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겁쟁이가 어쩌다 무통도 없이 애를 둘이나 낳았을까
저는 아이 둘을 무통주사 없이 자연주의 출산으로 낳았고,
그중 둘째는 병원도 아닌 집 거실에서 낳았고,
조리원에도 안 갔고,
모유수유도 둘 합쳐 3년 이상 했어요.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대단히 용감하다든가 인내심이 많다든가 아니면 어떤 숭고한 대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그저 겁이 많은 데에서 시작되었다.
어쩌다 친정 엄마의 소개로 알게 된 자연주의 출산 병원이 그 당시 직장에서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었다. 입덧이 심하던 와중에,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와중에, 틈틈이 자격증 시험도 준비해야 했던 나에게는 시간과 에너지를 아껴줄 최고의 병원이었다. 거기다가 그 병원의 온화한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이런 곳에서라면 환자가 좀 버벅대더라도 의사한테 혼날 일은 없겠다 싶었다.
병원은 마음에 들어도 자연주의 출산 자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을 갖고 있던지라, 자연주의 출산에 대한 몇 권의 책과 유튜브를 섭렵했다. 그런데 장단점을 저울질하던 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무통주사가 안 듣는 사람도 있다더라"는 말이었다. 위험 기피적인 사람은 도박을 싫어한다. 조금이라도 승산이 없는 것에는 쉬이 손을 대지 않으며, 최악의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야 말 거란 상상도 자주 한다. 그런 사람에게 무통주사가 안 들을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이다. 확률은 중요치 않다. 백 분의 일이든 천 분의 일이든 그 일은 바로 나일 테니까. 잔뜩 겁을 먹은 나는 이토록 승산 없는 도박에 하나뿐인 몸뚱이를 걸 바에야 차라리 정직하게 예견된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심하여 선택한 그 길의 끝에는 핑크빛 미래가 있었을까? 아니다. 핑크빛은커녕 시커멓게 타다가 죽겠구나 싶을 만큼 더럽게 아팠던 첫째 출산 이후로, 나는 자연주의 출산에 대한 희미한 로망마저도 다 내려놓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를 자연주의 출산으로 낳은 이유는 역시 내가 겁이 많아서였다. 자식을 열 낳는 거라면 이 방법 저 방법 써본 뒤 최고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겠지만, 이제 둘째가 끝일 텐데 단 한 번의 기회를 새로운 도박에 쓸 수는 없었다. 왠지 나는 무통이 안 들을 사람 같았다니까요... 그 단 한 명이 바로 나일 것 같다고요...
거기다가 집에서 낳기로 한 이유는 더 황당하다. 첫째 때 진통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서 호흡법이고 뭐고 할 겨를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은 지옥 그 자체였다. 통통 튀는 차 안에서 진통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다. 도로 위의 요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래서 나는 그 고통을 한 번 더 겪느니 차라리 익숙하고도 편안한 내 집에서 낳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이런 날더러 대담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저 최고로 안전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조리원에 안 간 이유는 조금 다르다. 겁이 나서라기보다 별다른 매력을 못 느껴서였다. 몸이 아프다가도 집 밖으로 나가면 병이 낫는 외향인에게, 실내에만 갇혀 지내는 생활은 쉼이 아니라 벌이다. 더군다나 공교롭게도 코로나 시기에 아이를 낳았던 나는 조리원에서 격리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비용이라도 싸면 속는 셈 치고 가보겠는데, 아무래도 이 돈을 들여서 격리소에 가고 싶진 않았다. (물론 조리원에 대한 나의 의견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잘 풀리기만 하면 얻을 게 많은 도박도 안 하는 내가, 얻을 것도 없는 것에 지갑을 열었겠나? 부유하지 않은 쫄보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낳고 보니 감사하게도 모유수유에 재능(?)이 있었던 나란 사람은 또 그렇게 가장 만만해 보이는 길을 선택해서 정착했다. 젖을 먹이는 일보다 젖병을 닦는 일이 더 힘들다고 여겼던 사람으로서, 설거지 안 해도 되고 분윳값도 안 드는 이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젖을 떼는 일이 이토록 어려울 거라고는 차마 예상 못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젖을 못 끊은 지 어언 3년이 지나버리고 만 이야기가 되시겠다.
겁이 많은 사람들은 용감해야만 한다. 그래야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어쩌다 보니 용감해진 나는 앞으로 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그게 무엇이든 쫄보의 머리로 갖가지 경우의 수를 다 따져보고, 최악의 상황까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뒤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문제는 그 머리가 엄청 좋지는 못해서 예측이 자주 틀리고, 미처 계산하지 못한 일들이 마구 터져버리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전에는 철저한 계획형의 쫄보였다면, 연륜이 쌓임에 따라 점점 무계획형의 쫄보로 변해가고 있다. 쫄보이지만 다행히 책임감은 강해서 어쩌다 나쁜 일이 생겨도 끝까지 울며 수습하는 그런 짠한 쫄보... 이런 속내를 모르는 사람들은 날더러 용감하다고 하겠지만 나는 안다. 나는 천하제일의 겁쟁이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