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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놀아본 게 언제인가?

노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잊고 있었다.

by 누스

무심코 "작가의 서랍"을 열어봤다. 그중에서도 작년 여름, 속초로 휴가를 다녀온 후에 작성한 짤막한 소감이 눈에 띄었다.


노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잊고 있었다.
모든 게 좋았다.


휴가 일정을 잡아놓고도 온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릴 생각에 떠나기 전부터 잔뜩 지쳐 있던 나였다. 그땐 차라리 일하는 게 편하다고까지 생각했었다. 친구를 붙잡고 휴가 가기 싫다고 칭얼댈 정도였으니.


그랬던 내가 동해 바다에 온몸을 풍덩 담그는 순간! 모든 피로와 스트레스가 바닷물에 녹아내리는 듯한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다. 안 놀고 싶단 사람 어디 갔니.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나는 거대한 개구리가 되어 속초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평소 같았으면 찝찝하다고 느꼈을 법한 땀도 거슬리지 않았다. 온몸의 감각으로 놀이를 느꼈고, 온몸의 근육으로 유희에 참여했다.


사실 나는 엄청 놀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평소에는 마음껏 놀 수가 없으니 체념을 하다못해 착각하고 살았나 보다. 나는 그다지 놀고 싶지 않다고, 아니 어른치고 이만하면 적당히 놀고 사는 거라고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잘 놀지 않는다. 제 딴에는 논다고 하지만 그건 진짜 노는 게 아니다. 다들 소파에 누워서 휴대폰 스크롤이나 넘기면서 '나는 지금 놀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애들도 놀지 않는다. 놀이터를 누비는 것도 길어야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다. 그 이후로는 놀 시간도, 놀 장소도 없다. 한 때는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가 마라탕 집에 갔다가 저가 카페에서 디저트를 먹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건 중년에나 할 법한 놀이(?) 아닌가?


다들 한국 사람들은 놀 시간이 없는 게 문제라고만 하는데, 나는 놀 장소와 놀 거리가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본다. 딱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견물생심이라고, 사람은 본디 눈에 띄는 것에 끌리게 되어 있다. 초등학생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마라탕이나 땡땡커피가 아니라 원반 던지기를 할 수 있는 공원이었다면, 조약돌을 던져볼 수 있는 냇가였다면 어땠을까?


그러다 보니 우리는 모두 놀 줄 모르게 되어버렸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본인이 얼마나 잘 놀아본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유년 시절에 바다에서 담금질깨나 해봤던 나는 바다에만 가면 제일 흥이 난다. 마찬가지로 공 좀 차 봤다던 내 남편은 공놀이를 할 때 제일 신나 보인다. 그때만큼은 아재의 육신에 깃든 손흥민의 영혼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건 한계가 있다. 너무 재미없기 때문이다. 툭 까놓고, 다 큰 어른이 방귀나 뿡뿡거리는 미취학 아동의 그림책에서 뭔 놈의 재미를 발견하겠나? 그래서 애들 수준에서 놀아주는 건 재미가 아니라 책임감과 인내심으로 하게 된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우리의 인내심은 하찮다. 30분이면 잘 버틴 거고, 사실 20분만 지나도 손이 슬금슬금 휴대폰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제일 바람직한 길은, 부모 자신이 놀면서 그 놀이에 아이도 참여시키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놀이가 오래 지속되며, 가족 구성원의 참여도와 만족도도 높다. 그러려면 구성원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놀 거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부모 자신이 놀 줄을 알아야 한다. 내가 노는 육아는 덜 지친다. 아이를 키우는 데에 가장 중요한 덕목을 꼽으라면 단연코 책임감이겠지만, 그 어떤 성인군자도 유희를 빼놓고는 이 지난한 길을 묵묵히 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놀아 본 건 언제인가?

잘 놀 줄도 모르는 어른이 잘 노는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놀 줄 모르는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놀 줄 모르는, 놀지 못하는 우리 사회는 어떤 모양으로 자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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