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새벽의 별빛 아래에서 다시

by PlanetWal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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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일본에 〈겨울연가가 불을 붙이며 한류가 급격히 번져가던 시절이었다. 그 불씨는 드라마 한 편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일본의 일상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다가 어느 날, 문득 폭발했다.
도쿄의 공기가 바뀌었다. 예전엔 한국인을 “마늘 냄새”로 모욕하던 시선이 거리의 바닥에 남아 있었는데, 그 위로 전혀 다른 바람이 불었다. 역 앞 서점에서 한국 배우가 표지인 잡지가 가장 눈에 띄는 곳으로 옮겨지고, 영상 매장에는 드라마 DVD가 ‘품절’ 딱지를 달고 쌓였다. 한국어 학원 전단이 골목마다 붙고, “드라마 촬영지 투어”가 여행 상품으로 당당히 진열되었다. 사람들은 ‘한국’을 뉴스 속 먼 나라가 아니라, 잊고 지낸 감정이 되살아나는 나라로 불렀다. 누군가에겐 첫사랑이 다시 찾아오는 나라였고, 누군가에겐 눈과 음악과 서정이 살아 있는 나라였다. 나는 그 흐름 한복판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마치 파도의 방향을 먼저 알아챈 사람처럼, “지금이다”라는 예감이 몸을 밀어냈다.


문제는, 나는 일본어를 거의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한국에서 음반사에서 보낸 시간이 있었다. 콘서트의 동선을 짜고, 유통의 길을 뚫고, 홍보 문장을 다듬고,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밤을 새우던 경험. 말이 부족하면 발로 뛰었다. 프린트물을 손으로 정리해 미팅에 들고 갔고, 이해가 안 되는 단어는 얼굴이 뜨거워져도 다시 물었다. 거절을 당해도 돌아서면 또 찾아갔다. 외국에서 혼자 버티는 삶은 늘 배고픈 긴장감 같아서, 그 긴장감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손에 쥔 무기가 분명해졌다. 나는 일본에서 단지 한국 콘텐츠를 ‘팔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 엔터테인먼트와 일본 시장 사이에 놓인 틈을 메우는 교두보가 될 수 있었다. 한국의 제작사와 기획사의 속도, 유통의 관성, 현장의 기세를 알고 있었고, 일본에서 돈과 신뢰가 움직이는 방식도 몸으로 익혀가고 있었다. 한국은 뜨겁고 빠르지만, 일본은 조심스럽고 촘촘하다. 그 사이엔 늘 오해가 태어나고 단절이 생긴다. 나는 그 경계에서 번역하고, 조율하고, 설득할 수 있었다. 한쪽의 욕망이 다른 쪽의 불신으로 번지기 전에, 중간에서 길을 내는 사람. 그 역할은 생각보다 큰 가치가 있었다.

특히 재일교포 투자자들에게 나는 더 특별한 카드였다. 한국 엔터테인먼트는 매력적이지만 늘 ‘먼 세계’였고, 기회는 있어도 실질적으로 닿는 라인은 단단하지 않았다. 일본의 자본과 네트워크가 한국의 제작 현장과 맞물려 굴러가려면, 양쪽의 문법을 아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나는 그들의 가능성을 실제 사업으로 바꾸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졌다. “저 사람, 진짜로 판을 만들 수 있겠네.”
인정받는다는 감각은 달콤했다. 내 이름이 찍힌 명함이 갑자기 단단해 보였고, 내가 말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나는 한류 펀드를 운영하는 회사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매번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을까’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라고 착각하기 시작하는 자리. 그때는 몰랐다. 성공이란 게 사람을 들어 올리는 동시에, 사람 안의 어떤 것을 조용히 부풀게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점점 영업과 접대를 핑계로 일본의 화류계 생활에 빠져들었다. 처음엔 ‘일’이었다. “이 업계는 어쩔 수 없어.” “계약은 술자리에서 결정돼.” 그렇게 말하며 나 자신을 설득했다. 낮에는 미팅과 자료 준비로 머리를 쥐어짜고, 밤이 되면 넥타이를 풀 새도 없이 또 다른 현장으로 이동했다. 택시 문이 닫히는 소리, 네온사인의 번쩍임, 좁은 골목에 새어나오는 웃음과 담배 냄새. 그 모든 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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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특성상 한국에서 연예인과 관계자들이 오면 밤의 유흥은 거의 의례처럼 이어졌다. 누군가는 “오늘은 가볍게만”을 말했고, 누군가는 “오늘만”을 말했다. 그러나 ‘오늘만’이 쌓이면 그것은 곧 습관이 되고, 습관은 마침내 삶이 된다. 술잔이 돌고 음악이 커지고 얼굴이 붉어지면 사람들은 쉬워졌다. 낮에는 조심스러웠던 말이 밤에는 과감해졌고, ‘원래’ 어렵던 일이 ‘그냥’ 풀리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그 순간들을 반복해서 학습했다. “이 바닥은 일단 형, 동생이 되어야 확실히 밀어준다”는 관습이, 어느새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처음엔 내가 술자리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분위기를 읽고 사람을 달래고 타이밍을 잡는 능력은 내 일이었고 내 재능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술자리가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술이 없으면 미팅이 불안했고, 유흥이 없으면 하루가 허전했다. 방으로 돌아와도 조용함이 견디기 어려웠다. 고요해지면 들려오는 것은 늘 내 안의 소리였다. 더 해야 한다는 압박,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초조, 혹시 무너지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 밤의 소음은 그 소리를 잠시 덮어주는 담요 같았다.

화려함은 늘 죄책감과 한 몸이었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웃고 있었지만, 문득 그 웃음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잔을 채우며 “잘 부탁한다”를 반복할수록, 내 마음 한쪽은 서서히 말라갔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못했다. 멈추면 내가 만들어온 성이 무너질 것 같았다. 멈추면 내 자리도, 내 판도, 내 존재도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더 ‘일’을 만들었다. 더 많은 약속, 더 많은 접대, 더 많은 밤. 결국 “일 때문에”라는 말은 내가 나를 속이는 가장 편한 문장이 되었다.

몸은 신호를 보냈다. 속이 타들어가는데도 술을 붓고, 잠이 부족한데도 다음 일정을 잡았다. 담배 연기 속에서 숨이 얕아지고,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이 익숙해졌다. 한밤중엔 취기가 빠지며 불안이 몰려왔고, 나는 다시 술로 그 불안을 눌러 다음 날을 버텼다. 사람들은 나를 ‘강한 사람’으로 보았지만, 사실 나는 강해서 버틴 게 아니었다. 멈추면 무너질까 봐, 계속 달린 사람이었다.

환락의 세계는 겉으로는 찬란하지만 안쪽은 이상할 만큼 비어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흐려지고, 웃음은 반복되고,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됐다. 그때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마비라는 것을. 마비는 단기적으로는 천국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가를 치르게 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내 삶의 바닥을 깎아내렸다.

좋아 보이던 시절은 생각보다 짧았다. 시기와 이해관계가 얽히며, 한국 기업들의 적대적 M&A가 거세게 밀려왔다. 계약이 흔들리고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전날까지 웃던 이들이 다음 날엔 냉정한 얼굴로 서류를 내밀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이어졌다. 나는 더 크게, 더 빠르게, 더 단단하게 버티려고 했다. 더 많은 미팅, 더 큰 판, 더 강한 척. 그러나 그 ‘더’가 나를 구하지 못했다.

결국 계열사였던 큰 회사를 넘겨야 했고, 기대를 걸었던 큰 공연 프로젝트마저 실패했다. 회사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때 내가 느낀 감각은 “아, 끝났구나” 같은 깔끔한 문장이 아니었다. 심장 한가운데가 툭 꺼지며 숨이 얕아지고,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느낌이었다. 전화가 줄어들고, 내 하루는 회의로 꽉 차 있던 시간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공백으로 바뀌었다. 나는 회사를 정리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작은 사업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더 조심하면 돼.” “이번엔 제대로 할 수 있어.” 그렇게 매일 자신에게 말했지만, 세상은 내가 다짐한 만큼 움직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산업 자체가 바뀌고 있었다. 음반 유통의 중심이 CD에서 MP3 기반의 디지털 음악 시장으로 넘어가고, 대형 음원 유통 서비스들이 앞다퉈 투자를 받으며 판을 키우던 시기였다. 나는 그 변화가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회처럼 보였다. 일본에서의 경험과 한국에서 쌓아둔 인맥, 그리고 그동안의 사업으로 형성된 네트워크가 있었다. 덕분에 나는 비교적 쉽게 음원 제작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번엔 다시 올라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오래 웅크리고 있던 내 자존심을 슬쩍 들어 올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빠르게’ 일구고 싶었다. 늦었다는 조급함이 내 안에서 계속 나를 떠밀었다. 결국 나는 음원 제작을 위해 받은 투자 비용을—한 방에 만회하고 싶다는 욕심으로—콘서트 제작에까지 끌어다 썼다. ‘공연만 성공하면 다 해결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관객의 열기는 예상보다 차가웠고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매일 숫자를 확인할수록 손끝이 차가워졌고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지금 돌아보면 명백히 성급한 투자였고, 욕심이 만든 무리였다.

더 괴로웠던 건 관계의 균열이었다. 음원 제작을 부탁했던,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이자 선배들에게서도 점점 거리가 느껴졌다. 내가 급해질수록 말은 날카로워졌고 약속은 흔들렸다. 신뢰는 늘 소리 없이 금이 간다. 누군가는 더 이상 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누군가는 “이제는 어렵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사업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해결하려고 발버둥 칠수록 매듭은 더 엉켰고, 일이 꼬일수록 나는 더 조급해졌다. 조급함은 판단을 흐리고, 흐린 판단은 더 큰 꼬임을 만든다.

결국 나는 궁지로 몰렸고, 끝내 형사재판까지 받게 되었다. 죄목으로 불리는 단어가 내 이름 옆에 붙는 순간, 내가 지켜온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법정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다시 일어나겠다’고 이를 악물던 마음이, 그날만큼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다.

나는 원래 남들을 즐겁게 하고,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수단이 음악이었고, 엔터테인먼트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사회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내가 쌓아온 모든 경력과 열정이 한 문장으로 뒤집히는 듯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재판은 집행유예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사건이 끝나도 마음은 끝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고, 고개를 숙이면 내가 나를 심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내 마음 한복판에는 오래전부터 아주 단순한 꿈이 있었다.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먼저 반응하던 아이였다. 어떤 곡이 흐르면 이유도 모르고 흥분했고, 어떤 멜로디가 나오면 그날의 공기까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음악은 내게 취미가 아니라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이 음악을 만나면 “아, 이게 내 마음이었구나” 하고 정리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막연히 믿었다. 음악은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세상을 바꾼다고.

고등학교 때 나는 더 확실해졌다. 세상이 갑자기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음악은 나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줬다.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 세상이 덜 거칠게 느껴졌고, 어떤 날은 음악 한 곡이 나를 살렸다. 그 시절 내가 자주 찾아보던 영상이 있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진흙탕 속에서도 사람들이 웃고 춤추고 서로를 끌어안으며 사랑과 평화를 말하던 장면들.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웃을 수도 있는 장면인데, 내겐 오히려 너무 진짜처럼 보였다. 경쟁보다 공존, 소유보다 나눔, 증명보다 자유. 그 영상은 내 안에 아주 오래 남는 문장을 남겼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 그건 거창한 사명이 아니라,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 자체였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그 마음이 생활이 됐다. 나는 신촌을 떠돌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우드스탁’이라는 락카페에 거의 살다시피 했다. 신촌의 밤공기와 계단을 내려가며 들리던 드럼 소리, 문을 열면 확 밀려오던 담배 냄새와 앰프의 열기.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잔, 벽에 붙은 밴드 포스터들,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기타 리프. 그 공간은 나에게 학교보다 더 학교 같았다. 사람들은 음악 얘기를 하다가도 인생 얘기로 넘어갔고, 낯선 사람들과도 좋아하는 밴드 이름 하나로 친구가 되었다. 거기서 나는 꿈꿨다. 나도 저 세계에서 살고 싶다. 음악이 사람을 움직이는 순간을 만드는 쪽에서.


그래서 더 괴로웠다. 법정에 서고, “사회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낙인이 내 이름 근처를 맴돌 때, 단지 사업이 망해서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우드스탁 영상에서 품었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다짐—그것까지 함께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빠졌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뒷머리에 커다란 원형이 생겨 있었다. 빈자리의 하얀 두피가 마치 내 속이 드러난 것처럼 선명했다. 결국 나는 삭발을 했다. 머리카락이 떨어진 게 아니라, 내 ‘체면’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통증도 따라왔다. 고관절과 등이 굳어갔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강직성척추염 진단을 내리며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했다. 척추가 굳어서 움직임이 불편했을 거라고, 그동안 많이 아팠을 텐데 어떻게 참고 살았냐고 했다. 나는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살아남는다는 명분으로 매일 술과 담배에 절어 살았고, ‘아픔’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믿었다. 사실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니라, 여유를 만드는 법을 몰랐다. 가족 없이 일본에서 혼자 버티며, 나는 더 방황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누나가 사는 제주도로 내려갔다. 도피이자 요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상적인 삶을 살기 시작하니 통증이 더 선명해졌다. 몸이 너무 굳어 누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마다 뒤척이다가 나는 새벽 공기에 밀려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한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두세 시간만 자고, 어둠 속을 걷는 습관이 생겼다.


처음엔 산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가슴이 답답해 호흡이 거칠었고, 머릿속엔 끝없는 죄책감이 소용돌이쳤다. “왜 그렇게 살았냐.” “왜 그렇게 욕심냈냐.” “왜 그렇게 무너뜨렸냐.”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이 가팔라질수록 생각이 줄어들었다. 숨이 차오르는 순간엔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오직 호흡에만 매달렸고, 가슴의 통증과 허리의 통증에 모든 신경이 쏠렸다. 역설적으로 그 힘든 상황이 내 정신적 고통을 잠시 풀어주었다. 마음의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생각의 감옥’에서 잠깐 빠져나오는 문이 열렸다.

새벽 3~4시쯤, 어리목에서 올라 높은 곳에 닿으면 밤하늘이 펼쳐졌다. 도시에서 보지 못한 별들이 있었다. 별빛은 화려하게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여기 너 말고도 세상은 크다”라고 말하는 듯 조용히 떠 있었다. 나는 백록담을 바라보며, 제주에서 전해 내려오는 거대한 어머니 신 설문대할망을 떠올리며 108배를 하기 시작했다. 절을 할 때마다 등이 아리고 숨이 끊어질 듯했지만, 그 고통이 오히려 나를 진실하게 만들었다. 참회하는 동안 눈물이 계속 흘렀다. 울고 싶어서가 아니라, 질문이 너무 많았고 답이 없었고, 그 답 없는 마음이 눈물로 흘러나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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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쫓던 것은 ‘성공’이라는 이름을 쓴 욕망이었다. 더 정확히는, 거짓의 명분을 가장한 욕망이었다. 그 욕망에 빠져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혼자 허우적대며 살았다. 나는 ‘사업’과 ‘명예’와 ‘인정’에 내 존재를 묶어두고, 그 묶음이 풀리는 순간 내가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하는 것처럼, 나는 오랫동안 ‘나’를 역할과 성취에 동일시해왔다. 대표라는 이름, 업계의 인정, 돈의 규모, 사람들의 반응이 곧 내 정체성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그것들이 무너질 때 무너진 것은 사업이 아니라 ‘나 자신’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때 내 안에서 폭발하던 고통은 톨레가 말하는 ‘고통의 몸’ 같았다. 과거의 상처와 두려움이 덩어리처럼 쌓여 있다가, 어떤 사건을 만나면 한꺼번에 깨어나 나를 집어삼키는 것. 나는 그 덩어리를 없애려고 더 바쁘게 살았고, 더 강한 척했고, 더 많은 자극으로 덮으려 했다. 하지만 산에서는 덮을 것이 없었다. 숨이 차면 숨이 차는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그 순간을 통과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아주 조금씩 ‘지금’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관점으로 보면, 그 시기의 나는 바닥의 정서에 가까웠다. 수치심, 죄책감, 두려움이 나를 눌러 눈빛은 땅으로 향하고 어깨는 더 굽었다. “나는 잘못된 사람이다”라는 믿음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몸과 호흡과 하루 전체를 지배하는 에너지였다. 그런데 호킨스가 말하듯,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고 인정하고 흘려보낼 때 이동한다. 나는 한라산에서 매일 울었다. 매일 절했다. 매일 “내가 잘못했다”를 되뇌었다. 그것은 자기혐오라기보다, 처음으로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누가 손가락질을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그래, 내 잘못이었지”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감정을 붙잡지 않으려 했다. 잡는 순간 다시 추락할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려놓음’이 조금씩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

수개월을 그렇게 살았고, 어느새 1년이 흘렀다. 죄책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 목을 조르는 힘은 약해졌다. 마음에 작은 평온이 찾아오자, 희미하게나마 힘이 생겼다. 나는 이제 욕심으로 무언가를 증명하기보다, 차근차근 배우며 살아보고 싶어졌다. ‘다시 크게’가 아니라 ‘다시 제대로’. ‘다시 빨리’가 아니라 ‘다시 바르게’. 그 차이가 내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마음에 품어왔던 콘텐츠 IT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번엔 멋진 명분으로 나를 포장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의 인정이 아니라,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한 걸음을 선택하려 한다. 톨레가 말하는 현재에 머무는 연습처럼, 호킨스가 말하는 감정의 집착을 내려놓는 연습처럼, 나는 매일을 작게 정돈해간다. 과거의 실패는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전부도 아니다.


한라산 새벽의 별빛 아래에서 알았다. 삶은 나를 무너뜨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비워내기 위해 무너뜨린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비워진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다시 묻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답을 서두르지 않는다. 대신 오늘의 숨, 오늘의 통증, 오늘의 마음을 정직하게 느끼며, 다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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