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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스 Jul 01. 2022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애착을 중시하는 엄마가 어린이 집 입소를 결정한 이유

  15개월 아이가 어린이 집에 등원하기 시작한 지 2주가 지났다. 며칠 전부터는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손을 흔들더니, 이제 점심까지 먹고 와줘서 하루 3시간 남짓 나만의 시간이 생겼다.


  큰 꿈을 품고 육아를 시작했었다. 지난 십여 년 간 심리학을 공부하며 들은 풍월이 있다 보니 아는 것이 병이라고, 다른 곳에 맡기기가 두려워서 최소 두 돌까지는 내가 끼고 있겠노라 다짐했었다. 특히 아이와 안정된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싶었다. 고된 업무로부터 벗어나 사랑하는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이유만으로도 감사에 겨워, 적어도 일 년은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뱃속에 둘째가 들어서자 체력이 급격히 저하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코로나까지 앓고 나니 몸이 더 힘들어졌다. 그 무렵 남편 회사에서는 하루아침에 재택근무를 모두 없앴고(재택근무 때는 출퇴근 시간과 점심 시간을 아껴 잠시 아이를 안아주고 기저귀라도 갈아주는 것이 가능했었다), 미뤄 왔던 회식과 출장을 휘몰아치듯 잡았다. (차라리 팬데믹 때가 편했다며 코로나를 그리워하게 될 줄야...ㅎㅎ) 이제 막 걸음마가 익숙해지고 신체 활동에 자신감을 얻기 시작한 첫째는 집안뿐 아니라 동네 곳곳을 누비며 엄마에게 하루 평균 만보 이상의 걸음을 선사했다. 불과 두어 달 만에 육아의 난이도가 최고 단계로 올라간 것이다.  


  몸이 너무 힘들면 마음은 별 수 없다. 에너지가 많은 첫째는 자신의 요구가 재깍 충족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곤 했다. (참고로 우리 애는 뱃심도 세고 목청도 타고나서 데시벨이 높다.) 그저 본인의 불편을 알리는 것일 뿐 아이는 잘못이 없는데,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온종일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죽을 맛이었다. 오죽하면 귀마개를 써보기도 했으랴.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인 위니컷이 "Good enough mother"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이만하면 괜찮은 엄마" 정도의 의미로  이해해야지, 결코 완벽하거나 충분히 좋은 엄마가 되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완벽은 아니더라도 아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파악하고 적절한 공감과 반응을 제공하는 것 정도는 해주어야 하는데… 임신으로 몸이 힘들었던 나는 그저 잠시라도 쉬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아이에게 제대로 반응해줄 여력이 없었다. (역시 친절은 체력에서 나오는 것이로구나.) 어쩌다 아이에게 화라도 낸 날이면 나를 옥죄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자는 아이 옆에서 한참을 울었다. 어느덧 어플을 열어 멀찌감치 미뤄 두었던 어린이집 입소 희망 일자를 조금씩 앞당기는 날 발견했다. 내가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하루하루를 울며 겨자 먹기로 버티던 중, 가정 어린이 집에 입소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최소 두 돌까지 (욕심 같아선 세 돌까지) 가정에서 보육하겠다는 포부가 무너진 데에는, “이런 엄마보다 차라리 어린이 집 선생님이 더 잘해주시겠다”라는 생각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입덧으로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 가며 애를 키우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때마침 밥은 또 왜이리 안 먹고 여기저기 뱉어내는 건지…) 그런 엄마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못난 사람”으로 여기기라도 하듯, 때로 아이는 풀이 죽어 내 눈치를 살폈다. 나랑 더 있다가는 괜찮았던 애착마저도 망가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도저히 혼자서는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계를 인정하자 비로소 도움의 손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좋은 선생님과 좋은 기관을 만났다. 하루 중 몇 시간의 여유가 생긴 것뿐인데 숨통이 다 트였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요즘 같이 이웃사촌 없는 시대에 어린이집은 그야말로 “마을”이 되어 준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의 양은 줄었지만, 관계의 질은 좋아졌다. 내 감정을 추스를 힘을 얻자 아이의 짜증과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에도 보다 느긋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관대하고 능숙한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며 나는 육아에 대한 자신감을 점점 되찾아 갔다.


  아이에게는 “이만하면 괜찮은 엄마”이면 충분하다. 문제는 하루 온종일 아이랑 엄마 둘을 붙여놓고서 그 “이만한” 정도의 “괜찮음”을 확보하라는 건 거의 불가능한 미션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이가 유별나서, 엄마가 부족해서도 아니라 우리가 사람이라 그렇다. 오죽하면 사람들끼리 가둬놓고 벌주는 곳을 감옥이라 칭하겠나? 그러니 홀로 아이를 키우는 주양육자들은 너무 자책하지 마시라. 그리고 가능한 모든 도움을 십분 활용하여 아이를 키울 “마을”을 구하시길 바란다. 그것이 양가 부모님이든 베이비 시터이든 기관이든 공동 육아이든 간에, 각 가정의 여건에 맞고 되도록이면 탄탄한 지지체계를 구축하여 부디 육아라는 엄청난 과업이 단 한 사람에게 떠넘겨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좀 더 욕심을 부리자면, 개인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 도움을 청하기 전에 온 마을이 먼저 나서서 돕는 사회가 되기를 꿈꿔 본다.



p. s. 세상의 모든 양육자들을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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