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세상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

by 민네


베스트셀러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하버드 대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하버드에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너희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받침가능한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그러자 많은 학생들이 동의하지 않았으며, 하버드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자신의 피나는 노력이 결정적이었다고 반응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시대에 그런 나라에 그런 학업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든, 환경이 조성되도록 영향을 미친 요인이 발생한 환경 등은 다 운이 좋게 주어진 셈이다.

태어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 재능과 시대와 부모와 가정환경과 나라 등 - 은 그 개인에게 그러한 '자격'이 있어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주인공 다니엘 영국 할아버지는 40년간 목수로 성실히 일해오다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쉬게 되면서 질병수당을 받고자한다.


그러나 말도 안되는 심사로 노동 적합 판정을 받게 되어 수당 지급이 누락되며, 구직수당을 받아야 될 상황에 처한다. 기관(정부에서 외주를 준 파견업체)에서는 의도적으로 수당을 원활히 지급하지 않을 목적으로 쉽게 연결되지 않는 기관의 콜센터, 융통성이라곤 일도 없는 절차 고집 관행, 불친절, 온라인 신청 방식 의무화 등으로 번번히 주인공에게 퇴짜를 놓는다.

영화에서 가장 가슴 미어지던 장면이 있다. 주인공은 센터에서 구직수당을 신청하려다 어려움에 처한 두 아이의 젊은 엄마를 도와주면서 그 가족과 가까워졌다. 전기세를 낼 수도, 3인분의 식사를 준비할 돈도 없는 그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주인공 다니엘이 동행하여 정부 지원 푸드 뱅크에 가게 된다. 그녀의 순서가 되자 가장인 그녀는 홀로 직원의 안내에 따라 비닐봉투에 각종 채소와 식품, 생필품을 담는다.

그러다 직원이 발걸음을 돌린 틈을 타, 통조림이 쌓인 선반의 구석에 서서는 캔 하나를 따서 토마토 소스같은 음식물을 맨손에 담아 허겁지겁 입으로 집어넣는다. 직원은 놀라서 뛰어왔고, 아이도 주인공도 달려왔다. 한동안 뭘 먹지를 못해서 너무 어지러워 자기도 모르게 그랬다며, 본인도 당황했는지 엉엉 울음을 터트린다.

주인공은 그녀의 손을 잡고는 말한다,
이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가난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사람들도 각자가 그 성공과 부에 대한 '권리'가 있을 뿐, '자격'은 없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이들 대부분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환경에 갇힌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력한다해도) 노력해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기 힘든 상황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불공평한 경우가 대다수다. 가난하게 된 환경이 주어졌을 뿐, 가난할 '자격'이란 건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나 혼자 배를 채우고자는 욕심은 인간에게 끝없는 허무만을 남긴다. 소수의 이익이 집중되는 사회는 장기적으로 사회손실이 클 수 밖에 없다. 사회 약자들을 돌보면, 사회전체에,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결국은 이익으로 돌아온다. 세상이 더욱 따뜻해지면, 사회 전체가 행복해진다.

더, 사람을 위한 세상이 되어야한다.

부당한 판정을 이길 수 있는 재판을 앞두고 주인공은 안타깝게 심장마비로 돌연사한다. 재판장에서 마지막 항변으로 읽고자 준비한 종이 한장이 유서가 되버렸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한 푼도 모자람 없이 나라에 내야할 돈을 냈습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 나는 인간이지 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를 존중해달라고 당신에게 요구합니다.”

그해,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리뷰가 과연 믿을만 했다.

#나다니엘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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