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1장 | 제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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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돌아온 코르반 성은 이질적인 공기가 맴돌았다.
하인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복도마다 울려 퍼졌다.
‘올 게 왔구나.’
에드먼드는 지체없이 알베릭의 집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내성 계단의 끝.
육중한 문 앞에서 에드먼드는 발걸음을 멈췄다.
문은 한 뼘쯤 열려 있었다.
“형님,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에드구나. 들어오너라.”
문틈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끼이익.
훤칠한 키에 옷이 헐렁할 만큼 마른 어깨.
손에 쥔 양피지를 내려다보는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에드먼드의 형이자 코르반 남작령의 영주 대리, 알베릭 코르반이었다.
그는 양피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에드먼드는 맞았다.
“큰일이구나. 지금…”
“징집명령서입니까?”
알베릭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내용입니까?”
“읽어 보겠니.”
에드먼드는 말없이 명령서를 펼쳐 보았다.
서두에 적힌 장황한 미사여구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남작령의 숨통을 조일 독소 조항들만 골라내어 읽어 내려갔다.
편성: 보병 40인, 궁수 10인 차출.
시한: 4월 20일까지 브로바렌 평원 집결.
조달: 무기 및 식량 10일분 자체 조달.
처분: 불응 또는 지연 시, 봉신권 일시 정지 및 백작령 직할 통제.
파종기에 젊은 사내 쉰 명을 빼가겠다는 선언.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형 알베릭의 파르르 떨리는 손끝에 머물렀다.
“하필 파종기라니….”
그의 귓가에 형의 피로한 탄식이 흘러들었다.
농한기에 수로 보수 인부를 부를 때조차 반나절을 고민하던 그였다.
하물며 징집 명령서는.
“그렇다고… 봉신의 의무를 저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알베릭의 꽉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체 누구 집 아비와 아들을 사지로 밀어 넣으란 말이냐.”
그 위태로운 어깨 위로 지난 1년의 세월이 겹쳐 보였다.
부친이 타계한 후.
기브라임 백작에게 올린 승계 품의서는 아직 인준되지 않은 채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다.
국왕의 병세 때문이라느니, 백작이 이참에 코르반을 직할령으로 삼으려 한다느니 하는 흉흉한 소문들.
그 속에서 '영주 대리'라는 직함은 알베릭의 목을 조르는 보이지 않는 올가미였다.
에드먼드는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이는 형의 어깨를 응시했다.
“형님.”
에드먼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평소의 담담하고 부드러운 어조와는 다른 결이었다.
“봉서를 제게 주십시오. 명단 정리와 징집, 그리고 인솔까지. 제가 맡겠습니다.”
그는 망설이는 형의 손에서 봉서를 슬며시 가져왔다.
시선이 양피지 위를 빠르게 훑었다.
“쟁기질만 하던 촌부들에게 활이라…”
“이 짧은 기간에 그들이 활시위나 당길 수 있겠느냐?”
알베릭의 걱정에 에드먼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 위의 허수아비가 필요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수성(守城)이군요.”
변수가 통제된 전장.
그렇다면 승산이 있다. 운이 좋다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
“형님은 영지를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십시오. 피 냄새 맡는 일이야, 제 전공이지 않습니까.”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전했다.
허나 시선은 이미 먼 전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
형님의 걱정에 에드먼드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지난 5년, 형님의 그늘 아래 충분히 쉬었습니다. 이제 밥값은 해야지요.”
“에드.”
“우제(愚弟), 미욱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믿고 맡겨 주십시오.”
전장.
그 지독한 피비린내를 다시 맡아야 한다는 사실은 소름 끼치도록 끔찍했다.
그러나 생리적 거부감과는 별개로.
그의 머릿속은 이미 코르반 영지의 인적 사항이 적힌 장부의 첫 장을 맹렬한 속도로 넘기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면, 지배한다.
그것이야말로 에드먼드 코르반의 본질이었다.
에드먼드는 급히 세렌타로 말을 몰았다.
‘텅 빈 보급창을 노리는 도적이 있을 것이다.’
병력은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부실한 보급창은 마법이라도 부려야 채울 수 있었다.
가난한 남작령의 파종기 창고 상태를 잘 아는 이라면, 이걸 구실로 더러운 음모를 꾸밀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보급 물자의 보충.
이것이 그에게 당면한 가장 큰 문제였다.
징집명령이 떨어지고 사흘째 되는 날.
코르반 성의 평화는 순식간에 깨졌다.
백작의 참모장, 드라몬드 자작이 보낸 새로운 전령에 의해서였다.
그는 앞서 온 전령보다 훨씬 오만한 기세였다.
은빛 무구를 번쩍이며 안하무인으로 알베릭의 집무실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대가 영주 대리 알베릭 코르반인가? 본관은 기브라임 백작의 참모장, 드라몬드 자작 각하의 기사 베르딕트요.”
“드라몬드 각하의 전령께서 어인 일이시오?”
그의 손에는 자작의 군령장이 들려 있었다.
“참모장 각하의 명령이오. 코르반 영지는 당장 보급 창고를 개방하고 징집병들을 위한 보급물자 검수를 받으시오.”
알베릭은 사색이 되어 간곡히 말했다.
“그만한 보급품을 당장 내보이라니, 이 무슨 무리한 요구란 말이오.”
전령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준비하지 못하겠다면 군령대로 해야지. 영주 대리 알베릭 코르반.”
이어 차가운 말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영주의 인장을 내놓으시오. 이제부터 코르반 남작령은 참모장께서 직접 관리하실 거요.”
그는 차고 있던 롱소드의 손잡이를 절그럭거렸다.
“에드는 어딨느냐.”
알베릭이 다급하게 동생을 찾았다.
하지만 시종장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제 알베릭은 자포자기한 마음이 들었다.
“…좋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알베릭은 집무실 깊은 공간에 놓인 인장과 봉신 계약서를 손에 들었다.
그의 발걸음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인장을 놓칠 뻔하곤 겨우 허둥지둥 잡았다.
그 모습에 비아냥 섞인 전령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어차피 그대는 정식 영주도 아닌 대리의 신분 아닌가. 이참에 드라몬드… 아니, 기브라임 백작의 직할령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알베릭은 처연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다 내가 부족해서 일어난 일이다.’
가슴 속 깊은 곳의 한탄. 핏기가 가신 알베릭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윽고 영주의 책상 위에 인장과 봉신 계약서가 올려졌다.
전령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쾅!
집무실의 문이 부서질듯 크게 열렸다.
그리고는 노여움이 섞인 목소리가 방을 메웠다.
“그대는 누구길래 무엄하게도 영주의 봉신권에 손을 대는가?”
전령이 인장과 계약서를 잡기 직전.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에드먼드였다.
“에드!”
순간 알베릭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에드먼드의 옷차림은 평소와 같았다.
다만 장화에는 어딘가를 바삐 다녀왔는지 흙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전령은 에드먼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비웃음을 흘렸다.
“본관은 드라몬드 자작의 기사, 베르딕트다. 참모장 각하의 권한으로 코르반 남작령의 봉신권을 접수하러 왔다.”
“아, 그렇소?”
에드먼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대체 무슨 권한이길래 멀쩡한 봉신의 영지에 이렇게도 무도한 일을 벌인단 말이오?”
전령은 롱소드를 절그럭거렸다.
“징집명령서에 분명 명시되어 있다. 군수물자를 징발하지 못하는 봉신에 대한 처분 내용이!”
“물론 알고 있소. 그런데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오?”
배짱을 부리는 에드먼드에게 전령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둔하기는! 텅 빈 보급창으로 무슨 군수물자를 댄단 말인가! 사리 분별도 못하는 자가 어디 끼어들어서…”
에드먼드는 그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무슨 소리시오? 우리 보급창은 이미 들어찰 대로 들어차서 남은 자리도 없소.”
어깨를 으쓱이는 에드먼드를 보며 전령은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요 이틀간 쥐새끼 한 마리 지나가는 것도 못 봤다. 어디서 그런 허장성세를 부리는가?”
확신에 찬 전령의 목소리.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 기세였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 목을 걸겠다. 거짓이라면 네놈의 목을 걸어야 할 게다!”
전령의 날카로운 눈빛에 에드먼드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내 목만 걸어선 무슨 의미가 있겠소? 영주의 인장도 냉큼 가져가시오. 그래야 경의 화가 가라앉지 않겠소.”
에드먼드의 도발에 알베릭의 얼굴에 드물게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에드야! 봉신권 따위 없어도 된다. 하지만 네 목숨을 어찌 그리 가벼이 버리려 하는 게냐!”
“형님.”
에드먼드는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저를 믿으십시오. 누구보다 피 냄새를 잘 맡지 않습니까?”
자신만만한 미소.
알베릭이 익히 알던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이 드러날 때마다, 작은 기적이 하나씩 생겨나곤 했었다.
전령은 기세등등하게 보급창의 육중한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전령의 웃음이 먼저 멈췄다.
펼쳐진 광경에 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보급창 안.
단치 상단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보존식 상자와 보급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하지 않았소.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고 성화께서 가르치시건만.”
전령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에드먼드의 장화에 습기를 가득 머금은 질척한 흙이 우스스 떨어졌다.
바로 라비나르 강어귀의 진흙이었다.
“이게 무슨… 분명 길에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는데!”
에드먼드는 태연하게 전령의 당혹감에 불을 질렀다.
“아, 혹시 땅 말고 하늘을 보셨어야 하는 거 아니오? 행운이란 녀석은 가끔 하늘에서도 오더군.”
에드먼드는 하얗게 질린 전령의 얼굴 앞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단치 상단 세렌타 지부의 직인이 찍힌 공식 물품 인수증이었다.
“장부를 뒤져보셔도 좋소. 이미 입고 절차는 서류상으로도 완벽하게 끝났으니까. 참모장께서 무언가 착오를 하신 것 같소만?”
전령은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아니, 대륙 최고의 상단이 왜 이런 변방 남작령의 보급을 책임진단 말이냐!”
에드먼드는 전령의 떨리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중하게 말했다.
"기사의 맹세는 피보다 진하고 성화처럼 뜨거운 법."
에드먼드는 전령이 떨어트린 단치 상단의 물품 인수증을 주워들었다.
그러곤 그것을 탁탁 털더니, 아주 공들여 둘둘 말기 시작했다.
마치 장검의 손잡이를 다듬는 듯한 경건한 손길이었다.
"그 굳은 맹세, 어디 한 번 지켜보겠소."
에드먼드가 둘둘 만 종이 뭉치를 전령의 턱밑에 들이밀었다.
“컥…”
분명 평범한 종이일 뿐이건만.
베르딕트의 눈에는 그것이 수만 명의 목을 벤 마검(魔劍)처럼 보였다.
그는 소름 끼치는 살기에 숨을 들이켰다.
"이, 이 무슨 짓인가! 고작 종이 쪼가리로…!"
"고작? 경은 아직도 모르시는군."
에드먼드가 종이 뭉치를 허공에 가볍게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가벼운 파열음이 집무실에 서늘하게 울렸다.
"이 종이에는 경의 목숨뿐만 아니라, 경이 모시는 주군의 명예와 이 영지의 법적 운명이 걸려 있소.”
꿀꺽.
전령이 마른 침을 삼켰다.
“즉, 이 종이가 날카로운 강철보다 훨씬 깊게 그대의 목을 베어낼 수 있다는 뜻이지."
서늘한 눈빛에 압도된 베르딕트는 결국 뒷걸음질을 쳤다.
“아니… 잠깐. 그건…”
당혹감에 찬 표정.
에드먼드는 종이 검을 치켜들며 자세를 갖췄다.
당장이라도 그의 심장을 꿰뚫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기사의 명예를 아는 자라면, 본인이 뱉은 '목을 걸겠다'는 말에 이 서류로 답하셔야 할 텐데?"
"으억!"
쿵!
엉덩방아를 찧은 베르딕트는 바닥을 기듯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전령이 사라진 집무실 안.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에드먼드는 다시 종이를 곱게 펴서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구겨지면 재발급받기 귀찮은데.”
“허.”
알베릭은 경외와 감탄의 눈빛으로 에드먼드를 바라보았다.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고맙구나. 덕분에 살았다.”
“아뇨, 형님.”
에드먼드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코르반의 전쟁은.”
에드먼드의 작은 중얼거림이 집무실을 채웠다.
그에게 당면한 첫 번째 적은, 전장이 아니라 ‘서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