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1장 | 제2화
추천BGM
물안개가 낮게 깔린 새벽의 라비나르 강어귀.
잿빛 머리의 청년은 뗏목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찰랑.
밧줄로 단단히 고정된 뗏목을 강물이 규칙적으로 적셨다.
체중이 실린 발걸음에도 큰 흔들림 없는 움직임.
‘강바닥이 닿지 않는 길은, 감시가 닿지 않는 길이다.’
수운을 통한 빠른 물자 이동.
관건은 급류 지대를 어떻게 돌파하느냐에 달려있었다.
라비나르 강의 복잡한 수계(水系)가 그의 머릿속에 전술지도처럼 펼쳐졌다.
“도련님, 오랜만에 돌아오시더니 또 엉뚱한 일을 하시네요.”
잘 익은 밀알 색 머리카락을 꽁지 묶은 루벤이었다.
그는 잰 체하는 주제에 다리는 형편없이 후들거리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루벤, 네가 좋아하는 모험의 시작이다.”
“그게 라비르 강 용궁 구경이라곤 말한 적 없거든요!”
루벤의 호들갑.
하지만 에드먼드는 그저 물살을 유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참방.
손을 강물에 넣어보았다.
손끝이 저릿할 정도의 차가움이었다.
물에 빠지면 단순히 웃고 넘어갈 수온이 아니었다.
에드먼드의 입가는 실룩 올라가 있었다.
“자, 모험의 시작이다.”
“성화시여…”
그는 루벤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뗏목을 고정하고 있던 밧줄을 단검으로 끊어버렸다.
뚝. 뚝.
마지막 밧줄이 끊기고, 뗏목은 여정을 시작했다.
“허둥대지 말고, 자세를 낮춰.”
“말이야 쉽죠!”
루벤은 양팔을 이리저리 휘적거리면서도 제법 능란하게 균형을 맞췄다.
약간의 덜컹거림.
그리고 찾아온 안정적인 출발.
잔잔한 강물을 가르며 흔들거리는 뗏목은 생각보다 운치가 있었다.
살랑거리는 바람, 잔잔하게 튀는 강물.
경치는 느리게, 또는 빠르게 두 사람을 스쳐 갔다.
“이야, 제법 유랑하는 기분도 나네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다행이구나.”
어느 정도 즐겼다고 생각했을까. 루벤은 자연스럽게 삿대를 강에 집어넣었다.
“이제 이쯤에서 슬슬 돌아가야죠?”
“어때. 삿대는 닿니?”
의뭉스러운 에드먼드의 질문.
루벤은 강바닥에 삿대를 쑥 집어넣어 보았다.
그 끝에 닿아야 할 무언가가 전혀 닿지 않았다.
루벤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사… 삿대가 안 닿는데요?”
루벤의 놀람에 에드먼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에드먼드의 고개가 미세하게 끄덕거렸다.
하지만 루벤은 전혀 이해지 못한 표정이었다.
“잠깐만요. 이쯤에서 돌아가지 않으면 이제 곧 급류 지대라고요!”
루벤의 비명에도 에드먼드는 태연했다.
오히려 자세를 바짝 낮추며 루벤에게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너도 자세를 낮춰. 안 그럼 물에 빠질 텐데?”
“아이씨, 다 알고 여기까지 온 거였네!”
만약 누군가가 이들이 하급 귀족과 제분소 차남이라 듣는다면 분명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에드먼드는 뗏목에 몸을 싣고는 체중을 이리저리 분산시켰다.
수심이 깊으면 삿대가 아니라 ‘물살’로 조종한다.
급류는 바깥으로, 소용돌이는 안쪽으로.
루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성화시여! 아버지 일이나 돕는 건데!”
“성화께 거짓말을 할 셈이냐.”
에드먼드의 지시를 핑계 삼아 제분소 일은 내팽개치고 유랑을 준비하던 루벤이었다.
뗏목은 급류 지대로 흘러 들어갔다.
에드먼드의 눈빛은 고요했다.
유속과 흐름, 뗏목이 흐르는 방향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눈빛이었다.
커다란 바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벤이 비명을 질렀다.
“박는다, 박아!”
“읏차.”
에드먼드가 뗏목 한 귀퉁이를 발로 꽉, 내리눌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뗏목이 바위를 아슬아슬 비켜 나갔다.
“흐름은 항상 길 속에 있는 법이지.”
“우와!”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루벤.
에드먼드는 절박함과 기대감이 섞인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뗏목을 능수능란하게 몰았다.
그는 다시 뗏목의 밧줄을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뚜둑.
불길한 소리였다.
뗏목을 고정하고 있던 밧줄 중 하나가 뜯어졌다.
“도련님, 저기, 저거!”
“알고 있다!”
에드먼드가 품속에 있던 단검을 뽑아 강하게 통나무를 내려쳤다.
단단히 고정된 단검.
는 온 힘을 다해 뗏목이 분해되는 것을 막았다.
“조금만 더…!”
루벤이 흔들리는 에드먼드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급류 지대의 끝은 조만간이었다.
“맙소사…”
뗏목은 드디어 물살이 안정된 구간에 진입했다.
잔뜩 긴장해 있던 루벤이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았다.
“나쁘지 않은 성과다.”
에드먼드는 젖은 옷깃을 가볍게 털어냈다.
이윽고 강어귀에 도착한 뗏목. 에드먼드는 땅에 사뿐히 내렸다.
루벤은 땅에 발이 닿자, 과장되게 팔을 벌리고는 땅에 이마를 박았다.
“땅이 이렇게 소중한 줄 몰랐는데!”
“이번 기회에 감사함을 느껴봐.”
피식 미소를 짓는 에드먼드.
거슬러 온 강의 궤적을 확인하듯 훑어보았다.
루벤이 깡충거리며 무사 생환의 기쁨을 누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에드먼드에게 말했다.
“아니, 근데. 이렇게 멀리 오면 돌아갈 땐 어쩌시려고요? 준비된 게 있죠?”
“아.”
도박에 가까운 실험에 그만 중요한 것을 잊고 말았다.
“이런. 낭패군.”
강물을 타고 신나게 내려온 것은 좋았지만, 그만 코르반 영지를 벗어나 버리고 만 것이었다.
“거짓말…”
결국 그들이 3월의 봄바람에 떨며 바람골 여관에 도착한 것은, 정오의 태양이 머리를 스칠 때였다.
해가 중천에 걸린 시간. 바람골 여관의 낡은 문이 쾅 하고 거칠게 열렸다.
곰 같은 덩치에 산적 두목 같은 인상을 가진 거한이 그들은 맞이했다.
여관 주인 가레스 발로르였다.
그는 들어온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만면의 미소가 뚝 꺾였다.
“또 네 녀석들이냐.”
“어휴, 인상 좀 펴요. 아저씨. 꿈에 푸췻, 나올까 겁나네.”
루벤은 호들갑을 떨며 여관 안으로 들이닥쳤다.
뒤이어 에드먼드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발을 들였다.
가레스가 기가 막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번엔 뗏목이라더니, 라비르 강에서 미역이라도 감았나. 그래, 물 온도는 적당하더냐."
가레스의 빈정거림에도 루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뭐, 용궁 구경할 뻔했죠. 그나저나 난로 좀 씁시다!”
“칼만 안 들었지, 도적이 따로 없구나. 네놈은.”
루벤이 히죽거리며 벽난로 명당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에드먼드도 염치가 없는지 그 옆에 조용히 엉덩이를 붙였다.
가레스는 불을 쬐는 에드먼드를 향해 툭 말을 던졌다.
"뗏목의 기사가 따로 없구먼."
길에서 마주친 영지민들의 조롱들과 닮은 비아냥.
에드먼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것들을 흘려보냈다.
가레스가 무심한 손길로 에드먼드 앞에 잔을 툭 내려놓았다.
잔 속에서 찰랑이는 황금빛 액체.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한 향기.
귀한 노베르산 벌꿀주였다.
“마셔라. 언 몸 녹이는 데는 이게 약이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에드먼드가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자, 옆에서 지켜보던 루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니, 이보쇼 주인장. 내 잔은. 내 건 어디다 팔아먹었어요?”
가레스는 엄숙한 표정으로 마치 성화의 교리를 설파하듯 말했다.
“이 여관 안에 태초부터 네 몫은 존재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루벤은 억울한 얼굴로 젖은 발을 쿵쿵 굴렀다.
“아니, 사람 차별도 유분수지. 이렇게 대놓고 하는 법이 어딨어?”
“시끄러워. 제분소 아들놈이 밀가루 한 줌 가져온 적 없으면서 바라는 건 많구나.”
가레스는 투덜거리는 루벤 앞에 잔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루벤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감격스러운 눈으로 잔을 받아 든 그는 곧 내용을 확인하고 쌍심지를 켰다.
투명했다. 지나치게 맑고 투명했다.
“물이잖아?”
“얼마나 좋아하면 3월에 강에서 유랑이나 할까 싶어 줬다. 아주 신선할 거다. 감사히 마셔라.”
“망할.”
루벤은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품 안에서 꺼낸 낡은 장부 위에 멈췄다.
깃펜 끝이 여백을 긁었다. 그 소리는 난롯불 타는 소리와 묘하게 겹쳤다.
숫자 하나가 지워지고, 다른 숫자가 박혔다.
누군가는 그를 필경사라 조롱했고, 누군가는 한량이라 비웃었다.
에드먼드는 그 비웃음들을 조용히 삼켰다.
‘왕국의 돈은 남쪽 항구에서 북쪽 광산으로 흐른다. 그 길목에 있는 우리 영지가 가난할 이유는 단 하나뿐.’
라비르 강의 수운은 멈춰 있었다.
기브라임 백작의 감시자들은 눈을 번쩍이며 봉신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발견한 수로를 이용한다면.
에드먼드의 머릿속 주판이 빠르게 튕기기 시작했다.
백작의 감시 초소 세 곳을 완벽하게 우회할 수 있는 거리.
육로만을 감시하는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완벽한 운송로였다.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도련님, 또 골치 아픈 거 보고 있죠?”
“즐거운 고민이라고 해두마.”
희미하게 웃는 에드먼드의 얼굴을 보며 루벤이 지루하다는 듯 의자를 까닥거렸다.
“날마다 숫자만 보시네요. 이러다 어디 교육기관에 취직이라도 하시겠어요.”
“나쁘지 않지, 그것도.”
에드먼드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태연함에 질렸다는 듯 가레스는 한숨을 쉬었다.
흔들리는 램프 불빛이 그의 눈동자 속에 잠긴 먼 과거를 비추는 듯했다.
“이곳에 머무는 것도 나쁘진 않지. 평범하게 늙어가는 건 축복이니까.”
가레스의 목소리는 고요에 잠긴 듯 낮게 깔렸다.
“하지만 말이다. 세상의 크기를 이미 봐버린 놈이 웅덩이에 안주하긴 쉽지 않은 법이야.”
에드먼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가레스는 대답 대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녀석처럼 판을 짜는 놈들은 결국 그 판에 먹히게 되어 있지. 전쟁은 한 번 시작되면 멈출 수 없는 괴물이니.”
수많은 삶과 죽음을 목격한 전사의 걱정 섞인 조언.
결국 전쟁의 화마는 말단 병사건 판의 설계자건 평등하게 덮치는 법이었다.
괜한 이야기를 했다는 듯 가레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크흠. 뭐, 이 나이쯤 되면 별생각이 다 들지. 그냥 잊어버려라.”
그는 멋쩍은 듯 다시 잔을 닦았다.
세월이 켜켜이 쌓인 말의 무게.
에드먼드 가슴 깊은 곳, 가라앉아 있던 찌꺼기를 슬며시 건드렸다.
“영웅이 필요한 시대는 언제나 불행한 법.”
에드먼드는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천천히 손에 쥔 잔을 내려놓았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
마치 정체된 그의 삶과 닮은 리듬이었다.
여관 안은 고요했다.
누군가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만큼.
에드먼드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치 허공의 장부에 무언가를 기록하듯.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이 한 번 접혔다가 펴졌다.
그때였다.
쿵. 쿵.
여관 마루 아래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평온한 오후를 깨뜨리는 이질적인 박동.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에 묻힐 만큼 약했지만, 그 안에는 소름 끼칠 정도로 규칙적인 리듬이 실려 있었다.
가레스가 닦던 잔을 멈추고 몸을 굳혔다.
“말발굽 소리다.”
동네 조랑말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훈련된 군마에 박차를 가할 때만 나는, 땅을 찢어발길 듯한 파열음.
세 사람이 여관 문을 박차고 나갔을 때, 저 멀리 흙먼지 구름을 가르며 쇄도하는 백마 한 필이 보였다.
두두두두!
입가에 허연 거품을 문 말은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수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상체를 말갈기에 바짝 붙인 채 오직 멀리 코르반 성을 응시하는 눈빛.
소식을 전하기 위해 생명력을 태워 달리는 전령의 필사적인 돌진이었다.
펄럭이는 망토 위로 익숙한 문양이 스쳐 지나갔다.
기브라임 백작가의 방패.
“도련님, 저거…?”
루벤의 목소리가 떨렸다.
에드먼드는 대답 대신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발끝에서 서늘한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랐다.
계절은 분명 봄이었다.
하지만 에드먼드의 코끝에는 꽃내음 대신, 잊으려 애썼던 비릿한 쇳내가 훅 끼쳐왔다.
저 말발굽 소리는 단순한 방문객의 것이 아니었다.
지난 5년.
그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잊고자 했던 기억의 저편에서, 붉은 기운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의 머릿속 지도가, 다시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