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의 끝

<설계자의 전쟁론> 1부 1장 | 제6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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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1장. 출정식

6화. 소풍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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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BGM

출처 : Youtube_The Riverside Tavern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성화력 1015년 3월 20일.


축제가 끝난 다음날 아침.

코르반 남작령의 햇살은 잔인할 만큼 화창했다.


코르반 성을 향하는 징집병들의 얼굴에는 비장함 대신 기이한 낙천성만이 떠올라 있었다.


"마누라가 도시락을 싸 주는데, 꼭 소풍 가는 기분이더라고."


그들은 평생 영지 밖을 나가본 적 없는 이들이었다.

이번 출정은 생애 첫 여행이나 다름없었다.


"거기 가면 도시 구경도 좀 할 수 있으려나?"

"옆 영지 처자들도 볼 수 있겠지."


그들의 마음속엔 긴장감 대신 숙취가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희희낙락한 목소리들.

개 짖는 소리.

그리고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배웅까지.


나른하고 평화로운 아침의 공기.


그 나들이 같은 들뜸은, 연병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단숨에 산산조각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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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연병장 바닥이 꺼져 나가는 듯한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왁자지껄하던 수다가 단번에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먼지구름 사이로 도깨비 같은 눈을 부라린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그가 바닥에 내리꽂은 것은 사람 키만 한 육중한 목봉(木棒)이었다.

두터운 갬비슨 위, 낡았지만 잘 손질된 판금들이 얹혀 있었다.


이번 징집 부대의 훈련 교관.

‘바람골 여관’의 주인장 가레스 발로르였다.


"어디 실실 웃으면서 엉덩이 빼고 걸어 다니나. 집결해라!"


천둥 같은 호통이 연병장을 가르며 터졌다.

그가 쥔 몽둥이는 공성 망치 자루를 뜯어 온 듯 흉악한 모습이었다.


그 옆에는 에드먼드가 서 있었다.

차림새는 어딘가 어색했다.

형 알베릭의 갑옷을 빌려 입은 탓이었다.


“……”


견갑은 축 처져 어깨를 짓눌렀다.

가죽 허리띠는 송곳으로 구멍을 새로 뚫어 가장 안쪽에 간신히 채워져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롱소드 또한 전장의 물건이 아니었다.

날을 세우기보다 기름칠해 광을 낸, 대대로 작위 서품식에서 쓰이던 의전용 검이었다.


"빨리 안 움직여!"


가레스의 호통에 징집병들이 그제야 화들짝 놀라 우왕좌왕 몰려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군대라기보다는 소풍 줄을 서는 시골 아이들 같은 모습이었다.


한쪽에서 구경하던 경비대원들 사이에서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련님 갑옷이 왜 저래?"

"저거 대리 영주님 갑옷 아니야? 형님 옷 훔쳐 입은 동생 같다."

"대리의 대리 나으리."


조용한 비아냥.


긴장이 풀린 연병장 공기를 타고 킥킥거리는 웃음이 순식간에 전염병처럼 번졌다.


가레스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듣지 못한 척,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담담하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주목!"


가레스가 대신 고함을 질렀다.


"코르반 경께서 훈련 전에 한말씀하시겠다! 입 닥치고 귀 열어라!"


왁자지껄하던 시선들이 에드먼드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은 경외와는 거리가 멀었다.


5년 전 마레움 성채에서 무훈을 세웠다는 소문은 있었다.

정작 영지민들이 기억하는 에드먼드는 뗏목을 타고 다니는 한량의 모습뿐이었다.


에드먼드는 짧게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에드먼드 코르반이다. 형님 알베릭 남작 대리를 대신해, 내가 너희를 지휘한다."


호기심.

지루함.

노골적인 무시가 뒤섞인 눈빛들.


그 시선을 마주한 에드먼드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먼저,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너희는 코르반 영지의 대표다. 어디서든 그 이름을 가볍게 만들 행동은 하지 말아라."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낮게 깔린 저음에는 좌중을 압도하는 납덩이같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웃음기 돌던 연병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군율은 엄격하다. 이를 어기는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태형으로 다스린다. 훈련 기간 동안 가레스 교관의 지시에 절대복종해라."


에드먼드는 징집병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이 훈련이 곧, 너희의 생과 사를 가를 것이다."


모두 숨이 멎었다.

팔짱 끼고 낄낄대던 경비대원들조차 입을 다물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


어수선하던 웅성거림이 죽은 듯 잦아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가레스의 불호령이 천둥처럼 떨어졌다.


"전원! 연병장 열 바퀴! 선착순 열 명 외엔 점심 없다. 뛰어!"


우당탕탕.


비명과 함께 흙먼지가 솟구쳤다.

바야흐로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훈련 5일 차.


징집병들의 얼굴에 남은 건 퀭한 당혹감과 피로.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바락바락 피어오른 독기뿐이었다.


"우웩!"


대열 한가운데서 누군가 헛구역질과 함께 위액을 쏟아냈다.

하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죽는다.


그간 가레스의 물푸레나무 몽둥이가 가르쳐준 악몽같은 가르침이었다.


"똑바로 안 뛰어? 다리가 꼬이면 목숨도 꼬인다!"


가레스의 고함이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징집병들이 예상한 훈련은 기껏해야 창 잡는 법이나 조금 배우는 정도였다.

어느 전장에서나 징집병은 머릿수나 채우다 오는 존재였다.


그러나 에드먼드와 가레스는 그들을 정규군, 아니 그 이상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첫날은 폐가 찢어질 때까지 구보.


이튿날은 발바닥 물집이 터져 피가 배어 나올 때까지 제식 보행.


사흘째부터는 몽둥이찜질을 견디며 대기병 방진(方陣)을 짰다.


거대한 말발굽이 코앞까지 닥친 공포를 이겨내고 끝까지 창을 뻗는 훈련이었다.


그 수다쟁이 루벤조차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의 입술은 바싹 말라 거친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허억, 헉… 전쟁터 가기도 전에… 여기서 객사하겠네."

"차라리… 밭을 갈래. 거기가 천국이었어…"


옆에서 뛰던 터너가 퀭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창을 집어 던지고 탈영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옥도.

하지만 병사들이 이 끔찍한 고통을 악착같이 버텨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훈련 5일 차 저녁.


땀과 먼지에 전신이 범벅된 병사들이 네 발로 기어오다시피 식당에 들어섰을 때, 코끝을 찌르는 기막힌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이 냄새는…?"


거대한 솥뚜껑이 열리자 자욱한 흰 김과 함께 진한 고기 냄새가 폭발하듯 식당을 가득 메웠다.

투박하게 썬 감자와 당근, 양파가 듬뿍 들어가 뭉근히 끓고 있는 닭 스튜였다.


"세상에… 오늘도 고기야?"


배식받은 그릇을 내려다보는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엔 어른 주먹만 한 닭 반 마리가 통째로 올려져 있었다.

옆에는 김 모락모락 나는 갓 구운 빵과 두툼한 버터까지 놓여 있었다.


평소 고기라고 해 봐야 축제 때, 또는 운 좋게 잡은 산토끼가 전부였다.

그런 그들에게 이 식단은 왕후장상의 식탁이나 다름없었다.


징집병 하나가 닭 다리를 뜯으며 울먹이듯 중얼거렸다.


"제기랄… 우리 집 제사상보다 훨씬 잘 나오네."

"도련님이 미친 게 분명해. 아니면 우릴 내다 팔려고 살찌우는 거 아냐?"

"재수 없는 소리 말고 먹기나 해! 이 국물 좀 봐. 이건 그냥 밥이 아니라 약이다, 약."


그들은 킬킬대면서도 허겁지겁 그릇을 비웠다.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닭고기와 달큼한 스튜.

따뜻한 포만감이 위장을 가득 채웠다.


'대리의 대리 나리는 적어도 우리를 굶겨 죽이진 않겠구나.'


식사 한 끼마다 에드먼드의 분명한 뜻이 담겨 있었다.


잘 먹어야 잘 싸운다.


그 철학은 그렇게 굶주린 징집병들의 충성심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리고 있었다.




물론 밥을 잘 먹는다고 훈련이 편해질 리는 없었다.


가레스는 징집병 중 어깨가 떡 벌어지고 팔뚝이 굵은 열 명을 골라냈다.

궁병대였다.


딱 한 명, 루벤만은 예외였다.


그는 선이 가는 체형이었다.

하지만 자기 몸통만 한 ‘사연 있는’ 활을 죽어도 놓치지 않겠다고 버텼기 때문이었다.


"이건 제 영혼이라고요! 다른 놈 손에 들리면 활이 울어요!”


가레스는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찼지만, 녀석의 고집을 꺾는 대신 궁수 대열에 끼워 주었다.


과녁 정중앙을 꿰뚫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화살을 적의 머리 위로 쏘아 올릴 근력만 있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그 기초조차 만만치 않았다.

전투용 장궁의 장력은 토끼 잡던 사냥용 활과는 차원이 달랐다.


"끄으읍…!"


루벤의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힘을 줬지만 활시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팔은 사시나무 떨듯 부들거렸다.


"아니, 옛날이야기 보면 활쟁이는 다 가녀린 여자나 엘프인데, 이게 말이 돼요? 사람 힘으로 어떻게 당겨요!"


루벤은 홧김에 활을 내팽개치려다, 다시 품에 꼭 안았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곰 잡으라고 만든 거라니까요."

"비켜라. 비실거리긴."


가레스가 활을 낚아채며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는 활을 가볍게 움켜쥔 뒤 호흡을 한 번 골랐다.


굵은 팔뚝 위로 핏줄이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솟아올랐다.

리넨 셔츠가 팽팽히 당겨지며 비명을 질렀다.


끼리릭.


루벤이 온몸을 실어도 움직이지 않던 시위가, 가레스의 손아귀 아래서 귀 뒤까지 팽팽하게 젖혀졌다.


"활은 팔 힘으로 당기는 게 아니다. 등 근육, 그리고 적을 죽이겠다는 살기(殺氣)로 당기는 거지."


텅!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화살이 시야에서 증발했다.


퍽.


이십 보 밖, 허수아비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촉을 뺀 뭉툭한 연습용 화살이 뒤쪽 나무 기둥에 깊숙이 박혀 부르르 떨었다.


"히익…"


루벤과 징집병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얼어붙었다.

그 위력은 무기라기보다 소형 공성 병기에 가까웠다.


"봤지? 다시 해 봐."

"아니, 뭘 어째라고요? 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루벤의 울상에도 가레스는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병사들의 활쏘기 자세를 고쳐주던 가레스의 시선이 문득 텅 빈 연병장 입구로 향했다.


첫날 훈시 이후.

에드먼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징집병들 사이에서는 "도련님도 힘들어서 꽁무니 뺀 거 아니냐?" 하는 수군거림이 돌고 있었다.


하지만 가레스는 알고 있었다.

그 독한 놈이 편하게 쉬고 있을 리 없다는 것을.


"근데, 도련님은 왜 안 보여요?"


루벤이 눈치 없이 깐죽거리며 물었다.

가레스는 대답 대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지휘관이 일일이 너 같은 잔챙이한테 보고하고 다녀야겠냐? 저기 저 나무 찍고 온다. 실시."

"에잇, 제에기랄.....!"


루벤이 비명을 지르며 흙먼지 속으로 달려갔다.


가레스는 멀리 내성 쪽을 바라보며 작게 혀를 찼다.

저 멀리, 영주의 집무실 등불은 며칠째 꺼지지 않고 있었다.


'뭐든 알아서 잘할 놈이니까.'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는 늘 보통 사람 이상을 해내는 남자였다.


가레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징집병들이 소집되기 며칠 전 밤.

에드먼드가 자신을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살려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죽기 직전까지 굴려주셔도 좋습니다.’


가레스는 짐짓 난색을 보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었다.

물푸레나무로 깎아 만든, 아주 단단하고 튼튼한 목봉 하나를 준비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가레스는 에드먼드의 당부 이상으로 놈들을 들들 볶아대고 있었다.


가히 천직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기세였다.


“동작 봐라! 어쭈, 걸음마 하냐? 밥 먹은 값은 해야 할 거 아냐!”


가레스의 날 선 호통과 징집병들의 처절한 비명.

그 절묘한 소란이 연병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바로 그 시각.


에드먼드는 홀로 등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쥔 것은 날카로운 검이 아닌, 낡은 펜대였다.


병사들을 맨몸으로 사지에 밀어 넣지 않기 위해 그가 선택한 싸움.

그것은 어떤 전투보다 고독하고 치열한, 보급의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