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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네마 Feb 02. 2023

#2 실패한 비포선라이즈

1월 21일, 인천공항에서 스위스 취리히 모벤픽 호텔까지


다음날, 아침 9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6시에 일어났다. 준비를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니 오전 7시, 설날 연휴가 겹쳐 수속하는데 한참 걸리겠구나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인천공항 2 터미널에는 평소와 비슷한 정도의 인파만이 몰려있었다. 수속을 마친 뒤 라운지에 있는 간이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바질 샌드위치로 여행의 시작을 열었다.


스위스로 향하는 이번 비행길에서는 파리까지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 샤를드골 공항에서 5시간 대기한 뒤 또다시 취리히 공항으로 날아가야 했다.  경유 일정이 끼어있는 만큼 꽤 피곤한 여정이 될 듯싶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 만에 떠나는 유럽행을 앞둔 내 마음에는 두근거리는 설렘만이 가득했다.


출국 시간이 다 되어가 캐리어를 끌고 탑승장으로 향했다. 짐을 윗 칸에 올려둔 뒤 자리에 앉은 뒤 핸드폰에 미리 다운받아둔 노래와 영화, 시리즈들이 에어플레인 모드에서도 잘 재생되는지 확인했다. 장시간 비행을 의외로 굉장히 좋아해 열몇 시간 뻐근하게 구겨져 앉아 가는 것까진 전혀 상관없지만 노래를 들을 수 없고 영화를 볼 수 없다면 그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전벨트를 채우고 의자에 푹 파묻히려던 찰나 누군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내 또래의 준수한 외모를 지닌 남자였다. 내 바로 옆자리인 그가 안에 들어가려 하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공간을 내주었다. 왠지 모르게 그는 자리에 앉고 나서도 내 쪽을 계속 의식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자의식 과잉일까.


이십 분쯤 준비를 마친 뒤 바닥을 잠시 구르던 비행기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구쳤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이륙타이밍에 Kent의 747을 들으며 긴 비행의 시작을 체감했다. 한 시간쯤 지나 첫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조금 특이한 습관으로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을 먹지 않는 나는 식사를 사양하고 샴페인만 한 잔 요청했다. 항공사를 에어프랑스로 선택한 덕에 아주 오랜만에 프랑스어를 써서 주문해 볼 수 있었다. 벌써부터 여행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아까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자가 내게 말을 붙였다. 그는 “식사 안 하시는 거예요?”라며 걱정스럽게 물었고 나는 “아 저 이미 하고 와서”라고 대답했다. 다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식사시간이 얼추 종료된 뒤 승무원들은 빈 그릇을 챙겨갔고 비행기의 불은 소등되었다.


비행기 안에는 고요한 어둠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직 잠을 잘 생각은 없었던 나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수백 명의 사람을 태운 비행기가 조용히 상공을 날아가는 것이 아무래도 신기해서 핸드폰을 들어 비행기 내부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그 순간 플래시가 번쩍 켜졌다. 내가 화들짝 놀라 플래시 버튼을 손으로 가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옆자리의 그 남성은 폭소하더니 “그렇게 안 놀라셔도 될 거 같은데”라며 다시 말을 걸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대강 넘기려 했으나, 그는 다시 한번 “프랑스 유학생이세요?”라고 물어왔다. 아마 아까 기내식을 먹지 않고 와인이나 한 잔 하겠다는 말을 내가 프랑스어로 했던 걸 들은 모양이다. 학생은 아니고 예전에 프랑스어 공부를 조금 했었고 지금은 직장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음 질문을 던지고 또 질문을 던지고 연이은 질문 폭탄을 이어갔다. 그와의 대화는 비행기에서 만난 낯선 이와의 만남 치고는 나름 즐거웠기에 나 역시 적당히 호응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외모도 훈훈했고 초반 한 시간 정도의 분위기는 영화 비포선라이즈 비스무리한 로맨스의 느낌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14분 정도 앉아있다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려 14시간이나 옆에 콕 붙어 앉아가야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상상 이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했고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거의 14시간 내내 나를 단 한 순간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내가 혼자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려 하면 어떤 노래 들으시는 거예요? 라며 이어폰 한쪽을 나눠 끼기를 원했고, 넷플릭스 시리즈 웬즈데이를 보고 있으면 “해리포터 같은 거예요?”라며 또 한참을 말을 걸고, 잠깐의 공백도 허용해주지 않았다. 평소 난 거절이라면 웬만치 능숙하게 해내는 편이었지만 14시간 동안 옆자리에 앉아 끊임없이 말을 거는 순박하지만 눈치 없는 남성은 어떻게 거절하는 건지 머리가 어질 했다. 그건 분명 역대 최고의 난이도였다. 비행시간을 두어 시간 남겨두고서야 잠자는 척을 하며 그와의 대화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착륙 준비를 알리던 때, 파리를 경유해서 모로코로 간다던 그 남자는 자신은 파리에서 하루 자고 갈 예정이라며 내 경유시간 5시간 동안 저녁 식사라도 함께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열 시간 넘게 그의 대화에 시달린(?)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는 느끼고 있었지만 더 이상을 그를 상대해 줄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정중히 제안을 거절하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웃으며 인사를 한 뒤 서둘러 사람들 밖으로 빠져나와 혼자 샤를드골 경유지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원래 경유지에서는 빵 쪼가리 하나 정도로 가볍게 때우려 했으나 소진 돼버린 에너지를 충전해야 했던 나는 닭고기 요리와 함께 크림브륄레까지 후식으로 시켜 먹었다. 비행기에서는 쪽잠밖에 자지 못했고 식사까지 거하게 마치고 나오니 다시 스위스로 가기 위해 대기하는 동안 잠이 마구 쏟아져왔다.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비행기를 갈아탄 뒤 한 시간 정도 더 날아가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도착했다.


프랑스 샤를드골에서와는 달리 이곳 스위스의 취리히 공항에는 신기하게도 아시아인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나와 다른 피부색과 머리색을 한 채로 이국적인 말소리를 내고 있었다. 벌써부터 누구도 내게 관심 없는 완전한 이방인이 되었다는 기분에 일종의 해방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유로운 마음과 흐느적거리는 몸은 별개의 것. 장장 20시간이 넘는 비행일정을 소화한 나는 당장 걸어가면서 잠을 청하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태였다.



스위스에 입국하자마자 승강장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공항 인근의 에어포트 호텔을 잡아둔 나는 10분 만에 호텔에 도착했다. 재발리 체크인을 마친 뒤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젠장 엘리베이터 바로 오른편에 있는 간이 호텔바가 눈에 들어와 버렸다. 외면하기에는 이 지친 하루를 달래줄 한 모금의 술이 얼마나 달콤할지 너무도 상상이 잘 돼 버렸다. ‘그래도 문을 닫았을 수도 있으니까,,,’ 하고 쭈뼛쭈뼛 다가가 바텐더에게 물었더니 남은 시간은 단 30분. 한 잔의 와인 정도를 마시고 올라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두리번거리며 들어와 바 테이블에 착석하니 앉아있던 백인 청년 다섯 명이 일제히 나를 향해 돌아봤다. 에어포트 호텔인 만큼 저들도 현지 사람이기보단 여행자에 가까울 것 같은데... 무거운 짐을 지고 낑낑거리며 나타난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저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내게 중요한 것은 30분 안에 들이켜야 할 한 잔의 술뿐이었다. 칵테일을 마셔볼까도 싶었지만 시간이 늦은 탓에 포기하고 샴페인 한 잔을 시켜 마시는데, 바텐더가 특별 선물이라며 시그니쳐 칵테일 한잔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달달한 체리절임이 올려진 칵테일을 갖다 주었는데, 그러면서 영업시간이 종료된 뒤 이 바에서 파티가 열리는데 거기 조인하겠냐고 질문을 던졌다. 여행 중에 가장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예상치 못한 변수만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러다 진짜 쓰러지겠는데’ 싶어 정중히 사양했더니 그는 농담이라며 파티 같은 건 사실 없다고 "So cute"라며 나를 놀려댔다. 쳇. 칵테일이 맛있었으니 봐준다! 30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12시가 땡 하자마자 숙소로 올라간 나는 샤워를 마치자마자 포근한 침구에 파묻힌 채 긴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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