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D-4
나흘 뒤, 우리 가족은 캐나다로 떠난다. 남편의 교육 연수 일정에 맞춰서 약 4~5개월 간 토론토에 머물 예정이다. 여행이라기엔 길고 산다기엔 짧은 어정쩡한 기간이라 마땅한 이름을 찾기가 어렵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캐나다 넉 달 살이? 남편 연수 꼽사리? 좀 더 있어 보이게 엄마직 종사자의 해외 출장?
이름이 뭣이 중하리. 어차피 내 비자는 식모 비자라는 게 친구들의 정설이다. 물론 갸륵한 남편이 열심히 베이비 시터를 알아보고, 공동육아를 추진하고, 밀키트까지 신청할 예정이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 정도면 식모가 아니라 호화로운 사모님 살이로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후후 그건 정말 우리 애들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남편이 저 정도까지 하는 건 본인도 겪어본 바가 있어서다.
아이들을 너무도 사랑한다. 진심이다. 하지만 애들이 나 몰래 산삼을 먹는 건지 아니면 어미의 몸뚱이가 불량이어서인지 여하튼 난 이 녀석들과 함께 있으면 귀가 먹먹해지고 기가 쪽쪽 빨린다. 우리 애들은 자랑스럽게도 소아과 역사상 울음소리가 큰 3인 안에 들었다(간호사 선생님 공인). 누굴 닮았겠나? 날 닮았지.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목소리가 클 뿐 행동은 얌전한 편이었는데, 운동장에서 살다시피 하셨다던 우리 남편의 유전자가 더해지면서 엄청난 것이 와버렸다.
빠르게, 많이, 계속 움직이는 애들을 보며, 한때는 ADHD가 아닐까 면밀히 관찰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는 잘 앉아있다는 걸 보면 그냥 힘이 넘치는 애들인 것 같다. 문제는 체면 차리느라 좀이 쑤셨던 녀석들이 나만 보면 모든 한을 풀려고 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난 놀이터에서 맨날 뛰어다니는 엄마가 되었다. 눈도 신중하게 깜빡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길게 눈을 감았다 뜨면 한 놈이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행을 결정하기 전, 나는 심사숙고라는 명분 하에 온갖 부정적인 일들을 떠올리곤 했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봐봐. 둘째가 자다가 숨을 못 쉬면* 응급실에 가야 하는데, 거기서 아파버리면 어떡해? 비행기에서 그러면? 그 긴 비행시간은 무슨 수로 버텨? 오도 가도 못하는 공중에서 민폐 끼치면 어떡하지? 캐나다에선 또 어떻고. 어린이집도 안 가고 하루 종일 나랑 있을 텐데... 이게 내 체력으로 가능할까? 밥도 하루 세끼 다 지어 먹여야 해. 돌아왔을 때 어린이집 자리가 바로 안 생기면 와서도 계속 가정보육이야. 하루 종일 우리 셋이 뭐 하고 놀지? 수족관도 박물관도 하루 이틀이지 진짜 얘들이랑 뭐 하지?
(* 우리 집 둘째는 "크룹"이라는 급성 폐쇄성 후두염에 잘 걸린다. 크룹으로 인한 호흡 곤란은 갑작스럽게 발생하고, 특히 밤중에 자주 나타난다. 이럴 땐 응급실에 가야 한다.)
한동안 엄청난 인내심과 사랑으로 나의 염려를 들어주신 모든 당사자 분들께 심심한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주저리주저리 길게도 써 놓았지만, 내 본심은 딱 한 줄로 요약된다.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두렵다.
뭔가 잘못됐다. 어쩌다 나는 아이들을 무서워하게 된 걸까? 이게 정상적인 부모자녀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인가? 정상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떨쳐버리고 싶은 불쾌한 느낌이고,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아이들을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 함께 있다 보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지만, 적어도 그 시간을 두려워하고 싶진 않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에 가장 안 좋은 전략은, 바로 회피이다. 회피는 두려움을 강화하고 지속시킨다. 그래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두려워하는 그 자극에 직면해야 한다. 그 직면은 서서히 이루어지기도 하고, 단번에 강렬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인지행동치료에서는 전자를 "체계적 둔감법"이라고 하고, 후자를 "홍수법"이라고 한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극복하고자 오히려 그 공포 자극을 찾아 나서는 심리 상태를 "역공포적(counterphobic)"이라 부르기도 한다. 벌레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주 벌레의 삼족을 멸할 작정으로 어두운 배수구 안을 샅샅이 뒤진다든가, 발표 불안이 있는 사람이 발표가 있는 수업만 찾아다니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두려운 그 상황 속으로 뛰어듦으로써 기어이 두려움의 씨를 말리려는 것이다. 자, 여기서 퀴즈.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두렵다면서 오히려 아이들과 죙일 같이 있기로 결정하는 건 뭘까? 역공포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스스로에게 시전하는 홍수법쯤이 되겠다.
지난 글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이것은 겁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용맹해지는 스토리이기도 하다. 잔뜩 졸아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화끈해져 버린 탓에 나는 곧 캐나다에 가게 생겼다. 그게 넉 달 살이일지 꼽사리일지 출장일지 여행일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두려움 속에 나를 담가버릴 시간이란 것만은 분명하다. 한 동안 기척이 없다면 무지 바쁘거나, 곯아떨어졌거나, 담가졌거나 뭐 대충 그런 상태일 것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재미있게 노느라 글 쓸 시간조차 없는 훈훈한 이야기로 기억해 주시길.
https://brunch.co.kr/@mindwalk-yj/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