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친날

by 장은진

언제부터일까?

내 주변에 궁금한 것이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아마도 내가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대학원에 진학하고부터 인 것 같다. 2005년 어느 날이었다. 고등학교에서 이과였고, 공대에 진학했고, 프로그래머로 일했던 나에게 지금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새로운 꿈이 생겼다.


"난 미술치료사가 될 거야."


사실 어느 날 갑자기는 아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책 읽기를 좋아했고, 들판의 작은 꽃과 가을 하늘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그저 과학이 좋아서 이과를 갔고, 취업이 잘 된다는 명목 하에 공대를 갔고, 돈을 잘 벌 수 있다 해서 프로그래머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직장생활 2년 차에 난 깨달았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안 괜찮다는 것을...... 나에게 어떤 행복감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진짜 행복해지기 위해 어렸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할 수 없었던, 그러나 꼭 해보고 싶었던 일 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미술학원 다니기

훌쩍 여행 떠나기

내 맘대로 살아보기

일하지 않기

.

.

.

급기야. 퇴사하기.


그랬다. 착한 딸로 살아야 했던 나는,

완벽하게, 그리고 치열하게만 살아오던 나의 삶이 나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내 삶에 처음으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렇다고 그 선택이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나에 대한 연민, 슬픔, 두려움, 죄책감, 분노... 등등 너무 많은 감정들이 나를 뒤덮어 한동안 많이도 울었다. 그렇게 길고 긴 터널을 터덜터덜 걷다 보니 나에게도 드디어 꿈이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나의 꿈 이야기에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기껏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생활까지 하다가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나중에 알았지만 나는 자극추구와 충동성이 높은 사람이다. 새로운 것, 재미있는 것을 보면 눈이 반짝이고, 궁금한 것은 꼭 해보고야 만다는 이야기다. 어렸을 때는 이런 나의 기질을 꾹 눌러놔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봉인해제된 나의 기질들은 날개 돋친 듯이 나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 주었다. 이전에는 누군가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해 망설였던 것들을 용기 내어 시작하고 나니 얼마나 신이 나던지, 불같은 열정으로 대학원에 진학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새로운 공부는 재미있었다. 진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니 피곤한 줄도 모르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인생은 역시 한 방향으로만 가지는 않았다. 치료사가 되는 과정에는 나를 탐색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양한 이론과 기법들은 배움과 동시에 나에게 적용되었고, 나는 집단 치료의 내담자가 되었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내담자가 되는 경험은 필수다. 준비된 내담자가 많은 집단은 늘 활기찼고 의욕적이었다. 어떤 때는 의욕이 넘쳐흐르기도 했다. 나는 살면서 이때 가장 많은 질문들과 마주한 것 같다. 그들이 비춰주는 거울 속에는 나도 인식하지 못했던 내가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어서였을까.. 나는 그 순간이 참 불편했다. 침범으로 느껴졌다. 소화가 되지 않았다.


소화되지 않은 감정들은 결국 꿈에서 또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감정들은 마치 내가 그것들을 꼭꼭 씹어서 목구멍에 욱여넣기라도 해야 끝이 날 것처럼 나에게 달려들었다. 결국 교수님의 도움으로 꿈일기를 쓰면서 천천히 나아지긴 했지만, 나를 바로 보는 경험은 나에게 있어 의미 있지만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제는 누군가 나에 대해 물으면 그저 담담하게 한번 생각해 본다. '아, 내가 그랬구나. 나에게 그런 모습이 있구나.' 하고 말이다.


하루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그렇게 까지 안 해도 돼. 가끔 유연하게 스케줄도 변경할 수 있는 거잖아.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겠지만 가끔 보면 답답할 정도로 너무 정석대로야."


그날은 학교마다 행사가 많았던 터라 치료 예약 날짜의 변동이 많았다. 그로 인해 두 명의 내담자가 4시간의 간격을 두고 예약되었다. 일한 시간만큼만 돈을 버는 프리랜서 치료사에게는 참 비효율적인 날인 것은 확실했다. 동료의 말인즉슨 뒤에 예정된 치료를 좀 당겨서 비는 시간 없이 일하고 빨리 퇴근하지 그랬냐는 것이다. 물론 합리적이고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늘 정해진 시간에 날 만나러 오는 그들의 일상을 깨지 않는 것도 치료의 한 부분이다. 이것은 치료사가 된 이후 내가 지키고 있는 원칙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그날 한 명의 내담자를 만났고, 4시간을 기다렸으나 오기로 했던 두 번째 내담자가 사정이 생겨서 오지 못했다.


공친날...... 그날은 그야말로 나에게는 공친날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원칙주의

꼭 지켜야 하는 것

어찌 보면 꼰대 같은...


치료사로서의 사명감이라고 말하며 지켜왔던 이것, 남들은 '뭘 그렇게 까지......'라고 말하는 이것!


이것의 처음을 떠올려보니 어린 시절 동네 구멍가게 앞이다. 언니와 함께 쥐포 한 장을 샀다. 한 장에 얼마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딱 한 장 살 수 있는 돈을 손에 꼭 쥐고 걷던 골목길은 기억이 선명하다. 주인아주머니께 쥐포 한 장을 받아 들고 골목 어귀쯤 들어섰을 때 언니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와! 두 장이다!"


우린 분명 한 장만큼의 돈을 내고 한 장을 받아왔는데, 어지간히 얇고 딱 붙어있던 얄궂은 쥐포 한 장이 딸려온 것이다. 이제부터가 사건의 시작이다. 언니는 아주머니가 실수로 주신 것이고, 우리만 모른 척하면 아주머니가 이 사실을 알 길이 만무하니 그냥 먹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린 꼰대였던 나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마음이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쥐포를 먹었다가는 며칠 밤낮을 고민에 빠졌을 거다.


결국 나의 성화에 못 이긴 언니는 가게로 돌아가 쥐포를 아주머니께 돌려드렸다. 아주머니는 이런 착한 아이들이 있냐며 칭찬하셨지만, 언니의 입은 퉁퉁 불어 비쭉거렸다.


"어휴. 잘난척쟁이......" 하며 언니가 나를 흘겨보던 눈빛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생각해 보니 그 이후에도 많은 일화들이 있었다. 언니가 나를 '고집불통 잘난척쟁이'라고 부를 만도 했다.


나는 참 고집스럽게도 '원칙주의자'이다. 충동적이고 자유분방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것도 내가 정한 원칙 안에서의 일이다. 내가 정한 원칙에 있어서는 나는 한없이 깐깐한 고집쟁이 꼰대인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간다 한들 두 장의 쥐포를 들고 고민했던 그날의 선택과 내담자가 오지 않아 공친날의 선택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것은, 내 모습을 비춰주는 호기심 많은 동료 치료사들과 나의 소중한 친구들 덕에 내가 나를 보는 것이 조금은 편안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가정을 꾸려나가는 일도

아이를 키우는 일도

내담자를 만나는 일도


세상 일이 어디 내 마음대로만 흘러가겠는가! 어디 원칙대로만 살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가끔씩 불쑥 찾아오는 고집불통 잘난척쟁이 꼰대인 나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 그 알아차림의 순간,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며 숨 고르기를 한다.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돼. 조금 유연해지는 것도 좋잖아?"


경험이 연륜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나이가 되면서 이런저런 나의 모습을 조금은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여유와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젊음의 열정만큼이나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