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균열

몽테뉴의 가르침,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균열

by 시월해담

지난 글에서 우리는, 삶이 무너지는 이유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해석은 어디서 왜곡되기 시작할까요. 대부분은 관계, 그중에서도 단 한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그 사람은 꼭 악당처럼 굴지 않습니다. 오히려 친절하고, 말투도 부드러우며, "좋게 가자"는 말을 잘합니다. 다만 그 친절이 당신에게는 늘 같은 의미로 남습니다. 당신의 통제권이, 아주 조금씩 그 사람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의미로.


계약서 끝의 날짜

당신은 계약직입니다. 명함 한 줄이 사람을 작게 만들지는 않지만, 계약서 끝의 날짜가 사람의 어깨를 조금 더 낮게 만드는 건 사실입니다. 회사든 학교든 기관이든, 이름만 다를 뿐 구조는 비슷합니다. 누군가는 결정을 하고, 누군가는 기다립니다. 누군가는 "검토해볼게요"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그 말이 떨어진 뒤 며칠을 계산합니다.

어느 날, 담당자가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번 건은요, 좀 유연하게 가시죠. 서로 좋게요."

유연하다는 말이 나쁠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압니다. '유연함'은 종종 경계의 해제를 의미하고, '서로 좋게'는 대개 한쪽만 더 참으라는 뜻이 된다는 것을.

당신은 잠깐 멈춥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화면을 바라본 채 문장을 고릅니다. 이상하게도 당신이 고르는 문장은 늘 짧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 짧은 문장이 통제권을 얼마나 많이 옮기는지, 당신은 알고도 씁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음 달'을 견디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도와준다는 말의 무게

며칠 뒤, 회의가 있습니다. 분위기는 괜찮습니다. 겉으로는요. 사람들은 웃고, 메모를 하고, 친절한 척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회의실에서 가끔 특정한 공기를 맡습니다. 누군가의 표정이 아니라 누군가의 중심이 정해지는 공기. 오늘 중심이 누군지, 오늘 주변이 누군지, 말로는 없지만 모두가 아는 공기.

당신이 의견을 말합니다. 큰 이야기가 아닙니다. 작은 리스크 하나를 짚고, 일정 하나를 조정하자는 제안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웃으며 말합니다.

"좋아요. 근데… 지금 그걸 굳이 말해야 해요?"

질문은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더 정확합니다. 이 질문은 내용이 아니라, 당신의 '자리'를 묻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말해도 되는 위치인가. 지금 당신은 분위기를 흔들어도 되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 다음에 따라붙는 문장이 있습니다. 늘 같은 구조로.

"제가 도와드리려고 하는 말이에요."

도와준다는 말이 나오면, 당신은 이상하게 방어를 멈춥니다. 도움을 거절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서.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서. 그래서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설명을 시작합니다. 설명은 길어지고, 길어질수록 더 피곤해집니다. 설명이 피곤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설명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부터 관계는 침식으로 변합니다. 폭발이 아니라 누수로.


몽테뉴가 남긴 한 가지 태도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입니다. 그는 『수상록(Essays)』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합니다. 세상을 해석하기 전에, 자기 마음이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먼저 살핍니다. 몽테뉴가 남긴 태도는 단순하지만 강합니다.

관계 속에서 내가 흐려질수록, 더 정확히 나를 관찰해야 한다는 것. 내가 내 편을 잃어버리기 전에,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도 그 태도일지 모릅니다. 상대가 무례했는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더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마주친 뒤, 내 안에서 무엇이 바뀌었는가. 숨이 얕아졌는가. 설명이 늘었는가. 즉답을 해버렸는가. 내 하루의 핸들이 내 손에 있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표정에 달려 있는가.

회의가 끝나고, 단톡방이 조용히 움직입니다. 당신이 올린 메시지는 읽히지만 반응은 늦습니다. 누군가가 가볍게 던진 말에는 이모티콘이 붙고, 당신이 남긴 정리는 묻힙니다. 누구도 당신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이 스스로 눈치를 보게 만듭니다.

"내가 괜히 말했나." "내가 예민했나."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하나."

이 질문들이 늘어나는 순간, 통제권은 이미 당신 손을 떠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에 반응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반응이 반복되면, 사람은 결국 '자기 기준'을 잃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보다, 무엇이 안전한지로 움직입니다.

관계가 우리를 조용히 침식하는 방식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한 사람은 큰일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의 "해석"을 조금씩 바꿉니다. 그 해석이 바뀌면, 당신의 기준이 바뀌고, 기준이 바뀌면 통제권이 바뀝니다.

그래서 오늘, 질문은 하나만 남깁니다.

지금 내 기준은 누구 것인가.

이 질문이 바로 '탈피'의 시작입니다. 남의 기준이 내 안에 얇은 껍질처럼 굳기 전에, "이건 내 것이 아니다"라고 알아차리는 것. 알아차리는 순간, 통제권은 다시 아주 조금 당신 쪽으로 돌아옵니다. 크게가 아니라, 시나브로.


오늘의 단서

오늘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난 뒤, 이상하게 지쳤다면 몽테뉴처럼 잠깐 멈춰서 속으로 관찰해보세요.

"나는 지금 선택했나, 반응했나." "내 숨은 깊은가, 얕은가." "설명이 늘었는가, 침묵이 늘었는가."

답이 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말한 '거리'의 감각을 빌려, 관계에서 통제권을 잃지 않기 위해 필요한 적정 거리의 기술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대신 한 번 되찾으면 쉽게 빼앗기지 않는 방식으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몽테뉴.jpeg 몽테뉴, 수상록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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