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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녀 공포증은 좀 극복하셨나요?

캐나다에서 엄마직에 종사합니다.

by 누스

어느덧 캐나다 살이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문득 캐나다로 오기 직전에 작성한 글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난 우리 애들이 무섭다며 벌벌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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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보느라 컴퓨터 켤 시간도 없이 바쁘거나, 곯아떨어지거나, 담가질 거란 우려와는 달리 나는 살아남았다.


여기로 오기 전만 해도 내 자식과 함께 할 시간이 두려웠는데, 인천공항에서 출국심사를 하는 순간부터 공포증은 극복되었다. 공포를 느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애들 잃어버릴까 봐, 비행기에서 민폐 끼칠까 봐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토론토에 도착해서는 짐 정리하고 시차 적응하느라, 그러고는 종일 애들 보느라 역시 두려울 여유가 없었다. 자가 노출 치료가 효과적이었던 건지 아니면 회피할 구석이 없어서 마지못한 생존 전략으로 적응을 택한 건지. 여하튼 공포증은 사라진 걸로.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모든 나날이 다 좋았던 건 아니다. 많이 순화해서 적어보자면… 가끔(이라고 해주자. 24시간 내내 지른 건 아니니까) 난 아이들에게 샤우팅을 하였으며, 울었으며, 부부싸움도 했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내가 외향형 인간이라도 사람과 너무 오래 붙어있는 것은 모두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또 이렇게 길게 가정보육을 해야 할 기회가 생긴다면 흔쾌히 YES를 외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남지 않은 이 생활이 조금은 아쉽게도 느껴지는 걸 보면, 좋은 점도 있었나 보다. 그래. 힘들어서 그렇지 좋은 점도 확실히 있긴 있었다.


먼저, 기댈 데가 없다 보니 가족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한국에선 어린이 집과 친정에 번갈아 기대 왔다. 육아를 했다기보다는 육아를 겨우 연명해 왔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물론 그때는 아이들이 더 어렸고 연이은 임신과 출산으로 나의 심신도 온전치 못했기에 외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외부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되려 놓치게 되는 것들이 생겨났다. 이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처음엔 모든 걸 우리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꼭 봐야 하는 시험이지만 엄두가 나질 않아 미루는 느낌이었다. 용기 내어 펼쳐 본 시험지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어떤 문제는 수월하게 풀렸지만 어떤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모든 일이 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우리끼리 지지고 볶으면서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뿌듯하고 홀가분했다.


피할 데가 없다 보니 우리 모두의 인성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파악할 기회가 생겼다. 그야말로 몇 개월 짜리 인성 부트 캠프에 온 셈이다. 한국에서는 아이들의 문제 행동이 포착되어도 못 본 체 은근히 뭉개고 지나갈 때가 있었다. 그도 가능했던 것이, 아침에 일어나서 조금 버티면 어린이집에 가고, 하원 후에도 몇 시간 버티다 보면 남편이 왔고, 그 뒤로도 조금만 버티면 밤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쁜 일정에 맞춰 시간의 흐름도 분절되어 있었기에, 마디마디마다 요령껏 분위기를 전환해 가며 직면해야 할 것들을 은근슬쩍 다음으로 떠넘길 수 있었다. 그땐 그렇게 해야 삶이 유지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애들이랑 붙어있다 보니 더 이상 분절된 시간을 핑계삼을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과의 하루가 마치 장편 소설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처음엔 이렇게 긴 호흡을 유지하는 게 버거웠지만, 적응이 되고 나니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둘러싼 커다란 맥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가 어제 잠을 설쳤으니 아침에 당연히 피곤했겠지. 그래서 오전 내내 짜증인 거고.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한 행동은 컨디션과 상관없이 몇 주째 반복되고 있네. 피곤한 건 이해하지만, 이건 고쳐줘야 할 습관이야.” 그렇게 받아줘야 할 때와 단호해야 할 때, 이해해야 할 것과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좀 더 분명해졌다. 시간이 많으니 훈육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실제로 타깃으로 삼았던 아이들의 문제 행동 몇 가지가 줄어들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나도 애들도 많이 힘들었다.


인성 부트 캠프에 온 건 아이들뿐이 아니었다. 나 역시 마라톤 육아를 하다 보니 끊임없이 나 자신의 부족함과 직면하게 되었다. 여긴 선택지가 별로 없다. 부족함을 고치든가, 아님 계속 부족하든가. 부트 캠프에선 두루뭉술한 게 통하지 않았고, 그렇게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라고 믿어 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관찰자의 시선으로 낯선 이국의 문화와 우리 문화를 비교해 본 것도 좋았다. 고여있는 물은 썩기 마련인데, 그런 측면에서 한국에만 고여 있던 나에겐 꼭 필요한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고작 몇 개월 머물다 가는 방문객이 얼마나 대단한 변화를 경험했겠냐마는, 그래도 새로운 시각을 통해 한국에서 몇 년 동안 고민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지도 못한 대안을 찾기도 했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낯선 것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얻지 못했을 통찰이었다.


그 무엇보다 좋았던 건, 아이들과 함께 했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글을 쓰기 직전에 난 애들한테 화를 낸 게 후회돼서 혼자 눈물을 뚝뚝 흘리다 왔다. 오히려 여기 와서 내가 애들을 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다. 그런데 그렇게 혼나면서도 우리 딸은 고사리 손으로 만든 걸 가져와서는 “엄마 사랑해서 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우리 아들은 밖에만 나가면 앙증맞은 돌멩이들을 주워서 “엄마 선물”이라며 가져온다. 엄마를 사랑해 주는 아이들이 참 고맙다.


우리 가족의 모습은 결코 핑크빛이 아니다. 여기저기 눈물자국이 얼룩덜룩하고, 찢어져서 다시 꿰맨 자국도 많다. 그런데 또 함께 있다 보면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가고 웃을 일이 생긴다. 함께 있기에 나는 아이들의 엉뚱한 실수도, 어설픈 몸짓도, 놀랄 만한 성장도 모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안고 싶을 때마다 꼭 끌어안았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절대 남길 수 없는 그 폭신하고 따뜻한 감촉을 온몸에 저장해 두고 싶어서. 하루에 백 번도 넘게 귓가에 울리는 “엄마” 소리가 지금은 성가시지만, 이 또한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 그리워지겠지. 훗날 친구를 찾아 나서는 아이들의 뒷모습에 서운해지면, 달려와 안기던 보드라운 살결을 떠올리며 마음을 달래야겠다. 이건 내 복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린 또 바쁜 일상에 녹아들 것이다. 아무리 장편소설이 좋더라도 다시 수많은 할 일들로 우리의 시간은 분절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여기에서의 시간들이 일장춘몽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진 않을 거라 믿는다. 좋았던 날도, 아팠던 날도, 모두 가족이 함께 했던 추억으로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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