐 일단 치안이 우선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바티칸 벽을 끼고 있는 숙소를 구했다. 뭔가 이 주변은 어마어마하게 안전하겠지. 물론, 무엇보다 가격이 적당했다. 대략 110만 원 정도. 비좁은 집이지만 어차피 내던 월세에 겨울 가스비와 유지비 (우린 추운 나라에 있었기에 겨울엔 월 공과금만 4-50만 원 나갔다. 유럽에 오래된 건물은 공과금이 엄청 깨지는데, 우리가 살던 건물은 100년 넘은 건물이었다) 생각하면 같은 돈 내고 로마에서 지내는 셈이다. 집이 심히 작아지긴 했지만.
집 사진도 꽤 깔끔했다. 그렇게 잔뜩 부푼 마음으로 치프로 역에 도착했는데 이게 웬걸. 동네가 후줄근하고 거대한 쓰레기통이 즐비하고, 신호등 따위는 없고, 사람들은 길을 막 건너고, 수상해 보이는 아저씨들이 우릴 쳐다본다.
"여기 뭔가 위험해 보이는데? 밤엔 절대 못 돌아다닐 것 같아."
아내가 불안해한다.
일단 재빠르게 짐을 숙소에 넣고 제대로 집을 확인하지도 않고 동네로 다시 나왔다. 반은 저가비행기를 타고 와서 배가 고팠기 때문이고, 반은 아직도 이 동네가 그리 안 좋은 곳은 아닐 거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 이탈리아엔 어떤 마트가 있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전혀 모르기에 가장 익숙한 이름 - 까르푸로 갔다.
아..... 이 동네 정말 후진 곳인가. 한국 동네 지하 할인마트 같은 느낌의 까르푸였다. 타일은 깨져있고, 전혀 현대적이지 않고 비좁고 불편한 레이아웃. 일단 당장 허기진 배를 버터빵 한 더미로 채웠다. 굳이 이탈리아까지 와서 버터빵을 먹을 줄이야.
"아니야. 조금만 더 돌아보자."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구글에 주변 슈퍼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사진에 뭔가 커 보이는 슈퍼들을 찾아보지만 뭘 알 수가 있어야지. 일단 큰 도로변으로 걷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하는 마음에 불안해하는 아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좁은 도로를 걷다 보니 주유소가 나오고 그 뒤로 뭔가 건축 물류 창고 비슷한 게 나오고, 그 뒤로 큰 다리와 터널이 보인다. 어둑어둑해지는 구름 낀 날씨도 분명 한몫 보탰고 아내는 점점 더 겁을 내기 시작했다. 동네가 이렇게 안 좋았을 줄이야. 바티칸 뒤에 슬럼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조금만 더 가보자. 저기서 길 꺾으면 조금 더 큰 슈퍼 있다 했어."
그렇게 (사실 매우 짧았던) 터널을 지나자마자 이게 웬걸. 대형 몰이다. 엄청 현대적인 몰. 와, 살았다. 형들이 항상 신혼여행 잘 못 짜면 평생 욕먹는다고 했는데, 일단 살았다. 그렇게 우린 새로운 곳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맥도널드로 끼니를 때웠다. 바보 같지만 그땐 그게 왜 이리 위로가 됐는지.
몰 위 층엔 노트북 가지고 일 하기 좋은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고, 아래층엔 엄청 크고 좋은 슈퍼가 있었다. 전혀 생각지 못 한 횡재다. 일단 이 방향으론 나름 괜찮은 동네구나. 아내는 돌아가면서 터널과 주유소 부근이 싫다 하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익숙한 환경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중에 우린 동네가 굉장히 안전한 지역이고 상당히 좋은 곳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터널과 주유소 부근 마저).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