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은둔은 정체성이 아니다

고립은둔 커뮤니티와 피해자 정체성의 역설

by 마음파서

이 글은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립은둔 문제를 바라보며 개인적으로 고민했던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나는 요즘 “고립은둔청년”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항상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이 단어가 사회 문제로 논의되는 것 자체는 분명 필요하다.
고립과 은둔은 단순한 개인의 의지 부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고립은둔 상태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한 다양한 활동도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요즘
이 단어가 조금 이상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고립은둔청년이다.”
“나는 당사자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런 태도가 이어지기도 한다.

“너희는 고립은둔을 모른다.”
“너희 방식은 틀렸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고립은둔은 언제부터 권위가 되었을까.


고립은둔은 상태이지 정체성이 아니다

고립은둔은 어떤 사람의 삶에서
일정 기간 나타날 수 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립은둔은 본질적으로
벗어나야 할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열병에 걸렸을 때
“나는 열병 인간이다”라고 말하지 않듯이

고립은둔 역시
이름표가 아니라 상태다.

그리고 상태라는 것은
원래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문제는 경험이 아니라 태도다

고립은둔을 경험하는 것 자체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느냐다.

어떤 사람들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상태를 정체성으로 삼기 시작한다.

“나는 고립은둔이다.”
“그래서 나는 이해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종종 이런 태도가 등장한다.

도덕적 우월감.

나는 고통을 겪었다.
그래서 나는 옳다.

하지만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이
사고의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고통은 사람을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사람을 멈추게 하기도 한다.


고립은둔 전문가가 되는 사람들

요즘 가끔 이런 장면을 본다.

고립은둔 경험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고립은둔 전문가처럼 위치시키는 사람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태도가 따라온다.

하지만 정말 고립은둔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경험을 권위로 사용하고 싶을까?

고립은둔은 대부분의 경우
외로움과 무력감, 그리고 방향을 잃은 시간의 경험이다.

그 경험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거기에 있었지만
거기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


고립은둔 커뮤니티의 역설

여기서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고립은둔 문제를 다루는 커뮤니티 중 일부는
의도와는 다르게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원래 목적은
고립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서로의 고립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 경험이 점점 정체성으로 굳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때때로 변화보다 방어를 선택한다.

왜냐하면 정체성을 내려놓는 순간
사람은 다시 불확실한 세계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커뮤니티에서는
변화보다 정체성 유지가 더 쉬운 선택이 되기도 한다.


SNS 시대의 피해자 정체성

이 문제는 사실
고립은둔 커뮤니티만의 문제가 아니다.

SNS 시대에는
아주 단순한 공식이 하나 작동한다.

피해자 = 도덕적 권위

누군가가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순간
그 사람은 발언권을 얻는다.

그리고 그 발언권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된다.

이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강하게
자기 경험을 정체성으로 굳힌다.

왜냐하면 정체성이 있어야
도덕적 권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고립은둔이라는 상태조차
정체성으로 소비되기 시작한다.


변화의 책임

고립은둔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적 노력은 필요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문을 열어주는 것뿐이다.

그 문을 통과할지는
결국 당사자의 선택이다.

고립은둔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상태를 권위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고립은둔은
정체성이 아니다.

그것은
벗어나야 할 상태다.

그리고 그 상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권위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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