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한 순간 무너진 약속
그해 4월, 도야마의 눈벽을 보고 싶었다.
나는 그곳에 가겠다고 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1년 후에,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가자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 약속을 위해 도야마는 잠시 보류했다.
그해의 눈벽은, 그렇게 멀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약속을 남긴 채 끝났다.
나에게 그 미완의 약속을 마무리하는 일은 중요했다.
약속을 만든 사람이 그 결말까지 말해야 이야기는 비로소 닫힌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혹시’라는 가능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약속은 ‘둘의 것’이었으니까, 반드시 둘의 것으로 끝내고 싶었다.
나는 우리의 서사에 ‘끝’이라는 단어가 필요했다.
‘둘의 것’이라고 믿었던 그 약속은,
어쩌면 처음부터 내가 붙잡고 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약속은 열어보지 않은 상자처럼 남아 있었다.
확인하기 전까지는, 지켜질 수도,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로.
‘내년’이라는 이름의 뚜껑 아래,
감정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었다.
그 약속은 여행이 아니라 실험이었다.
관측되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될 예정이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붙잡고 있던 것은 ‘슈뢰딩거의 도야마’였다.
도야마에서 눈벽을 볼 수 있는 시기는 매년 4월에서 6월 사이다.
자연이 만든 이 주기는, 우리의 감정이 아직 남아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가 감정과 상관없이 약속을 이행할 사람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래서 위험했다.
그가 약속을 이행한다면, 흔들리는 쪽은 오직 나였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그는 나에게 시간과 돈을 쓰는 여행조차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야마에 가지 않겠다는 대답을 들을 안전한 기회였다.
그래서 함께했던 사유를 핑계 삼아 조심스럽게 그에게 연락했다.
“도야마 약속은 유효한가요?”
답장이 왔다.
예상 밖이었다.
그는 도야마에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애써 숨겨둔 감정들에 다시 불이 붙을까 봐 여러 생각이 든다고 했다.
여행을 가는 일 자체보다, 그 뒤에 따라올 일들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지 먼저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당혹스러웠다.
그에게는 나에 대한 감정이 당연히 없다고 생각했다.
설령 감정이 남아 있다 해도, 그는 그것을 말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던 내 예상은 틀렸다.
나는 그가 감정 없이 약속을 이행할 사람이라고 믿었고,
그 옆에서 나만 흔들릴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흔들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흔들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을 때만 움직이려 했다.
그 역시 마음이 흔들릴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을 때만 움직이려 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함께 고민하려 했지만,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나는 우리의 관계를 ‘약속’이라는 상징으로 마무리하려 했다.
나는 직면함으로써 정리를 원했고,
그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감정을 접어두었다.
감정은 남아 있었지만, 그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달랐다.
약속을 다루는 방식에는, 우리가 감정을 다루는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같은 자리에 서 있었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감정 이후의 삶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가 본래 냉정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감정을 다루기 위해 '냉정'을 선택해 살아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냉정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의 관리 방식이었다.
감정을 직면할 용기가 부족한 이들은,
이성이라는 차가운 도구로 마음을 다스리며 스스로를 지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야마의 차가운 눈벽에는, 그 냉정조차 녹이는 열(熱)이 잠들어 있었다.
그곳은 차갑게 얼려둔 감정의 타임캡슐이 숨겨진 무의식의 서랍이었다.
동시에 차갑고도 뜨거운 감정을 해동시키는 장소였다.
결국 우리가 머물렀던 자리는 감정을 직면하지 않은 채 서 있던 '냉정과 열정 사이'였다.
끝내 누구도 ‘가지 않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약속은 두려움 앞에서 멈춰 섰고,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이별은 감정을 끝까지 직면하지 못한 사람들의 지성의 잔향으로 남았다.
도야마의 눈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