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

by 심월


“너는 누구인가?”

“저는 쿠퍼 부인으로, 이 시의 시장 아내입니다.”

“나는 너의 이름이나 남편에 대해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사랑하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네가 누구의 엄마냐고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나는 너의 직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기독교인이며, 남편을 잘 내조했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는 너의 종교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류시화 시인의 산문집 《옳은지 그른지 누가 아는가》에 실린, 예수회 신부 앤소니 드 멜로가 전한 이야기입니다. 병상에 누운 한 여인은 알 수 없는 음성으로부터 이 질문을 받습니다. 그녀는 처음엔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이어 남편과 아이들, 직업과 신앙을 차례로 대답합니다. 그러나 음성은 번번이 고개를 젓습니다. 내가 묻는 것은 이름도, 가족도, 직업도, 종교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다시 묻습니다.

“너는 누구인가?”


끝내 여인은 답을 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그녀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병에서 회복되었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질문 하나가 여인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 물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덧붙여 온 모든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는 질문입니다. 이름을 지우고, 역할을 지우고, 관계와 신념을 내려놓고 나면, 더 이상 붙잡을 말이 남지 않습니다. 그때 비로소 존재의 맨얼굴이 드러납니다. 이 질문은 나를 나로 살게 하는 근본, 어떤 말로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핵심을 향해 있습니다.


이 물음을 그림책은 또 다른 방식으로 건넵니다. 《이름 없는 고양이》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어 늘 쓸쓸합니다. 다른 고양이들이 ‘레오’, ‘씩씩이’, ‘보살이’처럼 불릴 때, 그는 그저 ‘고양이’로 불립니다.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곧, 아무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양이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이름을 찾아 나섭니다. 간판 이름을 붙여 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단어를 입에 올려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름도 가슴에 닿지 않습니다.


그러던 비 오는 날, 공원 벤치 아래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에게 한 소녀가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그 순간 고양이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원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가 불러주는 ‘목소리’였다는 것을.


여인에게 집요하게 던져진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이름 없는 고양이가 마침내 도달한 깨달음은 닮아 있습니다. 우리를 설명해 주는 외피들, 이를테면 이름이나 직업, 관계와 평가는 결국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나를 가리키는 표지판일 뿐, 나 그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이름과 역할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배우자, 어떤 직업과 신념. 그러나 그것들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게 되지요. 이 질문이 가리키는 곳은, 그런 변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입니다.


이름은 바뀔 수 있고, 직업은 내려놓을 수 있으며, 관계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나답게 하는 그 무엇, 다정한 목소리에 불려졌던 기억, 관계 속에서 확인된 존재의 감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림책 속 고양이는 여전히 이름 없는 고양이일지 모르지만,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고, 그는 그 부름을 따라 길을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너는 누구인가?”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 설명보다 더 중요한 것, 역할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고양이가 깨달았던 것처럼, 어쩌면 그것은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에 불려지는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안의 나일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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