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두 개의 호의

불편한 구석

by 반점

올레길을 걷다 다리 위에 멈춰 섰다. 묵직해 오는 종아리를 매만지며 끝점을 동행인에게 묻던 참이다. 회색 SUV 한 대가 스르르 옆에 멈춰 서더니 창문을 내린다. 그 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은 우리 둘뿐. 내려진 창문으로 손이 쑥 내밀어졌다. 작은 귤 하나 큰 귤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린 채로. 두툼하고 큼직한 손바닥이다.

- 드세요

한마디와 눈짓으로 귤을 가리킨다. 일단 받았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 귤을 어찌해야 하나, 일단 받긴 했는데. 출발할 때 먹은 밥이 진작에 소화되어 속을 채워줘야 할 시간이긴 한데, 먹기가 망설여진다. 귤이 아직 쏟아져 나오기 전의 일이다. 귀한 귤이었던 셈이다.

일단 그 귤을 가방에 넣었다. 뉴스 기사들이 언뜻 생각났기에. 동네에서 나눠마신 음료에, 요구르트에 막걸리도 있었던 듯. 음료를 사이좋게 나눠마신 사람들이 생을 마감했다는 그런 기사, 그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 귤 먹을까? 먹고 싶은데

- 어떤 귤인 줄 알고

- 설마

-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잖아


그러고 보니, 방금 지나간 묵직한 울림의 목소리, 깊게 눌러쓴 야구모자, 두툼한 손바닥, 마침 끼워 맞추니 어울리는 설정이긴 하다. 맞다 번호판, 하고 뒤를 돌았을 땐 이미 회색 SUV는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낯선 이의 호의, 귤 두 개를 가방에 넣은 채로 남은 길을 마저 걸었다.



딸아이가 다니러 와 걸으며 지난 적이 있는 동네를 찾았다. 작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노란 하귤이 달린 귤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제주 옛집을 리모델링한 작은 카페였다.


돌담이 마당을 싸고 있고, 마당 안으로 이어진, 꼭 징검다리 모양 박힌 돌을 밟아 가다 보면 카페 안으로 들어서게 되는 곳. 카페 입구에서 보이는 풍경은 딱 취향에 맞았다. 카페 사장님도 친절했다. 자리가 없어 창가에 나란한 의자에 앉으니, 옆 테이블이 비면 옮겨주겠다고 미리 얘기해 주는.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 전에 자리는 둥근 테이블로 옮겨졌고 곧 보기 좋게 세팅된 메뉴가 나왔다. 잘 구워진 빵 위에 하얀 눈처럼 덮인 적당히 부드러운 크림, 그 위에 작은 귤 하나가 통으로 올라간 예쁜 디저트, 내 입엔 좀 달았으나 디저트가 뭐 그렇지. 사진도 찍고 접시도 말끔히 비웠다.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사장님이 카페 앞마당 텃밭에서 허브잎을 똑똑 뜯고 있다. 카페메뉴에 직접 키운 재료를 쓰나 보다, 좋지. 별문제 없는데 뭐지, 희미하게 걸리는 이 불편한 구석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본다. 어느 날 신발 속으로 툭 튀어 들어와 돌아다니다 어느새 양말 안을 뚫고 들어와 버린, 작은 조각 같은 것이 있다.


카페 사장님의 허브 따기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만의 재료로 음식을 보기 좋게 만들고 친절히 고객을 응대하는 곳. 그곳에 들어서는 이들이 최대한 편히 머무를 수 있도록 세팅된 공간. 그 공간에 들어서는 이들은 그걸 누릴 수 있다. 그들이 마련한 보기 좋게 편안한 것들을.


허브밭 귀퉁이에 작게 세워진 팻말, 노키즈, 노펫존. 그 공간에 들어설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카페에 들어올 때 딸을 향해 별생각 없이, 우리 집 어린이, 여기 못 들어오겠네, 하고 말았다. 스무 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우리 집 아이인 딸에게 한 소리다. 우리 집엔 키즈에 해당하는 어린이도, 반려동물도 없다. 평소 그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러니 별생각 없이 들어섰고 그저 카페에서 조용히 즐기면 될 일이었다. 편안하게 꾸며진 카페에서 주인 분들의 호의를 그대로 받으며 말이다.


카페에 앉아 저장된 별을 조용히 지웠다. 물론 그들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리라. 그들만의 이유가 있겠지. 다만 나는 내 맘대로 내게 저장된 별을 지울 뿐이다. 그들의 구역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단 음식을 먹었더니 속이 편하지 않다. 나이가 더해갈수록 소화력이 떨어진다. 원래가 입이 짧은 탓도 있지만 사람이 작아 위도 작은지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한다. 예부터 가리지 않고 양껏 잘 먹는 게 미덕이라는데. 덕을 쌓아 올리긴 진작에 글렀다. 내가 못 하는 걸 강요하면 안 되는데, 나도 잘 먹는 사람이 좋긴 하더라. 할 수 없지 뭘.


걷다가 받아 든 귤은 결국 집에 와서 까먹었다. 혹시 몰라, 하면서 작은 귤을 나눠 먹은 뒤 나름의 시차를 뒀다. 그러곤 이내 우리 괜찮은 거지, 하며 큰 귤도 나눠 먹었다. 귤을 건넨 이가 들으면 ‘내 귤이 그럴 일이야?’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