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글 파마

머릿발의 세계

by 반점

큰 맘을 먹었다. 동네 어귀에 있는 공주헤어숍을 찾기까지. 타고난 반곱슬머리에 잦은 새치 염색으로 손상된 모발, 거기다 어중간한 길이까지. 하나로 묶어도 삐져나오는 머리, 어수선함을 견뎌오다 에라, 하는 심정으로 미용실을 찾았다.

머리모양은 사람 이미지에 많은 영향을 준다. 머릿발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원하는 이미지로 나를 거듭나게 해 줄 미용실 선택이 중요할 수밖에. 이미 제주에서 한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 더웠던 여름, 검색해서 이른 아침 예약할 수 있는 가까운 곳을 찾았더니, 개척교회 목사님이 원장님이었고, 원장님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화려한 언변으로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좋은 말씀들이긴 했다. 다만 머리모양도 미용실도 내 스타일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 이미 한번 실패한 머리모양을 회복하려면 좀 더 신중했어야지, 뒤늦게 생각해 본다.

공주헤어숍은 작고 오래된 동네 미용실이다. 원장님 한 명이 모든 걸 관리하는 곳, 동네 어르신들이 주요 고객층이다. 그러니 뽀글 파마 전문이지 암, 그래서 찾아갔다. 망해도 뽀글 파마지 뭐.

- 아, 이 머리 잘 안 나오겠는데

- 저 파마는 잘 나오는 머리예요. 빈티지펌 해주세요. 이 사진처럼요

- 잘 나오려나 모르겠네

- (간절하게) 예쁘게 해 주세요

사진의 머리는 굵은 웨이브가 자연스럽게 들어간, 절대 과하지 않은 단정한 웨이브 단발머리였다. 원장님은 내가 내민 사진을 힐끗 한번 쳐다보곤 곧 작업에 들어갔다. 원장님의 분주한 손길 탓인가, 30분 만에 뚝딱 파마가 완성되었다. 미용실에서 보내는 시간을 세상 지루해하는 나로선 그 시간만은 정말 만족스러웠다. 원장님도 만족한 듯 거울 안에서 웃고 있다. 원장님의 미소를 배경으로 보글거리는 내 머리가 얼핏 보인다. 아, 보글거림을 넘어선 빠글빠글 내 이럴 줄 이미 충분히 예상은 했었지.

- 머리 너무 잘 나왔네, 걱정했는데 예쁘게 나왔어

- 네 아하하 고맙습니다

- 파마머리는 손질하기 나름이지. 예쁘게 만져요

내 뒤 순서로 온 동네 어르신은 내 머리를 가리켜 나도 저렇게 해줘, 하신다. 내 어색한 모양새가 미용실 거울로 자꾸 보여 공주미용실을 서둘러 나왔다.

내 머리를 처음 본 주변인 반응.

집사람 1, 음 괜찮네

집사람 2, 엄마 파마했다

집사람 3, 귀엽네 엄마

동생 1, 아줌마 머리네 뭐

그럼 나 아줌마지, 알고 있다고. 역시 세상의 동생들은 대개가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굳이 동생 2, 3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 속 동생들은 귀여움을 넘어선 귀한 존재들이던데. 현실의 동생은 그저 팩폭을 날리는, 살아있는 진실의 입이다. 그런 한마디가 가끔은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사 오고 동네를 산책하다 공주헤어숍을 발견하곤, 저기 나 못 가겠네. 공주가 아니라서 했었는데. 미용실 원장님 딸이 공주라 한다. 원장님은 공주 엄마였다. 그럼, 왕비님?

딸아이가 네 살이었던가, 꿈에 부풀어 반짝이는 눈동자로 해맑게 얘기한 적이 있다.

- 엄마, 아빠, 나 커서 공주 할 거야

- 어쩌나, 아빠가 왕이 아니라 우리 딸은 공주가 될 수 없는데

아, 남편은 한순간 왕이 될 수 있었던 순간을 놓쳤다. 딸의 세계에서 잠시나마 왕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현실감각 덕에 그 기회를 날려 버렸다. 딸아이의 설레어서 반짝이던 눈은 눈물 속에 잠기고, 조금씩 삐죽거리던 입은 대성통곡으로 이어졌다. 꿈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딸은 한참을 눈물 속에 머물렀다. 난 공주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까, 글쎄 그저 외동이 되고 싶었던 적은 있다. 진실의 입 동생들이 없는. 첫째라면 한 번쯤 생각해 봤을 그저 어린 시절 이야기다.

난생처음이다. 이런 뽀글 머리 파마를 한 것은.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오는 엄마들의 죄다 똑같은 머리, 우리 엄마 머리도 그랬다. 뽀글거리는 머리를 만지며 엄마의 사진을 떠올렸다. 아, 이대로 그 대열에 들어서게 되는 건지도. 이제 난 뽀글 머리 엄마들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인가. 나이의 숫자로는 이미 충분하지만, 그 시절의 엄마들은 다르지 않은가. 응팔의 엄마들처럼 수북하게 뚝딱 먹거리를 만들고, 눈빛만 봐도 마음을 읽고 정을 나누는 경지에 오를 것인가. 머릿발의 힘으로, 온 동네를 정으로 도배를 한 그 엄마들의 세계로 나는 건너갈 수 있을까, 잠시 꿈속에 머물러 본다.



* 커버 이미지는 <응답하라 1988> 포스터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