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자들의 축제

<설계자의 전쟁론> 1부 1장 | 제5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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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1장. 출정식

5화. 떠나는 자들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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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BGM

출처 : Youtube_The Riverside Tavern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타닥, 타닥.


마른 장작이 튀어 오르며 붉은 불티가 밤하늘로 흩어졌다.

연회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 사이.


돼지기름이 자글자글 끓는 고소한 내음.

쌉싸름한 에일 향이 눅진하게 얽혀 광장을 가득 채웠다.


“마셔! 내일 멀쩡한 녀석이 있다면 엉덩이를 걷어차 줄 테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류트의 경쾌한 선율에 실려 흘렀다.


춤추는 인파에서 조금 떨어진 곳.

모닥불의 빛이 닿지 않는 광장 구석, 에드먼드가 홀로 서 있었다.


호록.


손에는 술잔 대신 미지근하게 식어가는 허브티.

뜨거운 열기가 코앞까지 밀려왔지만, 그의 눈동자는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


그는 춤추는 병사들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이 흥청거리는 밤은 에드먼드가 그들에게 베푼 마지막 위로이자, 무사히 돌아오라는 간절한 뇌물이었다.


‘이마저도 턱없이 모자란다.’


그의 시선이 광장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인 술통과 통돼지 바비큐로 향했다.

영지민들이 알면 기절초풍할 금액을 들여 마련한, 투박하지만 넘치는 풍요였다.


그는 뻑뻑해진 눈가를 문질렀다.


‘부디 무사히만 돌아와다오.’


에드먼드는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평소엔 향긋하던 허브티가, 오늘따라 유난히 쓰게 감겼다.




징집 명령서가 도착한 지 사흘째.

마침내 일이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에드먼드는 펜 끝의 잉크가 마를 틈도 없이 명단을 써 내려갔다.

인적 사항을 읽어주던 루벤이 문득 말을 끊었다.


“다음은… 어, 제임스 씨 댁 차남. 올해 열여덟이니 징집 대상이고… 엥? 잠깐만. 이 자식, 나랑 동갑이었어? 근데 왜 맨날 형님 소리를 들으려고 했던 거야?”


루벤이 눈을 가늘게 뜨며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잡담할 여유조차 없다는 듯 건조하게 말했다.


“제외해.”


그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덧붙였다.


“닷새 전에 지붕 고치다 발목이 부러졌어. 대신 제재소의 토마스를 넣어. 며칠 전 성년이 됐으니까.”

“엥? 어… 진짜네.”


장부를 확인한 루벤이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다.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레스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괴물 같은 놈.’


에드먼드는 불과 사흘 만에 영지민 수천의 사정을 머릿속에 통째로 집어넣고 있었다.


탁.


마지막 서명을 마친 에드먼드는 펜을 내려놓으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사흘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잔 탓에 머리가 깨질 듯 지끈거렸다.


눈을 붙이는 그 짧은 순간조차, 끌려가야 할 영지민들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후우.”


슬픔은 뒤의 일이었다.

지금 당장은 그들의 마지막 밤을 공포가 아닌 즐거움으로 남겨야 했다.


사지로 떠나는 길에 배라도 든든히 채워 보내는 것.

그것이 징집관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였다.


에드먼드는 마른 펜촉을 다시 잉크병에 깊숙이 담갔다.

망설임 없이 새 양피지 위로 펜을 미끄러뜨렸다.


이번에는 징집 명단이 아닌, 또 하나의 서류였다.




다음 날 아침. 포고문이 영지 전체에 나붙었다.


[내일 밤, 마을 광장에서 연회를 연다. 징집병들과 그 가족들은 반드시 참석하도록]


갑작스러운 연회 소식에 알베릭이 굳은 얼굴로 서고를 찾아왔다.

침착한 표정이었지만 미간에 깊게 팬 주름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에드야.”


그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네 마음은 알겠다. 허나 영지 사정이 그리 넉넉지 않다는 건 너도 알지 않느냐. 너무 무모하다.”


형의 점잖은 타박에 에드먼드는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형님. 혹시, 작년에 납품했던 식초 기억하십니까?”

“식초? 순무주를 만들다 실패한 그거 말이냐? 솜씨 좋은 식초 장인이 알고 보니 너였던 건 알았지만…?”

“그게 어쩌다 보니 굴러서 제법 큰 눈덩이가 되었더군요.”


에드먼드는 말없이 서고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책더미 뒤에 덮어둔 낡은 천을 들춰냈다.


스르륵.


먼지 묻은 리넨이 벗겨지는 순간.

황금빛 섬광이 서고 가득 쏟아져 나왔다.


알베릭은 말을 잃은 채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라비타 금화입니다. 마흔 개 정도 됩니다.”


군마 쉰 필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 서고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알베릭이 충격에 말문을 잃자 에드먼드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작년 여름, 남방이 대홍수에 시달릴 때 식초를 팔아 꽤 큰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대금을 받을 시점에 대규모 은광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은광?”


알베릭이 고개를 갸웃하자, 에드먼드가 짧게 끄덕였다.


“폭락을 두려워한 모두가 은을 쏟아낼 때, 저는 오히려 대금을 은화로 전량 수령했습니다.”


제국이든 서방 연합이든, 화폐 가치 변동으로 손해 보는 쪽에서 시장에 개입할 것이 분명했다.

은화의 가치는 보정될 수 밖에 없었다.


“원래는 은값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라비타 금화의 순도 조작 소문이 터졌지요.”


에드먼드는 금화 하나를 집어 들고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덕분에 은화 가치가 기형적으로 폭등했습니다. 저는 거품이 잔뜩 낀 은화를 시장에 던지고, 대신 바닥까지 떨어진 라비타 금화를 긁어모았습니다.”

“라비타 금화를? 소문이 사실이었다면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지 않으냐.”


알베릭의 우려에 에드먼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금화의 무게와 밀도엔 아무 이상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상업 국가에서 제 발로 무덤을 팔 리도 없었고요.”

“허나 시장의 공포란 게, 이성적으로만 움직이진 않지 않느냐.”

“맞습니다. 공포는 눈과 귀를 멀게 하죠. 그래서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에드먼드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매입한 금화의 절반을 대장간에서 녹였습니다.”

“뭐라고? 일국의 화폐를? 그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중죄다!”


알베릭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에드먼드는 씁쓸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목이 달아나는 것보다 순도를 확인하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허.”


에드먼드는 탁자 위 금화 탑을 바라보았다.


“소문이 가라앉자, 금화 가치는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공포를 견딘 대가로, 거의 네 배에 달하는 이익을 얻었지요.”

“맙소사…”


알베릭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전율을 느꼈다.


“형님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언젠가 영지를 위해 쓰이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드먼드는 금화 서른 개가 든 묵직한 주머니를 건넸다.


“이건 영지 운영에 써주십시오. 나머지 열 개는 병사들 보급에 쓰겠습니다.”


영지의 내실이 탄탄해지면 징집병들의 걱정은 줄 것이다.

그는 굳이 이 사실을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알베릭은 감탄을 넘어선 경외감으로, 에드먼드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네가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별것 아닙니다. 형님.”


알베릭은 말없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토록 유능한 동생을 고작 금화 몇 개 건네며 사지로 내몰아야 한다는 사실.

알베릭은 금화 주머니를 꽉 쥐었다.


“필요한 곳에 잘 쓰마. 허나… 네 목숨을 더 아껴라. 내게 필요한 건 금화가 아니라 내 동생이다.”

“형님…”


서고 창문 너머로 붉은 노을이 흘러내렸다.

멀리 광장에서 장작더미에 불붙이는 소란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제, 떠나는 자들을 위한 축제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마을 광장.


거대한 모닥불이 타오르고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분위기는 밝지 못했다.

병사들과 가족들은 맥주와 고기를 앞에 두고도 선뜻 손을 뻗지 못한 채 쭈뼛거렸다.


송별회라기보다 장례식에 가까운 적막이었다.


그 꼴을 더는 못 보겠다는 듯, 루벤이 류트를 들고 술통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뭐야. 출정도 안 했는데 벌써 겁먹은 거야? 표정들이 왜 다 이 모양이야!”


루벤이 류트를 요란하게 퉁기며 소리쳤다.


“대 코르반의 사나이들이 언제까지 엄마 치맛자락만 잡고 있을 거냐! 제국이든 뭐든 덤벼보라고 해! 나, 코르반 제분소 차남 루벤이 상대해 주마!”

“웃기고 있네! 놈들 숨소리만 들려도 네가 제일 먼저 도망칠걸!”


누군가의 야유에 루벤이 능청스럽게 되받았다.


“멍청하긴. 그건 ‘전략적 후퇴’라고 하는 거다! 자! 대륙의 전설이 될 루벤님께서 한 곡 뽑아주지. 제목은… ‘만인적(萬人敵) 루벤의 위대한 영웅담’이다!”


딩—


경쾌한 류트 선율이 광장에 퍼졌다.

루벤의 익살스러운 가사와 몸짓에 굳어 있던 얼굴들이 하나둘 풀렸다.


“마셔라! 술은 영주님이 쏜다!”


여기저기서 맥주잔 부딪히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광장은 어느새 우울한 송별회가 아니라 떠들썩한 축제로 변모하고 있었다.


광장의 소음이 한풀 꺾인 외곽.


어둠이 내려앉은 자리에 터너가 앉아 있었다.

그는 만삭의 아내 접시에 고기를 잘라 올려주고 있었지만, 아내는 포크를 든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먼드가 조용히 다가가 준비해 온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넸다.


“부인.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터너의 아내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도련님. 고개 드세요.”

“……”

“사실 이 사람도… 좋다고 할 거예요. 평소에 영웅담을 정말 좋아했거든요.”


애써 짓는 미소 뒤로, 눈가에 맺힌 물기가 반짝였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터너가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달리기 하나는 끝내주지 않습니까? 위험하다 싶으면 누구보다 빨리 도망칠 자신 있습니다.”

“그래. 바로 그 마음가짐이다.”


에드먼드는 터너의 어깨를 힘 있게 잡았다.


“명심해라. 우린 싸우러 가는 게 아니다. 버티러 가는 거다. 죽은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 끝까지 도망쳐서라도 살아 돌아오는 놈이 이기는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터너 부부를 짧게 위로하고 광장으로 돌아갔다.


불빛 일렁이는 곳, 가레스가 팔짱을 낀 채 모닥불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흥청망청 마시는 건 좋은데 뒷감당이 걱정이군. 군비라는 게 원래 돈 잡아먹는 괴물이 아닌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따로 챙겨둔 자금이 있습니다.”


에드먼드는 춤추며 웃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 하나하나를 잊지 않겠다는 듯 눈에 새겼다.


축제는 더 깊은 밤으로 흘러가며 절정에 치달았다.


말수가 적은 데니스는 구석에서 묵묵히 고기를 굽고 있었다.

그는 냄새를 맡고 다가온 길고양이를 보더니, 주위를 살핀 뒤 고기 한 점을 조용히 던져주었다.


술기운이 오른 가레스는 어느새 마을의 가장 인기 있는 처녀, 엘리에게 다가가 있었다.

엘리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가레스는 붉어진 얼굴로 쭈뼛거리며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평화롭고, 따스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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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에드먼드의 눈에는 문득 쓸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 웃음소리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타닥, 타닥.


마른 장작이 튀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날카롭게 때렸다.

순간, 평화로운 모닥불이 눈앞에서 붉은 화마로 일그러졌다.


장작이 무너지는 소리가, 불붙은 망루가 쓰러질 때의 굉음처럼 들려왔다.


‘피해…!’


비명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그때.


누군가의 손이 그의 팔을 낚아챘다. 현실의 악력이 악몽을 산산이 찢어냈다.


“도련님이 여기서 청승 떨고 계시면 섭섭하죠! 저기 촌장님 딸이 목이 빠지라 도련님만 기다린다고요!”


루벤이었다.

익살스러운 목소리에 불타던 망루의 잔상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봐, 루벤. 잠깐.”

“잠깐 같은 건 없어요. 밤은 짧다니까요!”


루벤에게 이끌려, 에드먼드는 불빛이 춤추는 모닥불 중앙으로 떠밀려갔다.


와아아!


환호성이 터지고, 뜨거운 열기가 식어 있던 그의 몸을 감싸 올랐다.

에드먼드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사람들의 투박한 춤사위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밤하늘로 날아오르는 불티. 어지러이 흔들리는 그림자.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그 누구도 죽지 않는 밤이었다.


‘축제는 오늘로 끝이다.’


인사와 자금의 설계는 끝났다.

남은 것은 병사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것뿐.


에드먼드는 미리 속으로 그들에게 사과했다.


‘모두 미안하다. 부디 죽지 마라.’


가레스가 부탁한 흉악한 물푸레나무 몽둥이는 곧 완성될 터였다.


지옥문은 병사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