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을 품은 수성

사랑은 비너스가 아니라, 헤르메스였다

by 심연천문대

비너스는 사랑의 신이다.

하지만 사랑을 하는 인간은, 금성보다 수성(Hermes)에 더 가깝다.


1장. 사랑의 행성

수성은 태양에 가장 가까운 행성이다.
그래서 수성에서 바라본 태양은 지구에서보다 세 배 이상 크고,
그 거대한 크기는 수성을 잠식해버릴 듯한 위압감을 준다.
그리고 수성의 대기는 태양의 열을 견디지 못한 채 서서히 증발한다.


이는 사랑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우리를 잠식하는 순간과 닮았다.
수성이 태양 옆에서 대기를 잃듯, 사랑 앞에서는 자존심과 경계, 계산, 방어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증발한다.
남는 것은 맨몸 그대로의 ‘나’ 뿐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결국 가장 꾸밈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결국 사랑은 인간을 원형으로 되돌린다.



2. 대기층 없는 사랑의 온도

대기가 거의 없는 수성은 열을 머금지도, 고르게 분산시키지도 못한다.

태양을 마주한 면은 400°C 가까이 달아오르고, 그늘진 면은 –170°C까지 얼어붙는다.
극단의 온도가 공존하는 것이다.


사랑도 때로는 그렇게 작동한다.

사랑 앞에서는 한순간 뜨겁게 타오르다가도, 어느 순간 차갑게 식을 수 있다.
그것은 온도를 붙들어 줄 대기, 즉 애틋함·신뢰·시간이라는 안정의 층이 없기 때문이다.
대기층을 쌓지 못했거나 쌓을 수 없었던 관계는
결국 적정 온도를 유지하지 못한 채,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워진다.



3. 기괴한 사랑의 공전

또한 수성은 자전보다 공전이 더 빠르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서는 태양이 뜨고, 지고, 다시 떠오른다.
마치 시간이 되감기는 듯한 기괴한 하루처럼.


사랑은 결코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는, 늘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어디서 시작됐는지도 모르는 자리에서 갑자기 다시 ‘빛’이 스며든다.
사랑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방향에서,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사라졌던 태양이 다시 떠오르듯, 사라졌다고 생각한 사랑도 어느 날 불현듯 다시 떠오른다.
기억은 시간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감정은 순서를 바꾸며, 망각은 언제든 무효화된다.
사랑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보이지 않는 궤도로 물러나는 것뿐이다.



4. 잔열로 만든 사랑의 꼬리

수성의 잃은 대기는 태양빛에 반사되어 길고 희미한 꼬리로 남는다.


사라진 대기가 꼬리를 남기듯, 사랑도 끝난 뒤에도 한동안 여운을 남긴다.
이는 사랑에 너무 가까이 있었던 이가 지니는 잔열이다.
한때 뜨거웠던 추억은 길게 늘어진 꼬리의 형태로 남는다.


사랑을 했던 나는, 수성이었다.

그 앞에서 모든 방어는 증발했고, 온전한 ‘나’만 남았다.

그래서 가장 뜨겁고, 가장 순수했다.

차갑게 잊으려 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직 그 조용한 꼬리를 품고 있다.



5장. 두 지점 사이에서

사랑은 뜨거운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 뜨거움 앞에서 내가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수성은 태양에 가장 가까운 행성이며, 고대에서는 헤르메스의 별이라 불렸다.

그리고 나는 한때, 누구보다 사랑에 가까이 있었다.


결국 진짜 사랑은, 태양 옆에서 매순간 형태를 잃고 다시 태어나는 수성이었다.

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천천히 헤르메스가 되었다.


사랑의 신은 비너스였지만,

사랑을 건너가게 한 것은 언제나 헤르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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