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인싸들과 대화할 기회도, 그 누구라도 흐름이 이어지는 대화를 놓쳐버린 저는 거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만은 없기에 등록처 데스크(직원들은 철수한 상황)에 볼 일이 있는 것처럼 왔다 갔다 했습니다.
거기서 캐나다에서 온 안드레아(ANDREA POPE)를 만났습니다. 늦게 도착한 안드레아는 명찰에 붙여야 할 라벨을 보면서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혼잣말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분이라 도와주려는 오지랖이 발동한 것인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뻘쭘해서인지 제 딴에는 뭐라도 알려준다고 '이 라벨은 이런 때 붙이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런 식으로 말을 걸었습니다.
웬걸. 백발의 그분은 저보다 더 활기 있고 에너지 넘치고 오지랖 캡짱인 분이었던 거죠. 솔직히 처음 1분 동안은 '조증인가?'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화가 너무 재미있고 인상 깊은 대화가 많이 있어서 글로 남겨보고자 합니다. 배려의 태도 때문인 것인지, 캐나다 식 발음이 비교적 이해하기 좋은 것인지 처음엔 50프로 정도가 들리기 시작하고 점점 이해도가 올라가서 어느 정도 대화를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구글에 지금도 그분의 오래전 작품이 거래되고 있음
그분은 캐나다에서 금속 장신구 아티스트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50대에 ADHD라는 것을 알고 많은 깨달음을 얻고 인생을 보는 뷰가 달라지면서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을 늦게 얻은 것이 안타까워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ADHD를 알리는 코치이자 연사(Speaker)가 되어 활동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 명함을 건네주는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QR에 접속하면 ADHD 테스트 문항이 나옵니다.
이걸 누구라도 해보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제가 정신건강의학과 클리닉을 하고 있으니 더 잘 되었다며 진단 불문하고 방문하는 모두에게 간단한 ADHD 테스트를 할 수 있도록 이런 명함을 나눠주거나 비치해 두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사이사이 대화의 완급 조절을 하면서 '자신의 말이 알아듣기 어려우면 다시 되물어달라. 번역기를 사용해도 된다'라고 격려해 주어서 영어로 대화하는 것에 점점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치료 여부를 떠나서 몰랐던 ADHD를 아는 것은 모순적인 자신을 이해하는데 큰 퍼즐을 찾는 것이라는 요지의 말도 했는데 제가 요즘 진단할 때 이런 맥락으로 설명하는 것과 일치해서 강한 공감을 표현했습니다.
그분도 더 흥이 나서 말을 이어가기를, ADHD 특성이 좋은 쪽으로 이어지면 큰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데 그것을 잘 이용하지 못하고 단점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불식시키고 ADHD에 접근하기 수월하도록 자신은 ADHD를 가진 역사적 인물을 소개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설명할 때 스타워즈의 '포스와 다크포스 개념'을 인용한다고 하면서 제다이족이 자신을 알고 깊은 수련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지만 자칫 다크포스로 변질 될 수 있다고 말하자 맞장구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안드레아는 이어서 흔히 언급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차르트... 등 역사 속 ADHD로 추정되는 인물을 나열했습니다. 그다음이 흥미로웠습니다.
근데 말이지.. 나는 항상 궁금했는데 말이야. 너희 동양 쪽에서는 왜 ADHD를 가진 역사 속 인물이 없는 거니? By the way, I was always wondering Why are there no historical figures with ADHD in your culture?
(늘 고민해 온 게 사실인지 저를 보고 갑자기 생각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동양에서 추구하는 삶의 태도나 가치관, 역사적 인물을 기술하는 방식이나 자주 기술되는 내용이 다름에서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이런 질문을 해 주는 것이 정말 신선하고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웃으면서 제게 숙제 하나 생겼다며, 네가 한국에 가면 너네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ADHD를 가진 동양의 역사적 인물을 꼭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꼭 그리하겠노라고 저도 약속을 했습니다.
대화 말미에 부끄러운 태도로 제가 미리 준비한 제주도산 한라봉 모양 키링을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서 드렸습니다.
"OH! MAYBE I WON'T FORGET YOU, LET ME HUG!"
너무 따뜻하고 반갑고 지금까지의 부끄러움을 해소해 주는 포옹이었습니다.
P.S. 대화는 제가 기억하는 맥락으로 재구성한 것이지 실제 영어 표현이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