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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네 Feb 14. 2024

영화관에서 팝콘을 대체 왜 먹는 거야

당연한 게 당연한가요


덜컹거리는 마을버스 안에서 여자의 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영화관에서 팝콘을 도대체 왜 먹는 거냐고.’


20살쯤으로 보이는 여자 친구 둘의 대화였다. 영화관에서 팝콘 먹는 사람을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다른 친구는 그저 듣고 있었다. 울화통이 터진다는 듯 여자는 쏟아냈다. 영화관에선 팝콘을 안 먹는 게 당연하지 않냐며 친구의 동조를 구하는 듯 보였다. 영화관에서 팝콘 먹기가 한때 삶의 낙이던 나 같은 사람을 만난 걸까. 의도치 않게 듣게 된 말에 조금은 놀랐고, 괜히 내가 이해받지 못하는 것 같아 그 즐거움에 대해 얘기해주고 싶기도 했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마을버스에서 들은 얘기를 했다. 영화관에서 팝콘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 하지만 팝콘을 안 먹는 게 당연하고, 먹는 게 이상하다는 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래 이상할 것까진 없지, 하며 남편은 내 말에 동조했다. 내 편을 들어준 남편 덕분에 왠지 모를 마음의 위안이 됐다. 하지만 이름도 모를 그 사람에겐 당연한 게 나에겐 당연하지 않은 게 쓸데없이 마음이 걸렸다.


며칠 후, 남편과 사소한 다툼을 했다. 도서관을 오가는 길에 서로 기분이 상했다. 동네 서점과 지역민의 독서를 돕는 지원책이 있다. 동네 책방에서 지역화폐로 책을 구입하고 한 달 내로 읽고서 도서관에 반납하면 책값을 돌려받을 수 있어 종종 이용했다. 책 욕심이 생겨 남편에게 몇 차례 부탁해 남편 앞으로도 책을 신청했다. 산책 겸 일요일 오후, 집 근처 도서관에 함께 가는 일은 남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여겼다.


집을 나설 무렵, 남편은 내가 (읽으려고 했으나 바빠서 결국) 읽지도 않은 책을 반납하고 또 (남편이 보기엔 안 읽을 책을) 신청하는 일, 그리고 함께 반납까지 하러 가야 하는 일에 불만을 표했다. 나는 당장 못 읽어도 가까운 도서관에 읽고 싶은 책을 두는 것도 좋고, 특히 동네 책방에도 작지만 매출에 도움을 주면 좋지 않냐고 했다. 불편해하는 것 같으니 이제 더 이상 부탁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작은 수고로 얻는 유용함이 분명한데 그걸 이해 못 해주는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자기를 피곤하게 만드냐며 나를 이해 못 하는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부부 상담이 종료되고 개인 상담을 이어가던 차였다. 상담 선생님에게 마침 그때 일을 얘기했다. 남편과 사소한 다툼이 있을 때마다 그런 부분에서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선생님은 두 가지를 짚어주었다. 하나는 ‘모두’, 그리고 ‘같이’, 나누길 좋아하는 나의 성향이었다. 특히 최근 다툼에서는 내가 좋으니까 ‘너도 같이 해야 해’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하나는 남편의 성향이었다. 혼자서, 효율성 있게, 가성비를 선호하는데다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 입장에선 읽지도 않은 책을 결제하고 비용을 신청하며 반납하는 과정이 돈 낭비, 시간 낭비에 에너지 낭비까지 모든 게 다 비효율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이 왜 기분이 나쁜지를 도통 알 수 없었던 나는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서 꽤 놀랐다. 상대가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부부 상담 시 남편과 나의 미네소타 다면적 인성 검사(MMPI)의 결과를 바탕으로 각자의 성향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었다. 덕분에 나도 모르고 남편도 몰랐던 각자의 모습까지 선생님은 파악해 설명이 가능했다.)




그 후에 덧붙여진 말이 더 놀라웠다. 남편의 성향을 봐선 아이가 생겼을 때, 내 아이한테만 지극히 정성을 쏟아부을 걸로 예상되기에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나는 내 아이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아이도 중요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예시를 들자면 내 아이도 남의 아이도 똑같이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보육원의 아이처럼 키울 수도 있다고 했다. 순간 머리를 맞은 듯 예전 일이 떠올랐다.


학창 시절, 친해진 친구가 있었다. 대여섯 명이 앉아있는 학원 교실에서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갖고 있던 소소한 간식을 친구들과 나누어 먹고 싶었다. 마침 하나가 모자랐다. 주변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고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내 옆에 있던 친한 친구에게 하나로 나누어 먹자고 했다. 친구는 서운하다며 삐쳤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다 같이 나누어 먹는 게 좋겠고 우리가 양보하면 되겠다 싶었다. 친구도 당연하게 그걸 좋아할 거로 생각했다. 아니라도 최소한 이해하고 동조해 주길 바랐다. 나 역시 친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 같이 나누고, 그걸 함께 하는 게 ‘당연히’ 맞는 일이고, 심지어는 더 나은 우월 가치라고 무의식적으로 여겨왔다는 걸 그제야 깨닫게 됐다.


행하는 사람 입장에선 좋은 의도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이렇게나 (못한 생각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건 글로만 알았던 듯하다. 주변 사람에게는 거리를 두고 다름을 인정한다 해도 가까운 가족이나 특히 부부 사이에는 일상에 적용하는 일이 꽤 훈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마을버스에서 팝콘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목소리가 잔상에 남은 건 아마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투영되는 듯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나에게 당연한 생각이 다른 사람에겐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아마 남은 평생 훈련해야 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나를 따라서 영화관 팝콘을 즐기게 된 남편에게 특히 앞으로의 훈련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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