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씨앗은 마음에서 자란다

by PlanetWal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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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지하철 안, 사람들 어깨가 서로를 밀어내지도, 껴안지도 못한 채 기계처럼 흔들린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창밖을 본다. 어두운 터널 벽에 광고판 불빛이 번쩍 스치고, 그 사이사이에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진다. 똑같은 얼굴인데 오늘은 유난히 지쳐 보인다. 몸이 피곤해서라기보다, 하루 종일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꼭 쥐고 있었던 사람의 얼굴이다.

지하철의 진동이 온몸을 흔들고 있지만, 사실 흔들리는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아침부터 그랬다.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커피를 들고 휴대폰을 꺼냈다. “오늘은 제발 큰 이슈 없었으면.” 메신저 알림이 없는 화면이 잠깐 평화로워 보여도, 그 평화는 금방 깨질 걸 나는 안다. ‘없었으면’이라는 바람 안에는 이미 불안이 섞여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거부하고,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마음속에서 선을 긋는다. 그 선이 내가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을 조여 온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팀 단톡방이 울렸다.

“어제 보낸 자료, 조금만 더 보완해 주세요. 오전 회의에서 공유할게요.”

말은 공손한데, 내 머릿속에는 해석이 먼저 달린다. ‘조금만’이라는 말은 사실 ‘꽤 많이’일 가능성이 크고, ‘공유할게요’는 곧 내 이름이 화면에 떠오른다는 뜻이다. 이걸 늦게 내면 내가 무능해 보일까? 내가 무능해 보이면 올해 평가에서 불리할까? 평가가 불리하면 인상률은? 인상률이 낮으면 내 계획은? 그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아직 커피가 식지도 않았는데 마음은 벌써 다음 분기까지 뛰어가 있다.


10시 회의실, 프로젝터 화면에 숫자들이 떠 있고, 팀장님은 “이번 분기 방향성”을 말한다. 나는 내 파트를 설명하다가 잠깐 말을 더듬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그 찰나에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온다.

‘왜 또 이래. 준비했잖아.’

‘지금 다들 너를 본다. 저 사람 표정 봐. 실망했어.’

그 순간 상사가 던진 한마디. “이 부분은 논리가 좀 이상한데?”

팩트일 수도 있고, 그냥 더 다듬자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 마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논리가 이상하다”는 말이 “너는 이상하다”로 번역된다. 문제는 보고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 전체로 번진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목 뒤가 뻣뻣해진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내 머릿속에는 그 문장만 반복된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음 업무로 넘어갔는데, 나는 아직 그 한마디를 들고 서 있다. 마치 손에서 떨어뜨리면 큰일 나는 것처럼…


점심시간에도 마음은 쉬지 않는다. 식당에 앉아 국을 한 숟갈 뜨려는 순간, 대화는 늘 ‘돈’ 근처로 흘러간다. 다들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한다. 마치 그냥 날씨 이야기처럼…

“야, 너는 아파트 샀다며? 대출 얼마나 받았어?”
“아직… 뭐, 겨우 했지.”라고 말하는 그 사람의 표정은 ‘겨우’가 아니다. 숟가락을 내려놓는 손끝에 작은 승리가 묻어 있다. 축하해 주는 목소리들이 오가고, 누군가는 “역시 타이밍이 중요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같이 웃으며 “잘했다”라고 말하지만, 내 속에서는 다른 계산기가 켜진다.
‘나는 아직인데… 나는 뭐 하고 있지? 지금이라도 따라가야 하나?’

옆자리에서는 주식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 작년에 엔비디아로 꽤 먹었어. 이번에도 비슷하게 갈 것 같은데?”
“오, 진짜? 몇 퍼센트?”
퍼센트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공기가 바뀐다. 점심밥이 아니라 성적표를 펼쳐 놓은 기분. 그들이 말하는 숫자는 수익률이지만, 내 귀에는 ‘너는 얼마나 잘 살고 있니’라는 질문처럼 들린다. 나는 괜히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 만한 말을 찾다가, 결국 “요즘 시장이 너무 어렵지 않아?” 같은 안전한 문장을 던진다. 그 말은 사실 ‘나는 별로 못했다’라는 고백을 우회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꼭 한 명은 코인 이야기를 한다.
“나 코인으로 한 번 크게 망했잖아. 진짜 그때 생각하면…”
다들 “아이고” 하고 웃어 넘기지만, 그 웃음은 위로 같기도 하고 경계 같기도 하다. ‘망했다’는 말이 농담처럼 소비되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더 불편해진다. 망한 사람이 있다는 건, 벌어든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그 사이 어딘가에 내가 있다는 뜻이다. 어디쯤이지? 나는 늘 중간도 못 되는 기분이다.

누군가는 “이번에 청약 넣었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월세 올랐다, 미치겠다”라고 한숨을 쉰다.
이 대화가 꼭 나를 겨냥한 건 아닌데도, 나는 계속 나를 대입한다. 누구는 올라갔고, 누구는 버텼고, 누구는 떨어졌다. 그리고 그 그래프 위에서 나는 조용히 내 좌표를 찾는다. 찾을수록 초조해진다.

그 순간부터 점심은 음식이 아니라 마음의 비교가 된다.
나는 밥을 씹으면서도 내 자리를 씹는다.
‘나는 아직 집도 없고, 주식도 별 재미 못 봤고, 코인도 겁나서 못 했고… 그럼 나는 뭐지?’
배는 채워지는데 마음은 더 비워진다. 숟가락질은 계속되는데, 속은 점점 마른다. 마치 점심시간 내내 누군가가 내 안의 불안 버튼을 눌러대는 것처럼.

결국 내 머릿속에서 결론은 늘 같은 곳으로 수렴한다.
‘나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남들처럼, 아니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그 생각이 올라오는 순간, 밥상 위에 놓인 건 반찬이 아니라 성취와 실패의 목록이다. 그리고 나는 그 목록을 삼키느라, 정작 맛을 느낄 틈을 잃는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지하철에 올라타는 지금, 문득 생각한다.

‘왜 이렇게 사는 게 늘 버겁지?’

누구에게 들려주려는 말도 아니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말도 아니다. 그냥 가슴 깊은 곳에서 저절로 새어 나온 목소리. 아무도 대답하지 않지만, 그 질문은 오랫동안 내 안에 머문다.




불교에서 인생을 ‘고(苦)’, 즉 괴로움이라 말했다. 처음 들었을 땐 그 말이 너무 비관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가 그렇다. ‘고’는 거대한 불행만을 말하지 않는다. 작은 불편함, 미묘한 불만, 만족 속에 섞인 불안, 잘된 뒤에 따라오는 허무—그 얇고 촘촘한 결이 고다. 평범한 하루에도 고는 늘 묻어 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그 고가 사건 자체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사의 한마디가 괴로움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한마디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괴로움의 크기를 결정한다. 동료의 표정이 나를 찌르는 게 아니라, 그 표정에 내가 붙여버린 의미가 나를 찌른다. 외부의 일들은 자극일 뿐이다. 마음이 그 자극을 붙잡아 ‘내 이야기’로 만들 때, 고는 자라난다. 고통의 씨앗은 바깥에서 날아와 내 안에 꽂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서 싹을 틔운다.


그 씨앗의 이름이 갈애(taṇhā), 목마름이다.

“더 잘되고 싶다.”

“이번엔 인정받고 싶다.”

“이건 내 것이었으면.”

“저 인간 없어졌으면.”

겉으로는 성장, 책임감, 성실함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밑바닥에는 ‘나는 부족하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부족하니까 더 채워야 하고, 더 채우려면 더 달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지금의 나’는 늘 모자란 존재가 된다. 지금이 모자라면, 지금은 늘 불만족이다. 만족은 다음 달, 다음 프로젝트, 다음 승진에 가 있다. 그런데 다음에 가면 또 다음이 생긴다. 목마름은 물을 마셔도 잠깐뿐이다.


갈애가 강해지면 집착(upādāna)이 된다. 이때부터 마음은 더 단단히 붙잡는다.

‘이 일은 내가 해야 해.’

‘이 평가는 꼭 받아야 해.’

‘이 사람에게만큼은 인정받아야 해.’

집착은 생각을 좁힌다. 세상이 넓어도 마음은 한 점으로 수렴한다. 그 점이 흔들리면 전체가 흔들린다. 상사가 칭찬하면 하루가 빛나고, 지적하면 하루가 무너진다. 고객이 “좋네요”라고 하면 내가 괜찮은 사람 같고, “별로네요”라고 하면 내가 통째로 실패한 사람 같다. 내 존재가 어떤 결과물에 매달려 버린다.


그렇게 꼬인 마음이 번뇌(kilesa)다. 번뇌는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미세먼지처럼 호흡을 막는다. 번뇌가 끼면 똑같은 상황도 다르게 보인다. 상사의 요청이 ‘조율’이 아니라 ‘공격’으로 느껴지고, 동료의 침묵이 ‘집중’이 아니라 ‘무시’로 들린다. 나는 사실을 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든 화면을 본다. 그래서 더 지치고, 더 예민해지고, 더 쉽게 상처받는다.


불교는 번뇌의 뿌리를 세 가지로 말한다.
탐(貪) — 더 가지려는 마음.
회사에서 탐은 ‘성과’ ‘연봉’ ‘직함’ ‘기회’라는 이름을 달고 온다. 더 가지면 안심할 것 같고, 더 올라가면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탐은 늘 조건을 붙인다. “이 정도면 괜찮아”라는 문장이 끝까지 오지 않는다. 늘 “조금만 더”가 남는다.

진(瞋) — 밀어내고 미워하는 마음.
원치 않는 업무가 내려오면, 내 안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왜 나야?” “왜 이렇게 비효율적이야?” “왜 저 사람은 항상 저래?” 분노는 겉으로는 정의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거부하는 마음이다. 진이 강해지면, 나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장애물’로 본다. 그러면 관계는 금방 거칠어진다. 결국 상처는 서로에게 돌아간다.

치(癡) — 어리석음, 진짜를 보지 못하는 마음.
치가 가장 깊다. 고통이 전부 바깥에서 온다고 믿는 착각, ‘이것만 얻으면 내가 괜찮아질 것’이라는 오해, ‘저 사람이 바뀌면 내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는 믿음. 치가 깔려 있으면, 나는 내 마음의 작동을 보지 못한 채 계속 바깥만 고치려 한다. 바깥이 조금 바뀌어도 또 다른 바깥이 나타난다. 그래서 끝이 없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그 세 가지에 지친 얼굴이었다.

더 얻으려고 조급했고(탐), 뜻대로 안 되면 화가 났고(진), 그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치).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나면, 집에 도착해도 쉬는 게 아니다. 침대에 누워서도 머리는 회사에 남아 있다. 내가 붙잡은 병안의 돌멩이들이 너무 많아서 병에서 손을 못빼는 어린아이처럼…


그런데 가끔, 아주 짧게나마 멈추는 순간이 있다. 지하철이 역에 멈추듯, 마음도 잠깐 멈춘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걸 알아차린다. 어깨가 올라가 있고, 턱이 굳어 있고, 눈썹 사이가 찌푸려져 있다. 나는 오늘 하루를 ‘견디는 얼굴’로 살았다. 이걸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작은 틈이 생긴다. 틈이 생기면, 돌멩이를 내려놓을 가능성이 생긴다.

‘상사의 한마디’라는 돌멩이,
‘동료의 표정’이라는 돌멩이,
‘평가’ ‘성과’ ‘비교’라는 돌멩이.
그것들은 내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무게의 상당 부분은 내 마음이 덧붙인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지적을 받았다. 수정하면 된다.”
“동료가 짜증을 냈다. 그 사람도 피곤했을 수 있다.”
“평가가 있다. 준비하면 된다.”
문장은 짧아지고, 해석은 줄어든다. 그 순간 마음은 조금 맑아진다. 세상이 갑자기 쉬워진 게 아니라, 내가 더 이상 스스로를 추가로 때리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아직 완벽하게 돌멩이를 내려놓지 못한다. 회사원에게 책임과 성과는 현실이고, 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 위에 불필요한 환영을 얹는 일은 줄일 수 있다. 갈애가 올라올 때 “아, 목마름이구나”라고 알아차리고, 집착이 생길 때 “지금 내가 너무 꽉 쥐고 있네”라고 말해 보고, 번뇌가 흐려질 때 “지금 내 눈이 뿌옇다”라고 인정하는 것. 그 정도만 해도 하루의 고통은 ‘사건’이 아니라 ‘마음의 반응’이라는 걸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지하철이 다시 달린다. 창밖의 불빛이 흐르고, 유리창 속 내 얼굴이 또 한 번 나타난다.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고, 내일도 회의가 있고, 메신저는 울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숨을 길게 내쉰다. 내가 쥐고 있던 것들 중 하나를 아주 잠깐 내려놓아 본다.


돌멩이가 바닥에 닿는 소리는 나만 들을 수 있다.
그 소리가 들리면, 마음의 물이 조금 맑아진다.
가로등 불빛이 그 물 위에 비치고, 나는 그 빛을 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고통의 씨앗이 마음에서 자란다면, 그 씨앗을 뽑는 시작도 마음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퇴근길 지하철 한 칸에서, 나는 아주 작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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