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나였다는 걸 깨달은 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오늘 하루 동안 나한테 한 말들을 되짚어봤다.
"왜 이것도 제대로 못해."
"또 늦게 일어났네, 한심하다."
"저 사람은 잘만 하던데, 나는 왜 이 모양이야."
하루 종일 누군가 나를 욕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생각.
"오늘도 늦게 일어났네. 한심하다."
회의 중에 말을 더듬으면,
"왜 맨날 이 모양이야."
점심을 혼자 먹으면,
"나는 왜 이렇게 친구도 없지."
하루 종일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상한 건, 다른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말하면 화를 낼 텐데 내가 나한테 하는 말엔 무감각하다는 거다.
24시간 붙어 있으면서 가장 많이 비난하고, 가장 쉽게 실망하고, 가장 차갑게 평가하는 사람.
그게 나였다.
오전에 이메일 하나를 잘못 보냈다.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을 하루 종일 붙잡고 있었다.
점심 먹으면서도,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집에 와서 씻으면서도.
"왜 확인을 안 하고 보냈을까."
"다들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진짜 일을 못하는구나."
작은 실수 하나가 나라는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친구가 같은 실수를 했다면?
"그럴 수 있지 뭐, 누가 안 그래"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내 실수는 용납이 안 된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계속 괴롭힌다.
친구가 힘들다고 연락 오면 이렇게 말한다.
"진짜 많이 힘들었겠다."
"그 정도면 충분히 잘한 거야."
"너무 자책하지 마."
그런데 내가 힘들 때는?
"이 정도 가지고 뭘 힘들어해."
"다른 사람들은 더 힘든데도 잘만 하던데."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할까."
똑같은 상황인데 기준이 다르다.
왜 나는 남에게는 공감하고 위로하면서 나한테는 채찍질만 할까.
아마도 그건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잖아', '더 할 수 있었잖아'라고 나 자신을 몰아붙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도 충분히 버텨왔다.
내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 어땠어?"
누군가 물으면 습관처럼 대답한다.
"그냥 그랬어. 별일 없었어."
하지만 별일이 없던 게 아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급하게 준비하느라 아침도 못 먹었고,
출근길 지하철이 지연되어 회의에 늦을뻔했고,
상사의 날카로운 지적에 하루 종일 위축되어 있었고,
점심은 혼자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웠고,
퇴근길엔 이유 모를 허전함에 눈물이 났다.
작은 일들이지만 하나하나가 쌓이면 무겁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무게.
말로 설명하기도 애매한 무게.
그 무게를 혼자 짊어지고 하루를 버텼는데, 정작 나조차 "별일 없었다"고 치부해버린다.
친구가 시험 끝나고 연락 오면,
"고생했어, 진짜 수고 많았어"라고 말한다.
동료가 프로젝트 끝내면,
"너무 고생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뭔가를 끝냈을 때 스스로에게 "수고했어"라고 말해본 적이 있나?
없다.
끝내고 나서도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아쉬운 부분이 많네"라고만 생각한다.
왜 나는 나한테만 인색할까.
왜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게 이렇게 어색할까.
어쩌면 나는 내가 제일 무시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위로해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나를 먼저 위로하는 게 빠르겠다.'
다른 사람은 내 하루를 다 알 수 없다.
내가 얼마나 버텼는지, 얼마나 참았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건 나만 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나한테 먼저 말을 걸기로 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 소파에 앉으면,
"오늘도 수고했어."
밤에 잠들기 전에는,
"오늘 하루 잘 버텼어. 고마워."
처음엔 정말 어색했다.
혼자 중얼거리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계속 하다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나를 알아주니까.
위로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힘든 날엔 좋아하는 음식을 사 먹는다.
"오늘 힘들었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일찍 퇴근한 날엔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신다.
"오늘은 나를 위한 시간."
주말엔 아무 계획 없이 집에서 쉰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이런 작은 선택들이 나를 위로하는 방법이다.
예전엔 이런 것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뭘 사 먹어', '돈 아까운데', '시간 낭비 아냐?'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를 챙기는 게 낭비가 아니라는 걸.
나를 위로하는 작은 시간들이 쌓여서 내일을 버틸 힘이 된다는 걸.
사람들과 있으면 에너지를 쓴다.
말을 하고, 반응하고, 맞춰야 하니까.
웃고, 고개 끄덕이고, 공감하는 척해야 하니까.
그런데 혼자 있으면 그냥 나로 있을 수 있다.
아무 말도 안 해도 되고,
웃지 않아도 되고,
괜찮은 척 안 해도 된다.
멍하니 창밖을 보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누워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를 보거나.
이런 혼자만의 저녁 시간이 나를 다시 나로 만들어준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조용히 숨 쉬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씩 회복된다.
사람들은 가끔 "혼자 있으면 외롭지 않아?"라고 묻는다.
외롭지 않다.
오히려 혼자 있을 때 나는 나와 가장 가까워진다.
잠들기 전, 오늘 하루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말한다.
"오늘도 수고했어."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잘 버텼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말들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힘이 된다.
큰 성과를 내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나는 오늘을 살아냈다.
그게 충분히 수고한 일이다.
처음에는 이런 말을 나한테 하는 게 민망했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하다 보니 달라졌다.
아침에 일어날 때 조금 덜 무겁고,
실수했을 때 조금 덜 자책하게 되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조금 더 평온해졌다.
나한테 건네는 말 하나하나가 쌓여서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됐다.
다른 사람의 위로도 좋지만, 결국 나를 제일 잘 위로할 수 있는 건 나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할 때 편안한지,
어떤 말이 필요한지,
언제 쉬어야 하는지.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나의 제일 든든한 편이 되어주기로 했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기 전에,
먼저 내가 나를 단단히 붙잡아주기로 했다.
오늘 하루도 잘 버텨낸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고생했어."
"내일은 좀 나을 거야."
"괜찮아, 잘하고 있어."
혹시 오늘 하루가 힘들었나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무게를 혼자 짊어졌나요.
그렇다면 오늘 저녁만큼은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오늘 정말 수고했어."
그 한마디가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될 겁니다.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몰라줘도 괜찮아요.
당신이 당신을 알아주면 됩니다.
오늘 하루, 당신은 얼마나 버텼나요?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