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1장 | 제1화
― 리시아 문드리안의 회고록, <불과 그림자의 연대기> 서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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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봐! 이래서 납기를 맞추겠어? 빨리 움직여!”
갈매기의 울음소리보다 선적을 독촉하는 거친 고함이 먼저 귀를 때렸다.
대륙 최대 상단 ‘단치’의 거점,
세렌타 항구.
오늘도 물류와 금화가 쏟아지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그 항만의 중심부.
낡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청년 하나만이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교역품들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자수가 놓인 비단들이 치워진 자리.
무두질 된 가죽 뭉치와 철광석 포대들이 놓여 있었다.
“......”
후드 속 청년의 시선이 가죽 뭉치의 두께를 훑고, 철광석 포대에 박힌 제련소의 직인을 스쳤다.
청년은 쓴웃음을 삼켰다.
전시 보급품의 비정상적인 물동량.
시장은 이미 가격표가 아니라 군령(軍令)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느긋하게 발을 뗐다.
하지만 눈빛만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 후.
청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단치 상단 세렌타 지부의 접수처였다.
"단치 상단 세렌타 지부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접수처에 앉은 신입 직원 비비안 크러프트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그녀는 서툰 주판질을 이어가느라 여념이 없었다.
눈앞의 장부에는 처리해야 할 품목들이 어지러이 적혀 있었다.
톡톡.
나무 접수대를 두드리는 맑은 울림.
비비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
후드 속에서 남자가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허름한 차림새였지만, 눈매만큼은 묘하게 차분했다.
"지부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비비안은 잠깐 할 말을 잊었다.
단치 상단의 세렌타 지부장.
그는 몇 해 전부터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며 차기 상단주로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자신 같은 말단 직원들은 출퇴근 때나 겨우 어깨너머로 보는 분을 이 허름한 뜨내기가 찾고 있었다.
"지부장님과 약속을 잡으셨습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만."
비비안의 입가에 짤막한 코웃음이 걸렸다.
근거 없는 확신에 차서 정보를 팔러 오는 자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씩 들이닥쳤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장부로 시선을 돌렸다.
"지부장님은 약속 없이 뵐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주 바쁘신 분이거든요."
“그렇습니까.”
남자는 생각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의 수긍에 비비안은 괜히 뺨을 긁적였다.
"필요하시다면 접수 명단에 이름은 올려드릴 수 있어요. 지부장님이 만나주실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그리해주시겠습니까?"
비비안은 펜촉을 다듬어 장부 귀퉁이를 펼쳤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에드먼드 코르반. 코르반 남작령에서 왔습니다."
코르반.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묘한 기시감.
장부에 이름을 옮겨 적던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였다.
"아니, 나으리! 여기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
늙은 경비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온 것은.
청년의 후드가 내려왔다.
그 사이로, 푸석하지만 은빛을 머금은 잿빛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잘 계셨습니까?"
어딘가 멋쩍은 목소리. 옅은 미소가 남자의 입가에 걸렸다.
"또 신입한테 짓궂은 장난입니까? 바로 지부장실로 가시면 될 것을요!"
늙은 경비가 혀를 차며 에드먼드를 비켜 세웠다.
"아니, 절차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
"그놈의 절차가 뭔 대수라고… 아니, 차라리 잠깐만 기다리십쇼. 제가 지부장님 모셔 오겠습니다!"
경비는 회춘이라도 한 듯 2층 계단을 향해 바람처럼 질주했다.
남겨진 것은 멋쩍게 웃는 에드먼드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비비안뿐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입사 첫날, 선배가 신신당부했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잿빛 머리칼에 제법 봐줄 만한 젊은 남자가 나타나면, 묻지도 말고 지부장실로 튀어.'
그녀는 떠오른 기억에 짧게 숨을 삼켰다. 분명 그 선배도 똑같은 일을 당했으리라.
잠시 후.
2층 층계참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굴러떨어지듯 나타났다.
"코, 코르반 경! 허억, 후…"
지부장이었다.
단정한 반백 머리를 한 평소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다.
얼마나 급하게 튀어나왔는지, 왼쪽 구두는 어디서 벗겨졌는지 보이지도 않는 맨발 차림이었다.
지부장은 숨을 몰아쉬며 에드먼드의 양손을 덥석 맞잡았다.
"잘 오셨습니다.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지부장은 비비안을 향해 살벌한 눈길을 힐끗 던졌다.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자,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바로 올라가시죠. 예?"
에드먼드는 소리를 죽인 채 비비안에게 ‘미안해요’라 속삭이며 발을 옮겼다.
아마 에드먼드가 단치 상단을 왕래하는 한, 이건 매번 신입들이 겪어야 할 통과의례가 될 것이 분명했다.
온갖 수치와 도표가 벽면을 가득 채운 지부장실.
지부장은 허브티를 직접 달여 내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엔 경외와 안도감이 뒤섞여 있었다.
"코르반 경 덕에 살았습니다. 이번 은화 매집, 정산이 끝나면 어림잡아 네 배의 수익은 날 겁니다."
에드먼드는 대답 대신 건네받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피어오르는 허브티의 김 사이로 그의 입가가 매끄러운 선을 그렸다.
"아니었으면 라비타 금화 공황 때 지부가 파산했을 겁니다. 매집이 끝나자마자 금화 순도 조작 파문이 터질 줄은…"
"신뢰라는 건 유리잔 같아서 금을 내는 건 쉽습니다."
에드먼드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제국이 화폐 감정소를 비정상적으로 늘릴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노린 건 금의 순도가 아니라 시장의 '의심'이었으니까요."
에드먼드의 눈빛이 찻잔의 수면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감정소에서 흘러나온 '라비타 금화가 예전 같지 않다'는 뜬소문 한 줄.”
에드먼드이 손가락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마치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선을 긋는 듯.
“그 한마디면 적성국의 환율을 난장 내기에 충분하죠."
지부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청년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추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대국을 내려다보는 설계자의 눈이었다.
감탄도 잠시, 지부장의 얼굴에 다시금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이번 거래로 제국 고위 관리들이 코르반 경의 이름을 캐묻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수익의 배후를 조사하라는 압박이 공공연하게 들려옵니다 ."
지부장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담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목이 잘 붙어 있는지 자주 확인해야겠습니다. 그나저나, 부탁드린 약재는 준비됐습니까?”
“그게… 송구합니다.”
마른 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지부장. 에드먼드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찻잔을 입에 갖다 댈 뿐이었다.
그는 민망하단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제국의 동방 자치령에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도로도 차단되었고요. 약재 수급이 완전히 막혀버렸습니다.”
“동방 자치령에서요?”
에드먼드의 질문에 지부장의 시선은 벽에 걸린 대형 지도로 향했다.
“반란이었습니다. 다행히 금방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 장미’에게 반란군 토벌을 맡겼다고 하더군요.”
에드먼드의 찻잔이 움찔거렸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오천 명의 포로가 학살되었다더군요.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지부장의 몸서리치는 소리에 에드먼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검은 장미라.'
그녀는 감정에 휘둘려 칼을 휘두르는 광인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학살이란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확실한 복종을 끌어내는 행위에 불과했다.
숫자와 목숨을 동일 선상에 놓고 치환하는 작업.
그것은 그녀가 그 누구보다 잘하는 '공정(工程)'이었다.
그녀는 에드먼드의 설계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서늘한 변수였다.
“그 때문에 약재 수급이 늦어졌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부장의 고개 숙임에 에드먼드는 말없이 빈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찻잔 속에 남은 찻잎의 찌꺼기가 마치 전장에 버려진 시체들처럼 보였다.
에드먼드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부장님. 요새 철광석과 가죽의 시세는 어떻습니까?”
“예? 아, 내려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쟁 특수가 더 길어질 모양입니다.”
지부장의 답변에 에드먼드는 잠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을 무릎에 짧게 톡톡 두드렸다.
잠깐의 침묵.
이윽고 입을 뗐다.
“펜과 양피지를 주시겠습니까?”
“예. 여기…”
지부장이 호기심어린 시선에 답하듯, 에드먼드는 유려한 필치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짧은 순간. 양피지에 정교하고 정갈한 글자들이 가득 들어찼다.
에드먼드는 그걸 다시 지부장에게 돌려주었다.
“지부장님. 이 물자들을 3월 중순까지 코르반으로 납품 바랍니다.”
지부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에드먼드가 건네준 목록을 살펴보았다.
“말린 육포에 보존식… 예? 코르반에 이런 물품이 필요하십니까?”
“작은 준비일 뿐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달그락.
에드먼드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를 놓치지 않고 지부장은 밖을 향해 외쳤다.
“이봐! 밖에!”
순식간에 문이 열렸다.
접수처의 그 여직원이었다.
늙은 경비가 억지로 그녀를 올려보냈던 것이었다.
“예! 부, 부르셨습니까?”
지부장은 단호한 손짓과 함께 급하게 일렀다.
“당장 마차를 수배해. 코르반 경께서 타실 것이니 최고급으로…”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타고 온 게 있어서요.”
그의 정중한 거절. 지부장의 안색이 흐려졌다.
“아니, 한 번쯤은 저희의 감사를 받아주십쇼. 안 그러면 제가 민망합니다.”
“괜찮습니다.”
에드먼드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좋은 계책이 있어도 실행할 사람이 없으면 탁상 물림입니다. 지부장께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익으로 제게 돌아오면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코르반 경…”
지부장의 얼굴이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물들었다.
에드먼드는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직원을 향해 미소 지었다.
“준비된 물건만 싣고 가겠습니다. 안내해 주겠어요?”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여직원은 경례를 붙일 뻔했다가 손을 내리고는 황급히 에드먼드의 앞장을 섰다.
그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지부장은 짧게 혀를 찼다.
“저 사람이 내 아들이었다면, 난 미련 없이 은퇴했을 거다.”
단치의 사람으로 데려오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과만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상인이 아니었다. 과정을 짜고 대국을 짜는 설계자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분야는 바로, 전쟁이었다.
“비비안이에요. 비비안 크러프트!”
모든 품목을 확인하고 짐수레에 오른 에드먼드에게, 여직원은 급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옅은 홍조가 띠어있었다.
“네?”
에드먼드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비비안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언젠가, 코르반 경의 거래 상대가 될 거예요!”
신입의 패기. 잔뜩 발개진 얼굴로 부끄러움을 이겨낸 그녀를 향해, 에드먼드는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크러프트 씨. 다음에 뵙겠습니다.”
“예! 지시하신 전언도 바로 코르반으로 보내겠습니다!”
대답 대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에드먼드. 그러고는 말고삐를 가볍게 당겼다.
덜컹.
그의 몸을 실은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점점 작아지는 에드먼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비비안은 손끝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차분한 존재감은 달과 같이 은은하게 흘러넘치고 있었다.
“에드먼드… 코르반.”
아까 느꼈던 기시감이 다시 떠올랐다.
비비안은 멀어지는 에드먼드의 뒷모습을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 정신 차려, 비비안.”
그가 부탁한 전갈을 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손에 쥔 종이에는 여전히 유려한 필치의 문장이 박혀 있었다.
[코르반 제분소의 차남 루벤에게. 뗏목을 준비하도록. 유랑을 떠날 것이다.]
“유랑?”
비비안의 머리가 갸웃거렸다.
에드먼드의 속뜻을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한가로운 뱃놀이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멀어지는 마차 뒤로 항구의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 세렌타 항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설계자의 전쟁론> 작가 밍당입니다.
본 글은 댓글기능을 꺼두었습니다.
다만 한 분이라도 더 즐겁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피드백이 없다는 건 쓸쓸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글은 큐레이션이 목적이기에 고민하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셨다면 저는 오늘 글쓰기를 다 한 셈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