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는 문화적 DNA다
사람들 무언가를 보면 움찔하고, 소리를 듣고 덜컥 겁을 낸다.
그 감정이 너무 빠르게 찾아오기에, 본능이라 믿기 쉽다.
하지만 그 반응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이다.
누군가의 말, 이야기, 장면, 금기...
그 모든 반복이
공포를 내 안에 ‘심은’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공포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
자라면서 공포를 배웠고,
기억했고,
결국 믿게 되었다.
한밤의 복도, 흔들리는 커튼, 그리고 정적 속의 발소리. 그 순간 나는 숨을 멈췄고, 몸은 얼어붙었다. 커튼 뒤에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창문은 열려 있었고, 바람이 들어왔으며, 그 소리는 단지 환기구의 철판이 울리는 소리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귀신’이라 느꼈는가?
심리학자 리처드 라자루스(Richard Lazarus)는 이렇게 설명한다.
“감정은 자극의 성질보다, 그 자극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달려 있다.”
즉, 감정은 자극 → 반응이라는 기계적 연쇄가 아니라, 자극 → 해석 → 감정의 구조를 따른다는 것이다.
나는 바람과 소리를 느낀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위험’을 읽어냈고, 그 위험은 내가 들어온 수많은 이야기 속의 구조였다.
“밤에 커튼이 흔들리면 귀신이 지나간다”는 이야기,
“낯선 소리는 죽은 자의 속삭임이다”라는 설화,
그런 이야기의 축적이 내 감정 반응을 구성했다.
공포는 외부의 실재가 아니라, 내가 배운 해석의 결과였다.
인간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 불린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감정을 구성하는 존재’다.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은 '감정은 만들어진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감정은 뇌가 감각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성한 예측이며, 의미의 창조 행위이다.”
어두운 골목을 걸을 때,
“이 골목은 위험해 보여”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공포 영화에서는 꼭 이런 곳에서 귀신이 나왔지”
이런 생각이 순식간에 떠오르고, 곧장 심장이 뛴다. 하지만 이 감정은 ‘골목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골목이라는 장면이 호출한 기억과 해석, 이야기의 구조 때문이다.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등장하기 직전 울리는 현악기의 긴장감, TV 예능에서 음침한 상황을 묘사할 때 깔리는 배경음악, 혹은 친구의 “거기 귀신 나올 것 같지 않아?”라는 짧은 한마디. 이 모든 것이 우리 뇌 속의 예측 회로를 자극한다.
그리고 뇌는 곧바로 ‘위험’이라는 해석을 예측하고, 그 예측에 맞춰 자율신경계를 활성화시킨다. 편도체는 경고를 보내고, 심장은 속도를 높이며, 근육은 경직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실제 ‘위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위험이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정은 반응이 아니다.
감정은 뇌가 상황을 이해하고자 미리 만들어놓은 해석의 시뮬레이션이다. 인간이 ‘느끼기 전’에 이미 뇌는 감정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는다. 인간은 그 이야기를 따라 몸으로 반응할 뿐이다.
결국 감정이란, 우리들이 배워온 이야기, 익숙한 이미지, 반복된 구조들이 만든 예측의 산물이다.
그리고 공포는,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뿌리 깊은 이야기 중 하나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뱀은 원래 무서운 거야. 본능이야.”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인지발달심리학자들은 이 통념을 검증하기 위해 생후 6~8개월 된 유아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유아들에게 뱀의 영상과 토끼의 영상을 번갈아 보여주고, 시선의 방향과 머무는 시간을 추적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유아들은 뱀을 보고 공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토끼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시선을 비슷한 시간 동안 유지했고, 얼굴 표정도 특별히 긴장되거나 놀라는 반응 없이 중립적이었다.
또한 , ABC Science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Secret Science'에서 최근(2024.11. 23 upload) 진행된 실험(https://youtu.be/3L4lxusff1c)에서 유아들의 뱀에 대한 반응을 조사했다. 이 실험에서 유아들은 장난감과 함께 비독성 뱀과 상호작용하였으며, 공포가 아닌 호기심을 보였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은 뱀을 무서워하는 감정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반복적으로 ‘뱀은 위험하다’는 의미를 주입받으며 구성된 해석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는, 문화권마다 뱀에 대한 문화적 감정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인도 힌두교 문화에서 뱀은 신의 수호자이며, 재생과 지혜의 상징이다.
나가(Nāga) 신은 신성한 존재로 추앙받고, 사원 입구를 지키는 수호의 의미로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뱀이 의술의 상징이다.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의 지팡이에는 뱀이 감겨 있다. 지금도 세계보건기구(WHO)와 여러 의료기관의 로고에 사용된다.
한국의 전통문화에서는 뱀은 독, 사악함, 불운과 관련된다.
“꿈에 뱀이 나오면 불길하다”는 속설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해몽에 영향을 미친다.
중세 유럽 기독교 문화에서 뱀은 악의 화신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존재는 뱀으로 형상화되었고, 이는 인간을 타락시킨 사탄의 대리자로 인식되었다.
같은 생물인데도, 왜 어떤 문화는 뱀을 신성시하고, 어떤 문화는 그것을 저주스러운 존재로 여길까?
그 이유는, 공포가 뱀이라는 자극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자극에 특정한 의미를 덧씌운 ‘문화적 해석’ 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뱀’ 그 자체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뱀은 무서운 것’이라는 이야기를 배우고, 그 이야기 속에서 감정을 구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공포는 생물학적 본능이라기보다는, 문화가 우리에게 덧씌운 의미 구조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뱀은 그 구조의 대표적 상징일 뿐이다.
슬픔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분노를 어떻게 참는가,
두려움을 어떻게 말하는가는 모두 문화적이다.
감정은 본능처럼 보이지만, 그 감정이 어떻게 구성되고, 언제 어떻게 표현되는지는 전적으로 문화의 틀 안에서 결정된다.
미국인은 개인주의적 문화 속에서 자란다. 개인의 독립성과 감정 조절 능력이 ‘성숙’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의 울음은 유약함으로 간주되며, 슬픔을 내면화하고 혼자 감당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한국인은 ‘정(情)’이라는 관계 중심의 정서 구조 안에 있다. 슬픔은 나누는 것이다. 함께 우는 것이 서로를 위로하는 방식이며, 눈물은 연대와 공감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통곡은 부끄러운 감정 표현이 아니라, 사랑과 슬픔을 드러내는 당연한 예식이다.
일본인은 ‘메이와쿠(迷惑)’: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정서'를 중심에 둔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상대에게 불편을 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기쁨이든 분노든 감정은 조용히 억제된다. 표정은 조절되고, 말투는 완곡해진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감정조차 신에 대한 믿음의 표현과 연결된다. 특히 공포는 신의 뜻을 신뢰하지 못하는 약한 마음의 표현으로 간주되어, 드러내는 것 자체가 신앙적 결핍으로 여겨진다. 감정보다 신념이 우선하며, 감정 표현은 종교적 규율 안에서 제약된다.
이처럼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문화 안에서 이루어진다.
심리학자 리처드 슈웨더(Richard Shweder)는 이를 “감정은 문화적 틀 위에 배치된 심리적 출력이다.”
라고 설명했다. 즉, 감정은 우리 뇌 안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라, 문화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 구성된 감정 경험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무서워할 때,
어떤 부모는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며 감정을 무력화한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 자체를 부정하거나, 참는 법을 가르친다.
반면 어떤 부모는 “거기 귀신 있어, 가까이 가지 마!”라고 말하며, 그 감정을 구체화하고, 위협의 대상으로 명명한다. 이것은 감정을 단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해석 방식과 표현 방식을 학습시키는 과정이다.
공포 영화, 귀신 이야기, 어릴 적 들은 전래동화들. 이들은 단순한 오락이나 상상놀이가 아니다. 그 속에는 무서움을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공포를 동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화적 스크립트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감정은 그런 이야기 속에서 길러진다. 사람들은 무서움을 ‘느끼는 법’을 배운다. 그 느낌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가 제공한 감정 코드에 따라 구성된 반응이다. 그리고 그 코드, 그 법은 곧 각자가 속한 문화가 가르쳐준 ‘느끼는 방식’이다.
처음 무덤을 지날 때, 나는 단지 긴장했을 뿐이었다. 기분이 조금 불편했고, 발걸음이 약간 느려졌다. 두 번째는 살짝 속도를 높였다. 세 번째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괜히 뛰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무덤 앞을 지날 때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공포는 그렇게 ‘자동 반응’으로 굳어진다. 행동심리학자 B.F. 스키너(B.F. Skinner)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극과 반응의 반복이 행동을 강화시키고, 그 강화된 행동은 점점 더 자동화된 패턴으로 자리 잡는다.
‘공포’ 역시 다르지 않다. 무덤과 같은 특정 자극을 마주했을 때, 내가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선택한 행동, '달리기, 회피, 귀 막기, 시선 돌리기 등'은 일시적인 안도감을 준다. 그리고 그 안도감이 반복될수록, 뇌는 이 행동이 옳다, 이 상황은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강화한다. 이렇게 감정은 회피 행동과 결합하며 신경회로를 강화시킨다.
게다가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Pavlov)가 실험으로 증명했듯, 본래는 아무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던 중립적 자극조차 공포와 반복적으로 짝지어지면, 그 자체가 '공포의 방아쇠(trigger)'가 된다.
'어두운 길, 풀냄새, 까마귀 소리, 젖은 흙냄새'. 이 모든 것은 본래 그냥 ‘존재하는 요소’ 일뿐이었다. 하지만 무덤 근처에서 반복적으로 공포를 느낀 경험과 결합되며, 이제는 그 요소들만으로도 몸이 반응하게 된다. 심장이 빨라지고, 손에 땀이 차고, 발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진다.
무덤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무덤을 피했던 나의 몸, 그 회피의 습관이 무덤을 무섭게 만든 것이다. 인간의 뇌는 빠르게 학습한다. 그리고 몸은 더 빠르게 기억한다.
이성은 말한다. “괜찮아, 무덤은 그냥 흙일 뿐이야. 아무 일도 없었잖아.” 하지만 몸은 이미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다. 심장은 이미 그곳을 ‘탈출 지점’으로 인식하고, 다리는 방향을 바꾸려 긴장하고 있다.
이때, 공포는 더 이상 감정이 아니다.
공포는 학습된 회로이고,
몸의 기억이며,
감정의 반사 신경이다.
이성은 ‘말’로 반응하고,
공포는 ‘몸’으로 반사된다.
나는 귀신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 “귀신”이라는 단어 하나만 꺼내도,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움찔했다. 소름이 돋았고, 뒷목이 서늘해졌다. 왜일까?
그건 내가 귀신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단순히 기억한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의 감정을, 마치 내 감정인 양 살아왔다.
감정은 기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 뇌의 해마(hippocampus)는 기억을 저장하고, 편도체(amygdala)는 감정 반응을 조절한다. 이 두 기관은 서로 밀접하게 협력하여, 감정이 실린 기억, 특히 공포, 슬픔, 기쁨 같은 강렬한 정서를 동반한 경험은 더 선명하고 강하게 뇌에 각인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다.
“꼭 내가 경험한 것이어야만, 진짜 감정을 형성할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 뇌는 타인의 경험이 담긴 이야기조차, 그 안에 감정이 충분히 실려 있다면 마치 내 경험처럼 저장한다.'
어릴 적 나는 수없이 들었다.
“밤에 휘파람 불면 귀신이 따라온다.”
“무덤 근처엔 처녀귀신이 사니까 밤엔 가지 마라.”
“저 건물은 옛날에 사람이 죽어서 지금도 귀신이 돌아다닌대.”
“자정 넘어서 거울 보면, 거기서 이상한 게 보여.”
나는 그 어떤 상황도 직접 겪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들릴 때마다, 나는 상상했다. 그 장면을 그렸고, 그 감정을 미리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된 이야기 속에서, 나는 직접 체험한 적 없는 무언가를 마치 체험한 듯이 기억하게 되었다.
해마는 ‘기억된 이야기’를 저장했고, 편도체는 그 이야기 속의 ‘공포’를 반응시켰다. 결과적으로, 그 장소, 그 시간, 그 단어는 공포라는 감정의 회로와 연결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공포는 내 기억이 아니다. 공포는 타인의 말에서 배운 감정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감정은 경험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감정은 경험처럼 반복된 이야기에서도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감정이 담긴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그 이야기를 상상하고, 재생하고, 내 안에서 떠올릴 때, 그 감정은 점점 ‘내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이 된다. 결국, 나는 귀신을 본 적이 없지만, 귀신에 대한 공포는 분명히 내 안에 존재한다. 그것은 내가 체험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 속에서 ‘배운 감정’이다.
나는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귀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나를 정의했고, 그 말은 오랜 시간 동안 나의 감정, 나의 행동, 나의 반응을 설명해 주는 구절처럼 작동했다.
하지만 이 말은 정말 ‘나의 정체성’일까? 아니면 내가 배운 정체성일까?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인간의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구성되고 반복되는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내러티브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이라 부른다.
즉, 인간은 ‘단단한 자아’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야기로 자신을 설명하고, 그 설명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어떤 이름이나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반복해서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가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포는 어떤가?
공포 역시 하나의 내러티브다.
“귀신이 나온다”는 문화의 이야기,
“밤에는 돌아다니면 안 돼”라는 가족의 조언,
“혼자 있는 건 위험해”라는 사회의 경고,
“그 건물은 오래된 데다가 사람이 죽었대”라는 친구의 속삭임…
이 모든 문장들이 모여, 나의 감정 회로를 설계했다.
나는 귀신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귀신이 무섭다’고 느끼는 방식을 내 감정으로 받아들였고, 그 감정을 반복하면서, 그 감정이 나의 일부가 되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결국 공포는 실재가 아니라, 정체성이다.
인간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이 구조화한 역할과 정체성을 살아간다. 나는 그 감정을 내 것으로 믿으며 살아가지만, 그 감정은 실은, 누군가가 오래전부터 써놓은 이야기의 한 장면, 한 구절, 한 문장을 따라 읽는 것이었을 수 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공포는 정말 내가 만들어낸 감정인가?”
“아니면, 그것은 누군가 오래전부터 내게 반복해 온 이야기의 잔향인가?”
“나는 지금도 그 감정의 문장을 그대로 따라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공포를 해체한다는 것은 단순히 용기를 낸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기원을 되묻는 일이다.
그 감정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그 이야기가 누구에 의해 쓰였는지,
그 이야기가 여전히 나에게 유효한지 성찰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의문이 일어난다.
“나는 이 감정을 다시 써도 되는가?”
“나는 이 감정의 저자가 될 수 있는가?”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시 쓸 수 있는 이야기다.
공포 역시 그러하다.
공포는 그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언급되고, 기억되고, 반복되며
나를 구성한 문장들이다.
그 문장을 다시 쓴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공포를 해체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다.
다음은 공포의 본질 2편 2장 '문화가 만든 프레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