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꾸민 내 모습이 생소했던 날

어렵게 얻은 셀카와 주름의 명분

by 누스

2주 전에 유튜브 촬영을 할 일이 있었다. 고맙고 황송한 기회였지만 나는 카메라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인터넷 어딘가에 시청각적 흔적이 남는다는 사실이 영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어쩌나.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다.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는 수치를 감수하는 게 낫다.


촬영 일정을 확인한 후 대뜸 거울을 봤다. 칸쿤에 다녀와서 문신처럼 진해진 기미주근깨 + 선크림으로 번들거리는 맨 얼굴 + 핏기 없는 입술 + 고무줄 하나로 대충 묶은 포니테일 + 앞도 잘 볼 겸 맨 얼굴도 살포시 가려볼 겸 콧등에 걸쳐놓은 안경. 흡사 마동석한테 흠씬 두들겨 맞고 착해진 장첸.


이대로는 아니 되오. 황급히 화장대 서랍을 열어보니 산 지 십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색조 화장품들이 '여어~ 오랜만이네'라며 해맑게 굴러 나온다. 옛날 옛적에 자주 썼던 아이섀도 케이스를 열자 할머니댁 궤짝에서나 날 법한 소리가 난다. "쯔억" 이..이게 맞나? 원스 어폰 어 타임, 데이트라는 걸 하던 시절에 발랐던 립스틱도 있다. 색이 너무 쨍하다. 남편이 한때 남자친구였다는 사실만큼이나 남사스럽다. 마스카라 뚜껑을 열었더니 검은 덩어리가 후드득 떨어졌다. 열과 압력과 방임을 버티다 못해 석탄이 된 거냐. 수분이라곤 1도 남지 않은 아이라이너에서는 찌걱 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걸로 점막을 채웠다간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 같다.


아무래도 장첸의 겟 레디 윗미는 안 될 것 같았다. 더군다나 화장대가 저 지경이 되도록 방치해 온 장첸이가 갑자기 화장을 잘할 가능성도 없었다. 그렇다고 화장품을 사는 건 싫었다. 앞으로도 안 하고 다닐 것 같으니까. 이것저것 따져 보니 차라리 돈을 내더라도 남이 꾸며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샵을 예약했다.


메이크업 선생님은 노련하게 내 얼굴의 골격을 살피시더니 복비도 안 냈는데 한 시간이나 관상을 봐주셨다. 눈썹이 일자에 가깝고 이마가 어쩌고 저쩌고. 이런 사람들은 일을 진짜 많이 한다. 일복이 많다. 그런데 일복이 많다고 돈을 다 많이 버는 건 아니다(어머 맞아요 선생님). 그건 별개다. 일은 정말 많이 하실 거다. 그리고 입술이 이렇게 생긴 사람들은 착하다. 이해심이 많다. 대충 요약하자면, 나는 이해심이 많고 일을 많이 하는 착한 호구. 어쩜 용하시다. 선생님께서는 착한 호구에게 일만 들입다 들어오지 말고 이제는 돈도 같이 들어오도록 덕담과 같은 메이크업을 해주셨다.


하필 그날은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칼바람 때문인지, 놀랍도록 정확한 관상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곧 있을 카메라와의 약속 때문인지, 나는 촬영 장소로 걸어가는 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말 그대로 오들오들 떨었다. 나는 사실 말하는 데에 자신이 있는 편이다. 발표건 강연이건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게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 "말을 참 잘하시네요."라는 말도 자주 들어봤다. 그렇다고 긴장하지 않는 건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긴장을 하는데, 그게 티가 잘 안 나는 모양이다. 떨어도 떤 것처럼 보이지 않는 초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 후로는 더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카메라 앞은 다르다. 발표나 강연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버리지만, 카메라는 모든 걸 남기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의 초능력이 열심히 일해줬다. 호스트 분께서 처음 촬영하는 사람 답지 않다며 칭찬해 주셨다. 하지만 나의 초능력은 어디까지나 눈가림용이다. 실제로는 많이 떨렸는지 촬영이 끝나자마자 손을 떨다가 음료를 쏟았다. 그래도 카메라가 꺼지니까 숨통이 트였다. 질문지를 받은 후로 이틀 동안 머리를 꽉 조이던 두통이 싹 가셨으니 말이다.


돈을 내고 받은 메이크업이라 지우기 전에 셀카를 찍고 싶었다. 그런데 셀카는 유튜브 촬영만큼이나 어려웠다. 다시 말하지만 그날 너무 추워서 휴대폰을 든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렸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찍자니 너무 창피했고, 그렇다고 이거 한 장 남기자고 인적 드문 곳으로 가기엔 예쁜 척에 너무 공들이는 것 같아서 쑥스러웠다. 이제는 두껍게 화장을 해도 어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좀 놀라기도 했고, 옆에 아이들도 없이 사진을 찍으려니 주변이 휑한 것이 영 어색하기도 했다. 이렇게 남몰래 나 자신과 씨름하는 사이 부지런한 두 발은 금세 나를 집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신발 벗기가 무섭게 울리는 휴대폰 알람. 곧 하원 시간이다.


우리 집 남자들은 내가 이렇게 꽃단장을 했는데도 뭐가 변한 건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나마 딸이 알아봐 줬다. "어? 엄마 얼굴이 왜 그래요?" 고마워. 예쁘다는 거지? 역시 딸밖에 없네. 하원 길에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개구쟁이 녀석들과 함께 서자 비로소 사진을 찍을 구실이 생겼다. 나만 한껏 꾸민 사진인데도 어쩐지 배경은 나인 것 같다. 정 중앙에 서봐도 그냥 가운데에 있는 병풍 같다. 아이들의 배경이 된 일이 좋은 건지 서운한 건지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익숙해져 버렸다. 활짝 웃었더니 눈가와 입가에 주름이 졌다. 그래도 아이들의 미소를 보니 내 주름의 명분을 얻은 것 같아서 조금은 안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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