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1장 | 제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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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전령을 물리친 다음 날.
에드먼드는 여독을 풀 새도 없이 서고로 직행했다.
곰팡이 냄새나는 장부 더미. 바로 코르반 영지의 인구조사 장부였다.
아마포와 마를 갈아 만든 싸구려 종이의 질감.
손끝을 스칠 때마다 조용히 한 줄의 이름이 옆 종이에 적혀 내려갔다.
‘징집 연령대는 사백 명쯤이다.’
그중 오십을 징집해야 했다.
에드먼드는 징집을 앞두고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영지를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한 기술자는 제외한다.
둘째, 부양가족이 넷 이상인 가장은 제외한다.
셋째, 환자나 거동이 불편한 자는 제외한다.
이 원칙이 공표되자마자 성안에는 조용한 폭풍이 일었다.
가장 먼저 들이닥친 것은 영지에서 가장 큰 마을을 다스리는 촌장이었다.
그는 에드먼드의 탁자 위에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금속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도련님, 부족한 자식놈들을 둔 아비로서 잠이 오지 않아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잘 먹이고 키우질 못해 비실비실한 놈들이라…”
촌장은 비굴하리만큼 저자세로 한동안 자기 아들들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남의 자식이라도 그렇게 흉을 안 볼 터였다.
그러더니 대뜸 사냥꾼 피터의 둘째 아들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강어귀에 사는 피터네 둘째 아들은 아주 건장합니다. 장정 두 사람의 일을 뚝딱 해치우지요. 그런 젊은이가 징집되는 게 더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길었던 촌장의 말이 끝났다.
에드먼드는 묵묵히 장부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촌장님."
에드먼드의 정중하면서도 가라앉은 목소리에 촌장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는 장부에서 눈을 떼고는 촌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촌장님의 아들들은 모두 열여덟이 넘었지요. 다복한 집이라 형제도 모두 다섯입니다.”
“……”
“그리고 촌장님이 말씀하신 피터네는 몇 해 전 첫째가 역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둘째라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독자(獨子)입니다.”
에드먼드는 이미 장부상 영지의 모든 가정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은 후였다.
현재와 오차가 있을 순 있었다.
적어도 두 해 전 조사된 내용까지는 모조리 머릿속 서랍에 차곡차곡 철해 둔 상태였다.
“게다가 촌장님.”
에드먼드가 고개를 들어 촌장을 직시했다.
"작년 가을, 촌장님께서 보고한 밀 수확량이 실제보다 이 할 정도 적더군요. 납세 실적과 장부상의 수치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책상 위에 올라가 있는 묵직한 주머니를 응시했다.
“이 주머니가 부족한 세금의 뒤늦은 정리가 아니라면, 다시 가져가십시오. 징집은 절차에 따라 이루어질 겁니다.”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너무 박정하신 거 아닙니까. 정이라는 게 있는데…”
“촌장님.”
에드먼드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꺾이지 않는 단호함을 품고 있었다.
“인사(人事)에 정을 두진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촌장의 풀죽은 뒷모습을 배웅하고 집무실로 돌아온 에드먼드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야 한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다시 펜을 잡았다.
잉크가 종이에 번질 때마다 누군가의 삶이 자신의 손끝에서 결정되고 있었다.
에드먼드의 포고령이 떨어진 후. 뜻밖에도 스무 명이 자원했다.
이야기 속 전장의 낭만을 좇은 것일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들은 고마운 숫자였다.
이제 남은 건 서른 명.
살생부는 거기서 완성될 것이다.
“후우.”
그는 쫓기듯 성을 빠져나와 바람골 여관에 징집 본부를 차렸다.
끊임없이 찾아와 하소연하는 아낙들의 한숨과 눈물을 마주하고 있을 수 없어서였다.
기준을 세우는 건 이성이었지만, 그 기준을 견디는 건 감성이었다.
가레스가 텅 빈 여관 홀을 닦으며 피식 웃었다.
"이젠 징집 심사관 노릇까지 자처하다니. 대단한 오지랖이군."
그의 여관 앞에는 ‘임시 휴업’이란 팻말이 걸려 있었다.
에드먼드에게 자리를 내준 까닭이었다.
루벤이 입을 비죽이며 툴툴거렸다.
“눈물 나게 감사하네요. 저를 잊지 않고 제일 먼저 챙겨주시다니.”
징집 명단의 가장 윗줄에 선명하게 적힌 루벤의 이름.
에드먼드는 뗏목 위에서 보여준 루벤의 균형감각과 뛰어난 시력을 믿고 명단에 포함했다.
인사(人事)는 비정하다.
에드먼드는 루벤의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장부에 집중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코르반 남작령에서 가장 전장에 어울리는 남자니까.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농담이 아니라고요. 전쟁터라고요? 까딱하면 죽는 거잖아요?”
그제야 에드먼드가 고개를 들었다.
루벤의 눈동자에 스친 두려움이 잠시 그를 멈추게 했다.
에드먼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루벤. 내일이라도 빵을 먹다 목이 막혀 죽을 수 있는 게 인생이다.”
“아뇨, 그런 말도 안 되는 죽음 말고요.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이거, 안전한 거예요?”
에드먼드는 조용히 웃었다.
“글쎄다. 백작이 이 촌구석에 무슨 역할을 바라는지는 집결 후에야 알겠지.”
“젠장.”
루벤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툴툴거리며 까딱까딱 다리를 흔들었다.
빠각!
루벤의 머리를 내리치는 거대한 손이 있었다.
가레스였다.
“이놈아, 의자 망가진다!”
“그 전에 내 머리가 먼저 망가지겠어요!”
루벤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가레스는 기름칠을 먹이던 두꺼운 리넨 갑옷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투덜거릴 시간에, 네놈이 훔쳐 온 활시위나 한번 당겨보지 그래.”
“훔치다니요! 정당하게 산 거라고요!”
루벤은 옆에 세워둔 활을 흘끗 바라봤다.
누가 봐도 산토끼나 잡을 용도로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활이었다.
언젠가 모험을 꿈꾸며 여행자에게 은화 스무 개를 주고 산 물건.
노새 두 마리를 사고도 남을 제법 큰 금액.
언젠가 대륙을 여행하겠다는 꿈에 아버지 몰래 차곡차곡 모아두던 돈이었다.
하지만 그날, 무엇에 홀린 듯 루벤은 그 피 같은 돈을 여행자의 활 한 자루와 맞바꿨다.
물론 시위가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아, 몇 번 끙끙대다 방구석에 처박아둔 게 전부였지만.
루벤은 활 몸을 쓰다듬으며 아련한 눈빛으로 그날의 참상을 회고했다.
"들켰을 때요? 말도 마세요. 아버지한테 뒤지게 맞았죠."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때 제가 이 시위를 당길 힘만 있었어도, 우리 집안의 족보가 다시 쓰였을지도 모릅니다."
"……"
"제 부실한 팔뚝이 패륜을 막고 가정의 평화를 지킨 셈이죠."
에드먼드는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철없는 이야기꾼 지망생에게 이 활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매일 같이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비상구이자 낭만이었으리라.
'그래. 그 낭만, 실전에서도 부러지지 않게 잘 간직해라.'
에드먼드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영주의 집무실 벽에 걸려있던 활을 바라보았다.
몇 년을 묵혀둔 활 치곤 상태가 괜찮았다.
장력도 나쁘지 않아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우리 영지의 궁수 전력은, 모두 활 세 자루입니다.”
가레스는 자신의 활과 영주의 활, 그리고 루벤의 활을 들어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특히 루벤이 영혼을 갈아 샀던 활을 들었을 땐 묘한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였다.
“오, 이건 제법이군.”
그리고 부드럽게 활시위를 뒤로 당겼다.
루벤이 아무리 당겨도 꿈적하지 않던 활줄이 바아앗, 하는 소리를 내며 팽팽하게 휘었다.
“어어, 부러져요! 살살 당겨!”
“멍청한 놈. 이 정도는 당겨야…”
텅!
빈 줄이 공기를 가르며 돌아왔다.
짧지만 묵직한 울림이 방 안에 남았다.
“과녁에 꽂히지.”
저 활로 활터의 나무 과녁만 맞추리란 보장은 없었다.
한 달 뒤에 과녁 대신 맞추고 있는 건 적의 병사일지도 모른다.
꿀꺽.
루벤의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관에 울려 퍼졌다.
여관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에드먼드가 펜을 멈추었다.
촛불이 흔들리며 그의 얼굴을 물들이고, 불꽃의 그림자가 이마를 스쳤다.
그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 무슨 일 있겠어.”
“거, 걱정은.”
루벤은 억지로 가슴을 폈지만, 그늘진 얼굴은 감출 수 없었다.
에드먼드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루벤."
"왜요? 또 아낙들의 달걀 부대가 쳐들어왔어요?"
루벤의 낄낄거림.
하루 종일 닭과 달걀을 들고 에드먼드에게 찾아와 읍소하던 여인들의 눈물 어린 호소였다.
에드먼드는 철없는 루벤을 나무라는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 활로 지켜야 할 동료들을 보러 가는 거다."
“옙…”
진지한 분위기에 압도된 듯, 루벤은 합죽이가 되었다.
에드먼드는 루벤을 대동하고 영지 시찰을 나섰다.
서류상의 '숫자'가 아닌, 실제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장부에는 '징집 가능'으로 적혀 있던 청년의 집을 방문했을 때, 앓아누운 노모의 수발을 드는 효자를 보았다.
에드먼드는 말없이 명단에서 그 이름을 지웠다.
갓 결혼해 밭을 일구는 신혼부부의 집 앞에서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에드먼드의 장부 한 귀퉁이는 말없이 채워지고 있었다.
"도련님, 저 친구는..."
"알아. 하지만 누군가는 가야 해."
냉정한 대답에 루벤의 입이 다물어졌다.
마을 외곽.
경비단 초소에 이르렀을 때 에드먼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곳에는 묵묵히 창을 닦고 있는 사내, 데니스가 있었다.
"데니스."
에드먼드가 부르자, 데니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발치에는 이미 챙겨둔 봇짐이 놓여 있었다
"도련님께서 오실 줄 알았습니다."
"말도 안 꺼냈는데 짐부터 쌌나?"
데니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비대에선 제가 적임자니까요.”
데니스는 담담했다.
가족이 없어 잃을 게 없다는 데니스.
짐을 챙겨 나오면서도 초소 뒤편의 길고양이들에게 남은 빵 부스러기를 탈탈 털어주었다.
루벤은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영지를 순회할수록 루벤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처음 출발할 때의 투덜거림도, 엉뚱한 농담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장부 위의 건조한 숫자 '1'이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라는 생생한 현실로 치환되는 과정.
에드먼드는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슥 훔쳐냈다.
그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한 얼굴로 조랑말의 옆구리를 찼다.
"가자, 다음 마을로."
고개 숙인 루벤은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죽 고삐를 움켜쥔 에드먼드의 손마디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는 사실을.
영지를 순회한 지 이틀째.
명단은 얼추 추려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고민은, 첫 출산을 앞둔 남편을 징집해야 하는가였다.
아이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떠나게 해야 할까.
그 아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며 자랄 수 있을까.
만약 그를 빼면, 이번에는 대장간의 둘째 아들을 차출해야 했다.
농기구 제작이 가장 바쁜 시기였으니 그 또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음 날 아침.
에드먼드는 조용히 그의 집을 찾았다.
그는 터너라는 이름으로, 만삭의 아내를 둔 젊은 남자였다.
좁은 오두막 안은 가난했지만 정갈했다.
깎다 만 나무 조각들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아기 요람이었다.
비록 솜씨는 투박했지만, 모서리마다 사포질을 얼마나 했는지 반질반질 윤이 났다.
식탁 위에는 꿰매다 만 배냇저고리가 놓여 있었다.
"아기 이름은 지었나?"
"딸이면 로즈(Rose), 아들이면… 아직 못 정했습니다."
터너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에드먼드는 차마 요람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미안하네."
짧은 사과가 에드먼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터너는 대답 대신 자신의 집 안을 바라보았다.
식탁 위에는 아기 속싸개가 곱게 접혀 있었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던 끝에,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죠. 장미꽃이 피기 전에는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그의 수락과 함께 명단이 완성되었다.
에드먼드는 마지막 이름을 적어 넣고 펜을 내려놓았다.
사흘을 꼬박 들여 완성한 오십 명의 명단이었다.
병종의 배분부터 물자의 조달, 행군 군량의 상세 소모량까지.
병력을 보존하고 승률을 높일 모든 군사적 계산은 명단과 함께 완성되었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방금, 펜촉 끝으로 평범한 오십 개의 가정의 행복을 담보로 잡았다는 사실을.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닦아내지 못한 검은 잉크 자국이 멍처럼 깊게 배어 있었다.
'반드시 살려서 돌려보내겠다.'
에드먼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숫자의 전쟁은 끝났다.
진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그가 영지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가장 차가운 무기'를 꺼낼 차례였다.
이제 그의 앞에는 보급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