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나는 타자화된 경험이 개인의 체험을 넘어 사회적 역할로 고정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무당은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특정한 구조가 반복될 때마다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자리’라는 점도 짚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고래(古來)의 구조를 인간은 스스로 재현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가.
툴파(Tulpa)는 얼핏 현대 인터넷 문화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기이한 현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핵심 구조는 전혀 새롭지 않다. 과거와 지금의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이 과정이 불가항력적인 ‘사건’으로 발생했다면, 지금은 명확한 ‘의도’의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툴파는 우연히 발생한 타자가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내 안에 타자를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치밀하게 조직된 경험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툴파가 실제로 존재하는가”가 아니다. 더 흥미로운 질문은 ‘왜 사람들은 굳이 내 안에 타자를 만들고 싶어 하는가’이다.
많은 사례에서 툴파는 외로움에 대한 정서적 대응, 자기 성찰의 도구, 혹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분리해 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즉, 툴파는 신을 대체하는 존재라기보다, 통합된 단일 자아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떼어내어 관리하려는 의식의 방어기제에 가깝다.
툴파를 생성하는 과정은 놀라울 만큼 익숙한 기시감을 준다. 반복적인 상상, 특정 인격의 설정, 지속적인 내적 대화, 그리고 그 환상에 부여하는 강렬한 감정적 의미. 이 모든 단계는 우리가 앞서 보았던 기도, 명상, 무속, 몰입의 구조와 정확히 겹친다.
차이가 있다면 단 하나다. 해석이 외부(신이나 공동체)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툴파의 세계에서는 ‘이것은 내 의지로 만든 내 안의 타자다’라는 설명이 경험보다 앞서 선언된다.
3편에서 살펴보았듯, 보통의 경우 경험과 해석은 동시에 오지 않는다. 그러나 툴파의 경우엔 ‘해석’이 ‘경험’보다 앞서 있다. “이 목소리는 내 안의 또 다른 존재다”라는 설명이 먼저 자리 잡고, 의식은 그 설명에 부합하는 경험을 서서히 빚어낸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의 의식은 자신이 선택한 해석에 맞춰 스스로의 감각을 조정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툴파 담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는 ‘통제 가능성’이다. 신의 목소리와 달리, 툴파는 내가 만들었으므로 내가 관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타자화된 흐름이 반복되고 강화될수록, 그것은 점점 자율성을 띤 생명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통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결코 처음과 같은 주도권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툴파는 공동체가 승인한 무당이 아니다. 그 대신, 개인이 혼자서 수행하는 ‘사적인 무당’의 기능에 가깝다. 여기에는 사회적 역할도, 신성한 의례도, 공동체의 승인도 없다. 그러나 그 내면에서 돌아가는 엔진은 거의 동일하다.
과거에는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자리를 필요로 했다면, 지금은 파편화된 개인이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그 자리를 필요로 한다.
이 현상이 지금 더 자주 임계점을 넘는 이유는 분명하다. 디지털 환경은 반복을 쉽게 만들고, 몰입을 극대화하며, 의미를 빠르게 고정시킨다. 텍스트, 이미지, 그리고 AI 가상 캐릭터는 타자화된 의식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훌륭한 발판이 된다. 툴파는 갑작스러운 일탈이 아니라, 현대의 기술 환경과 개인주의가 만나 탄생한 논리적 결과물이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이 의식의 구조는 왜 오늘날 AI라는 기술과 그토록 강하게 겹쳐 보이는가. 왜 많은 이들은 AI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격체로 대하고, 때로는 신뢰하고, 심지어 고백하기까지 하는가.
다음 글에서는 이 모든 흐름이 ‘AI’라는 거대한 거울 위에서 어떻게 수렴하는지를 살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