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2일. 스위스 브리엔츠와 피르스트, 그리고 그린델발트에서
1월 23일 오전 7시 12분. 나는 지금 브리엔츠에서 루체른으로 가는 기차에 타고 있다. 해가 뜨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고, 열차 안에는 나이가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학생 한 명이 타고 있다. 기차를 타기 전 내가 “이 방향이 맞냐”고 물어봤던 학생이다. 자꾸 학생이라고 단정 지어서 미안하지만 대충 높게 질끈 묶어 올린 머리, 스키니진과 닥터마틴 워커, 모자에 털이 달린 짧은 패딩에 커다란 백팩이 내게 그러한 인상을 주었다. 만일 그녀가 학생이 아니더라도 내게 해명할 기회가 없을 테니 이건 좀 불공정한 평가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저쪽에서도 기다란 와이드팬츠에 흰 패딩, 프라이탁을 걸치고 소니 헤드폰을 쓰고 있는 나를 보고 친구가 없는 일본인 관광객이라든지 하는 (반쯤 맞고 반쯤 틀린) 추측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내 마음대로) 공정거래로 생각하기로 한다.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우연히 본 김영하 작가님의 영상에서 여행을 최대한 잘 기억하는 방법 중 하나로 글을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 시각화하여 옮겨 적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내용이 꽤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느껴져서 이번에는 여행 중간중간에 부지런히 글로 된 그림을 남기고자 했다.
그런데 미리 자백하자면 스위스 여행의 본격적인 첫 날인 어제는 조금 귀찮아서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로 잠에 들었다. 기억이라는 건 하루만 지나도 50%, 70%씩 팍팍 감가상각되는 측면이 있다 보니 한 무더기의 해마가 손상되기 전에 우선 어제의 기록부터 남겨봐야겠다.
21일 밤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도착해서 이틀차를 맞이한 22일. 전날 스무 시간이 넘는 비행 일정을 마치고 침대에 파묻혔더니 눕자마자 잠에 들어 아침까지 내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시차적응 하나 없이(라는 착각에 빠져) 개운한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 본격적인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생처음 두 발을 얹어본 스위스라는 나라가 어떤 멋진 것들을 품고 있는지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다만 전날 늦은 시간에 스위스에 들어와 공항 근처에 임시 거처를 잡았다 보니 오늘은 본숙소까지 두세 시간가량 이동을 해야 했다.
숙소의 위치는 커다란 호수가 상징인 도시 브리엔츠. ‘거대한 설산에 둘러싸인 깊은 호수’, ‘유유자적하며 마음을 식히기 좋은 평온한 동네’. 꽤나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였지만 사실 자백하자면 브리엔츠는 본래 그린델발트를 예약하려던 내가 지역을 착각하고 잘못 예약한 곳이었다. 숙소가 잘못됐다는 사실은 여행 이틀 전에야 깨달았다. 유럽까지 떠나면서도 짐을 30분 만에 싸고, 묵을 곳을 잘못 예약했다는 사실도 직전에서야 알아차리는 사람. 주변에서는 나보다 나를 더 불안해하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경악하곤 하지만, 나와 같은 사람으로 수십 년 살다 보면 이건 또 그 나름대로 적응이 된다.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닌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자기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은 한몇십 년 공존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정이 들게 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나도 내가 이상하다는 건 알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이게 나인데. 허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것은 내가 실수로 잘못 잡은 숙소 지역 또한 여행자들이 부러 찾아올 만큼 멋진 풍경을 지닌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것을 ‘역시 나는 운이 좋아!’라고 자기 합리화했다. 게으름을 부리다 느지막이 준비를 마치고 오전 11시 무렵 취리히 에어포트 모벤픽 호텔에서 나왔다. 취리히에서 브리엔츠까지는 기차로 두 번을 갈아타야 했고 시간은 정확히 2시간 40분이 걸렸다.
에어비엔비 설명을 보고 브리엔츠 역에서 따라 걸어 들어갔더니 기차역 1분 거리에 Romantic House라고 적힌 오두막집이 있었다.
캐리어만 안에 가져다 두고 바깥에 나와봤더니 집 바로 앞에 기대한 것 이상의 장엄한 풍경을 갖춘 브리엔츠 호수가 자리했고, 호수 뒤에는 눈이 쌓인 커다란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배경을 받쳐주고 있었다. 호수 뒤에는 산이, 산 위에는 자욱한 안개가 두툼하게 쌓여있어 신선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호수의 빛깔은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에메랄드빛. 달리 표현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야말로 에메랄드빛이었다. 호수 앞 자갈밭을 편안한 차림의 동네 주민들이 걷고 있었고, 털이 풍성한 강아지 두어 마리가 사람 근처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잠시 호숫가를 산책하다 숙소로 들어와 내부를 찬찬히 살펴봤다. 크기는 조금 작은 듯한 독채 펜션에는 모든 필요한 것들이 갖춰져 있었다. 무엇보다 훌륭한 것은 공간의 분위기였다. 베이지톤 러그가 깔린 붉은색 소파, 따뜻한 주황빛 조명의 장스탠드 세 개, 빨간색과 흰색이 섞인 체크무늬 이불, 옷을 겹쳐 입지 않아도 냉기가 느껴지지 않는 포근한 온도까지. 모든 것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원하는 그대로였다. 역시 나는 운이 좋아. 메인 여행지들과는 거리가 좀 되지만 어차피 나는 아침잠이 없으니까 조금 더 부지런 떨면 되지 뭐.
캐리어를 풀고 짐 정리를 간단히만 하고 서둘러 나왔다. 이미 오후 두 시가 넘어 해가 떨어지기까지 시간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한 곳 정도의 여행지스러운 여행지는 다녀오고 싶었다. 스위스에서 하고 싶었던 것은 단 두 개. 스카이다이빙과 눈 덮인 설산 구경하기. 이 두 가지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숙소에 내내 누워있더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설산을 보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후보지는 단 두 개로 좁혀졌다. 융프라우와 피르스트. 둘 중 어느 곳을 가더라도 산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삼십 분에서 한 시간에 불과했다. 마지막까지 박빙의 후보지로 고민한 끝에 나의 선택은 피르스트. 이 선택으로 인해 남은 여행기간 동안 융프라우는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융프라우에 올라가 컵라면 먹기’쯤은 다음 여행을 위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겨둬도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융프라우보다는 가는 사람이 적지만 가고 나면 후회하는 사람이 없는 여행지‘라는 점도 피르스트에 나를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피르스트에 가기 위해 브리엔츠에서 인터라켄으로 인터라켄에서 그린델발트로 열차를 탔고, 거기서 노란색 버스로 갈아탄 뒤 서너 정거장쯤을 더 올라갔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급히 달려 올라가 피르스트에 올라갈 수 있는 곤돌라 매표소로 향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매표소 안에는 줄을 선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잠시 두리번거리다 매표소 직원에게 다가가보니 지금 피르스트에 꼭 올라가야겠냐고 내게 되물었다. 지금 올라가더라도 곤돌라 타고 오르는데 30분이 걸리고 그러면 20분도 안 돼서 바로 마감시간이 되어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올라가겠다고 했다. 직원은 20분밖에 시간이 없는데 뭘 위해 올라가는 거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멋진 풍경을 보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시간은 20분이든 2시간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약간의 고집을 부린 뒤 곤돌라에 탑승했다. 직원의 말대로 마감시간이 가까워져 올라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내려오는 곤돌라에 타고 있는 사람들만 나를 스치듯 지나갈 뿐이었다. 덜컹거리는 곤돌라에 타고 30분가량을 올라가면서 양옆과 앞 뒤를 내내 둘러보았다. 사진을 찍어보려 해도 뿌연 차창에 가려 제대로 담기지 않았지만 두 눈에 들어온 풍경만큼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이미 너무 높이 올라와 아득하게만 보이는 눈 덮인 산들, 그 사이에 듬성듬성 놓여있는 오두막집들은 저녁시간을 앞두고 은은한 조명을 켜두어 반딧불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내게 남은 시간이 20분이 아니라 2분이라고 하더라도 올라갈만한 가치가 있는, 살면서 꼭 한 번은 봐야 하는 풍경이었다.
멋진 풍경에 푹 빠져 한참을 구경했는데도 시간을 보니 피르스트 도착까지 15분이나 남아 있었다. 조금은 미친 짓을 해보는 것이 시간의 속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눈밭을 보자마자 떠오른 것이 있었다. 핸드폰으로 겨울왕국 ost를 틀었다. For the first time in forever부터 Let it go까지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마치 콘서트장의 가수처럼 열창을 했다. 세상 어느 성능 좋은 노래방보다 노래가 잘 되는 느낌이었다. 이거 만약 녹음되어 안내실에 들리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뭐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그냥 살짝 이상한 동양인인가 보다 싶을 테니 상관없는 노릇이었다.
이런저런 이상한 짓들을 혼자 하다 드디어 피르스트 정상에 도착했다. 그런데,,,! 올라가는 곤돌라에서만 하더라도 아래의 설산이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면 산 정상에서는 눈보라가 세차게 휘몰아쳐 풍경 감상은 커녕 앞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이거야 말로 분노한 엘사 주변에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아닐까? 나는 엘사가 아니라 선량한 여행객일 뿐인데 말이지! 잠시 넋이 나갈뻔했지만 금세 곤돌라에 타기 전 직원이 해줬던 말이 생각났다. 남은 시간은 20분. 어쩌면 앞으로 몇 년에서 몇십 년은 못 올지도 모르는 스위스 피르스트의 풍경을 어떤 방식으로든 눈에 담아야 했다. 눈보라가 너무나도 심해 흔들거리는 다리에도 올라가 볼 수 없었고 시간이 부족해 다른 액티비티를 즐길 수도 없었기에 나는 그저 10분 정도의 편도길을 목표로 세워두고 앞을 향해 걸었다.
5분 정도 걷다 보니 눈앞에 내가 곤돌라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봤던 광활한 설산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지점이 있었다. 카메라를 잠시 꺼냈다가도 손이 너무 시려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두 눈을 깜빡이며 맨 눈으로 담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담았다. 앞 뒤 양 옆이 모조리 뽀얀 눈으로 가득 찬 이곳 피르스트. 새하얀 눈이 사무치게 그리운 날엔 어쩔 수 없이 생각날 수밖에 없는 곳이 될 것 같았다.
짧디 짧았던 20분간의 피르스트 구경을 마친 뒤 다시 내려가는 곤돌라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문제는,, 아주 큰 문제는,, 내가 스위스의 설산을 꼭대기까지 오르면서 롱패딩도 숏패딩도 아닌 멋내기 위한 얇은 퍼코트 하나를 입고 올라왔다는 사실이었다. 눈을 한참 구경하고 내려가기 위해 곤돌라 대기줄에 서있다 보니 그제야 내가 진작 느꼈어야 마땅할 그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강하는 곤돌라 칸에는 스키를 즐기던 스위스 청년, 유치원생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나와 함께 탑승했다. 놀랍게도 그 아이는 부모와 따로 올라와 혼자 스키를 즐기다 내려가는 것이었다.
내려가는데 걸리던 시간도 정확히 삼십 분. 원래 내려가면서도 여유롭게 눈 덮인 산들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한참을 밖에서 떨다 들어온 나는 그 작은 곤돌라 안에서 쪼그려 앉아 그저 사시나무 떨듯 떨기만 했다. 그러자 다섯 살짜리 꼬마아이와 젊은 청년은 서로 독일어로 뭐라 말을 주고받더니 자신들의 가방 안에 있던 옷가지와 수건들을 모두 꺼내 내 몸에 덮어주기 시작했다. 내 팔에는 어린아이의 스키복 바지가, 목에는 주황색 수건이 덮여있었다. 나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그 두 스위스인의 배려 덕분에 최소한의 온기를 채우며 무사히 정거장으로 내려왔다.
곤돌라에서 내린 뒤 다섯 살 꼬마아이와 스위스 청년에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생명줄과 같던 따뜻함을 나눠준 두 사람은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해 하늘빛이 청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그즈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음식은 다름 아닌 치즈가 넘실대는 퐁듀였다. 그린델발트에 있는 몇몇의 가게들 중 구글과 애플리케이션에 올라온 평점들을 보고 나름 선별해 Barry's라는 곳을 정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포근한 온기가 나를 덮쳤다. 분위기도 굉장히 고급스럽고 멋진 곳이었다.
자리를 안내받은 뒤 혼자 왔을 때 많이들 시킨다는 치즈퐁듀 기본 세트하나와 스위스산 화이트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한국인이 스위스에서 치즈퐁듀를 먹을 때는 퐁듀를 만들 때 들어가는 알콜이 너무 시큼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해서 알콜은 빼달라고 별도의 요청을 넣었다.
10분쯤 지나 나온 메뉴. 퐁듀 팟에 담겨 뭉근하게 녹고 있는 치즈와, 빵 조각들 그리고 알감자까지. 치즈 소스가 완전히 녹은 뒤 빵을 푹 찍었다. 입 안에 빵이 들어가자마자 고소한 그뤼에르 치즈의 풍미가 입안에 삭 퍼졌다. 화이트 와인을 한 잔 마시며 입 안에 남아있는 치즈향을 녹여냈다. 아주 어린 시절 치즈에 지금보다 더욱 미쳐있을 때. ‘치즈농장 주인에게 시집갈까?’라고 상상했던 치즈덕후인 나는 누구보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겼다.
가게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데 바로 코 앞에서 기차를 놓쳐 시간이 붕떠버렸다. 다음 배차시간은 한 시간 뒤. 밖에서 오들오들 떨다가는 또다시 동태 한 마리가 될 것이 분명해보였다. 조금 전 식사를 한 퐁듀 집 맞은편에 있던 캐주얼한 펍이 떠올랐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Hot Wine이라고 적힌 메뉴를 시켰다. 시키고 나서야 안 사실이었지만 그 기이한 메뉴는 바로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달달한 계피향의 ‘뱅쇼(Vin CHaud)’였다. 축구 경기를 열심히 보는 스위스인들 사이에 앉아 담요를 칭칭 두르고 뱅쇼 한 잔을 천천히 꿀꺽꿀꺽 마셨다. 몸이 뭉근하게 데워진 나는 그제야 숙소로 돌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