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3, Paris, France
#삶의 쾌락은 작고 무해한 감각적
즐거움으로 채워진 상자 같은 것입니다
파이 껍질을 숟가락으로 깨뜨리는
순간의 쾌감, 강물에 물 수제비 뜨는 재미
곡식 자루에 손을 넣어 알갱이가
손가락 틈새를 빠져나가는 촉감이
그 예지요
영화 아멜리에 中
우리는 점심 식사를 위해 이동했다.
점심 식사 장소는 'Benoit.'
퐁피두 센터 근처에 위치한 이 음식점은 미슐랭 1 스타(미쉐린 가이드)를 받았던 곳이다.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된 것은 나 홀로 여행 계획 전체를 세우고, 유명 관광지의 입장권 등을 사전 예약한 것에 대한 친구의 감사 표시였다. 내 만족을 위한 이기심의 행동이 이렇게 비치게 되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런 것을 굳이 거절하는 성격은 아니기에 냉큼 그 제안을 수락했다.
미슐랭 가이드의 본 고장이자 미식의 천국 파리. 먹는다는 것에 대해 거창한 의미를 달고 사는 나에게, 파리에서 먹는 정통 프렌치 요리라는 것은 생의 목적을 위한 섭취가 아닌 맛의 탐닉이자 인생에 또 없을 유일무이한 기회였다.
식에 대한 탐은 자칫 다른 결핍에 대한 보상이나 포만감 이상의 과욕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영화 ‘라따뚜이’와 ‘먼 나라 이웃나라 프랑스 편’등을 보며 자라온 내 기억은, 그런 경계를 충분히 무력화시킬 만큼 강렬했다. 그렇기에 이곳에서의 식사는 나에겐 버킷리스트 이상의 경험이었고, 우리에겐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상징적인 의전이자 최후의 만찬과도 같았다.
예약 시간 30분 전에 도착한 Benoit. 외관은 그저 평범한 식당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왠지 모를 긴장감에 휩싸였다. 백화점 1층 명품관을 서성거리는 것처럼, 들어가도 되나 싶은 그런 느낌이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바로 앞에서 요리사 복장과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단체로 잡담을 하고 있다. 예약 시간보다 일찍 방문하는 것은 서로에게 무례한 행동이었을까. 내 평생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식당 문턱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순간 그들도 놀라고 우리도 놀랐다. 그들이 놀랐던 이유는 아마도 고급 식당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리의 추레한 행색 때문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멀뚱멀뚱. 어색한 대치 상황을 깨려 미스터 김이라 하자, 그제야 눈빛이 온화해진다.
담당 서버의 안내를 받아 테이블로 이동했다. 이곳 역시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고급 레스토랑에 기대하는 쾌적한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이는 시선에 대한 개의치 않음이 귀결된 그들 나름의 삶의 방식 같아 보였다.
테이블에 앉자 눈앞의 식기가 눈에 들어온다. 고풍스러운 장식에 큼지막이 적힌 B는 이곳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뜻이겠다. 그리고 겉을 두르고 있는 금테의 자잘한 흠집들은 세월을 의미하는 오랜 날들의 연혁이었다.
메뉴판을 받아 들고 우리는 한동안 번역 일에 몰두해야 했다. 런치 메뉴라 전식에서부터 본식, 후식까지 골라야 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어떤 메뉴인지는 알 수 없었고, 물고기인지 오리인지, 소인지 이 정도로 가늠만을 한 채 주문을 완료했다. 그리고 우리는 따로 샴페인 한 잔씩과 푸아그라를 주문했다.
곧바로 나온 로제 샴페인. 친구와 나는 잔을 들고 오는 서버를 보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 잔에 18유로인데, 잔의 크기는 한 입에 털어 넣어도 모자랄 만큼 작았기 때문이다. 우린 장미향을 느끼는 척 입맛만을 다시며 거의 그 샴페인을 입술을 적시는 용도로 사용했다.
차례차례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식전 빵에서부터 푸아그라, 전식과 본식까지. 여행 전에 참 말이 많았던 푸아그라 요리는 첫날의 식사보다는 별로였다. 강제로 사료를 먹이는 ‘가바쥬’로 인해 동물 학대 논란이 많은 음식인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끓어오르는 궁금증은 끝내 이기적인 선택을 만들어냈다. 위선적 이게도 마음만큼은 그렇게 자란 거위가 아니길 빌었다.
무화과 잼이 곁들여져 나온 푸아그라의 맛은 예상대로 녹진하고 기름진 맛이었다. 달달하고 상큼한 무화과 잼과 적절히 어우러졌으나 매트한 식감은 잔향을 너무 오래 끌고 갔다. 아마 푸아그라는 이번 여행에서의 식사가 마지막일 것 같다. 죄책감이 깃들어진 채 얻은 것은 후에 언제라도 켕기기 마련이다.
전식과 본식은 모두 생선 요리를 먹었다. 고등어 무침과 대구 요리. 전식은 다른 메뉴를 골랐으나, 생선을 못 먹는 친구에게 특히나 비리기로 유명한 고등어 요리가 나와서 흔쾌히 바꿔주었다. 전식과 본식 모두 맛은 좋았지만 그 식재료가 가질 수 있는 한계가 분명 드러나는 듯했다. 미슐랭 1 스타라 해서 확연하게 차이가 있는, 그런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다만 본식에서 대구 요리와 어우러진 레몬 소스는 꽤나 신선했다.
후식으로 나온 타르트는 가장 기억에 남았다. 파삭한 시트에 달달한 필링.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오로지 미각에만 집중하게끔 만드는 맛이다. 이후 마들렌과 초콜릿까지 먹고, 에스프레소까지 마신 후에야 식사는 끝이 났다. 우아하게 마셨으면 좋았으련만 기어코 차가운 얼음을 주문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먹었다.
식당을 나가며 식사 내내 열심히 재료 설명을 해주었던, 좋은 샴페인과 와인을 추천해준 서버에게 감사를 표했다. 팁을 후하게 주고 싶었으나, 우리의 경제 상황은 당장 공항에 가는 것마저 고민해야 했었기에 미소와 인사로만 대신했다.
그렇게 Benoit에서의 식사는 끝이 났다. 새로운 경험이라는 측면의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채.
그 대가는 대략 180유로에 육박했다. 이십몇 만 원어치의 경험. 내 지출이 아니어서 그랬을 수 있겠지만 나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 음식의 맛이 확연하게 특별하다거나 좋아서가 아니었고, 그저 오랜 숙원을 하나 이뤘다는 것이 내심 흐뭇했다.
삶의 미련들을 채우는 것.
빈 공간들을 채우는 것.
많이 먹기도 했겠지만 이 포만감은 소화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Season.1 - 안녕. 그리고 안녕
[Spain, France] by.mind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