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전쟁

<설계자의 전쟁론> 1부 1장 | 제7화

by 밍당

✿《<설계자의 전쟁론> 1화 보기》



<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1장. 출정식

7화. 보이지 않는 전쟁


1-1-0.png
file_0000000074407206a67a464afd88d3d5(1).png



추천BGM

출처 : Youtube_The Riverside Tavern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훈련 10일 차.


연병장은 가레스의 거친 고함과 징집병들의 비명으로 뒤섞인 아수라장이었다.


“빨리빨리 안 뛰냐! 산책 나왔어? 오냐, 소풍 바구니라도 들려줘야 하나? 뛰어!”


병사들은 입에 거품을 물면서도 발을 멈출 수 없었다.


모든 훈련을 함께 소화하면서도 전혀 지친 기색이 없는 괴물.


잠시라도 우물쭈물하는 순간.

묵직한 발차기와 귀가 따갑도록 쏟아지는 호통이 그들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자연스럽게 병사들의 불만은 눈앞의 도깨비 교관이 아닌, 보이지 않는 지휘관을 향했다.


“근데, 도련님은 대체 어디 가신 거야?”


잠시 틈을 타 물을 들이켜던 루벤이 씩씩거리며 내뱉었다.


“첫날에 그렇게 잰 체하시더니 그림자도 안 보이잖아. 우리는 여기서 뒤지게 구르고 있는데!”


주변 병사들도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그 시간.

에드먼드는 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곳에 서 있었다.


“거기, 이랑을 좀 더 깊게 파. 그래야 뿌리를 깊게 내린다.”


영지 외곽의 드넓은 밀밭.

에드먼드는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더미 한복판에 서 있었다.


가죽 장화는 이미 진창 범벅이 되었다.

단정하던 잿빛 머리카락은 땀과 흙먼지로 떡이 져 엉망이었다.


“도, 도련님. 이쪽은 저희가 할 테니 제발 좀 쉬십시오.”


시종장이 안쓰러움에 못 이겨 그를 말렸지만, 에드먼드는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없다. 이제 이틀 안에 파종을 끝내야 해.”


징집령으로 영지의 젊은 장정 50명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일 년 중 가장 고되다는 파종기에 발생하는 이 공백은 치명적이었다.

이대로 시기를 놓치면 가을 수확량을 장담할 수 없다.


에드먼드는 훈련이 시작됨과 동시에 망설임 없이 성내의 모든 인력을 끌고 나왔다.


시종, 마구간지기, 요리사, 그리고 영주 대리인 자신까지.

사실상 형님 알베릭 코르반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극도의 효율성 아래 순환근무에 투입되었다.


‘병사들이 뒤를 돌아보게 해선 안 된다.’


전장에 나간 병사가 고향의 처자식 끼니를 걱정하는 순간, 그 군대의 사기는 밑바닥으로 추락한다.


에드먼드는 흙투성이 손으로 호미를 다시 고쳐 쥐었다.


밭고랑은 길게 패여 있었다.

봄바람은 이미 에드먼드의 뺨을 식히고 있었다.




파종이 얼추 마무리되자, 에드먼드는 곧바로 말을 달려 인근의 무역 도시들로 향했다.

이번 전쟁터는 시장 바닥이었다.


“예? 가죽 한 장에 은화 두 닢?”


어느 상단 접견실.

상인은 에드먼드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배짱이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코르반… 에서 오셨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요새 시세를 모르시나 본데, 기브라임 전역에 징집령이 떨어져서 무구 값이 천정부지입니다. 그 가격엔 못 드립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은 이름이었지만 어쨌거나 상단의 활동처는 아니었다.

상인은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건 황량한 북부 대지의 산악지대에서만 잡히는 사슴 가죽입니다. 마르셀의 물렁한 놈들이랑은 결이 달라요. 은화 네 개. 더는 못 해 드립니다.”


에드먼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빙긋 웃으며 가죽 원단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이거, 북부의 가죽이 아니군요.”

“…뭐요?”


에드먼드는 가죽의 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에녹에서 가공한 가죽은 무두질할 때 특유의 송진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이건 남부의 무두질 기법이군요. 습지의 가죽은 금방 곰팡이가 슬죠. 전장에서 한 번 쓰고 버릴 거라면 모를까, 비싸게 주고 사기엔 좀 그렇군요.”


상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다시 건네받은 가죽을 뒤집어보며 살폈지만 도통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에드먼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아무리 물가가 올랐다 하더라도 은화 두 닢이면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그렇게 갑시다.”

“아니, 그래도 운송비가 있는데.”


평소 판매가보다는 배는 더 쳐준 금액이었다.


하지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것이 상인의 기본 마음가짐.

상인은 입맛을 다시며 운송비를 들먹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에드먼드는 상점 한구석에 조용히 쌓여 있는 오크통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량의 브랜디가 보관 중이었다.

사과의 향내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에드먼드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 브랜디들을 전량 매입하겠습니다.”

“아니… 뭐,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표정을 감추어야 할 상인의 얼굴이 드물게 밝아졌다.


주변 귀족들을 상대로 판매할 예정이었던 브랜디였건만 갑작스러운 징집령으로 수요가 급감했다.

전장에 나서야 할 귀족들이 독주로 해롱거릴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


게다가 서민들은 비싼 독주보다는 맥주를 즐겨 마셨다.

그러니 판로가 없어 악성 재고가 될 판이었다.


“물론 저로서도 괜찮은 거래입니다. 전시에 독주(毒酒)는 쓸 일이 많으니까요.”


비단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응급 시 소독을 위해 쓸 수도 있었고, 하다못해 전장의 유용한 화폐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에드먼드는 망설임 없이 브랜디 매입을 제시했다.

상인의 눈이 경탄으로 번뜩였다.


“훌륭한 상인이시군요.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코르반, 이 이름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상인이 에드먼드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상대의 약점을 잡아 손목을 비틀어 빼앗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며 완벽한 아군을 만드는 것.

상대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면서도 확실한 실익을 챙기는 이 방식이야말로 에드먼드의 거래였다.


흥정과 제안, 거절과 서명이 날마다 장부에 쌓였다.


때로는 능청스럽게,

때로는 깐깐하게.


며칠 뒤.

코르반 영지의 창고에는 질 좋은 가죽과 보존식, 말린 약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하지만 에드먼드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기초 보급품은 확보했다.

정작 병사들의 목숨을 지켜줄 핵심 무구를 맞출 예산이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고민은 깊어졌다.




깊은 밤, 내성 서고.

에드먼드는 촛불 아래서 장부와 씨름하고 있었다.


“부족하군…”


아무리 숫자를 쥐어짜도 마른 수건에서 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병기창에 처박혀 있던 녹슨 창과 낡아빠진 리넨 갑옷을 입혀 보내야 했다.


그마저도 수량은 극히 적었다.


“후.”


전시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비용 지출이 너무 컸다.

생각했던 예산을 아득히 초과한 상황.


품질이 좋으면 병사를 덜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벌어진 예산 참사였다.

지금 후회한들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었다.


끼익.


육중한 서고 문이 열리더니 알베릭이 들어왔다.

평소와 같은 인자하고도 근엄한 표정이었지만, 손에는 무언가를 꽉 쥐고 있었다.


손이 하얘질 정도로.


“형님,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여기 불이 꺼지질 않는데, 내가 어찌 잠이 오겠느냐.”


알베릭은 퀭한 동생의 눈 밑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와 탁자 위에 주먹을 폈다.


달그락.


묵직한 금속음과 함께 황금빛 물건이 떨어졌다.

정교하게 세공된 사자 문양의 훈장.


에드먼드의 눈이 커졌다.


“이건….”


선대 남작, 부친이 마레움 전투에서 국왕을 지켜낸 공로로 하사받은 ‘왕실 수호 훈장’이었다.


코르반 가문의 명예이자, 영지의 자존심 그 자체인 물건.


사자 문양의 눈에 박힌 작은 보석이 오늘따라 더 영롱하게 반짝였다.


“형님, 이건 안 됩니다. 아버지가 남기신 가문의 긍지입니다.”

“안다.”


알베릭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낡은 명예가 내 동생과 영지민들보다 중할 수는 없다.”


만류하는 에드먼드의 목소리에도 알베릭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걸 팔아라. 팔아서, 그들에게 좋은 갑옷과 무기를 입혀라. 그게 아버지가 남긴 유지를 진정으로 잇는 길이다.”


알베릭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꾸만 시선이 훈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인자한 눈매에는 단호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ChatGPT Image 2026년 1월 31일 오전 04_49_00.png


에드먼드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황금 훈장을 집어 들었다.


묵직했다.


그것은 단순한 황금의 무게가 아니었다.

형의 사랑과 지켜야 할 생명들의 무게였다.


이 훈장이 팔려나가기 전날.


에드먼드는 훈장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마치 그날의 감정을 잊지 않으려는 듯.




출정 사흘 전.

연병장에 집결한 징집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뭡니까?”


단상 위에는 번쩍이는 새 장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안쪽에 두툼한 양털을 덧대 충격을 흡수하도록 개조된 방패.

행군 피로를 덜어줄 밑창 보강 전투화.

그리고 몸에 딱 맞게 수선된 가죽 갑옷까지.


시골 영지의 징집병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최고급 장비들이었다.

그동안 에드먼드를 흉보던 병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련님…”


루벤이 우물쭈물 에드먼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에드먼드는 손을 슬쩍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징집병들의 눈빛도 루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 다음은 궁병대!”


가레스의 호명에 궁수로 선발된 열 명이 앞으로 나왔다.

에드먼드는 그들에게 한 무더기의 활을 지급했다.


기름을 먹여 반질반질한 몸체, 탄력이 살아있는 시위.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전투용 장궁이었다.


“우와아…!”


활을 받아 든 병사들이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루벤만이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에게는 새 활이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도련님!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루벤이 입을 비죽이며 항의했다.


“저 친구들은 저런 삐까번쩍한 새 활을 주면서, 왜 저는 안 줍니까? 제 활은 먼지투성이란 말이에요!”


루벤은 자신이 은화 스무 개나 주고 샀던 활을 흔들어댔다.


그의 눈엔 그저 여행자에게 잔뜩 뒤통수 맞은, 활시위를 당기기도 버거운 애물단지로만 보일 뿐이었다.


가레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 아둔한 녀석아. 이것들은 단일궁이다. 하지만 네 손에 들린 건 물소 뿔과 힘줄로 만든 복합궁이란 말이다. 이거 열 자루도 네 거랑은 안 바꾼다.”

“…엥?”


루벤의 눈이 동그라졌다. 가레스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이건 바위도 뚫을 진짜배기다. 멍청한 주인을 잘못 만난 거지.”

“진짜?”

“내가 뭣 하러 거짓말을 하나. 다만 주인이란 놈이 비실거려서 시위도 못 당기는 게 문제지.”


가레스의 빈정거림에도 루벤은 드물게 반응하지 않았다.

세상 즐거운 표정을 짓는 루벤.


그는 꼬질꼬질한 활을 옷소매로 벅벅 닦았다.

그리곤 세상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품에 안았다.


“아이구, 우리 봅학궁아. 내가 몰라봤구나. 미안 미안.”

“’복합궁이다, 이 녀석아.”

“아, 뭐 그렇다고 쳐요. 히히.”


루벤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활시위를 튕겼다.

드디어 진정한 전우가 생겼다는 것처럼 신나 하는 루벤의 모습.


그걸 지켜보던 에드먼드의 입가에는 오랜만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후우.”


하지만 그의 미소는 길지 않았다.

그는 환호하는 병사들 너머 붉게 물들어가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준비는 이것으로 끝났다.'


출정까지 남은 시간은 단 하루.

에드먼드는 환호하는 병사들 너머, 붉게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이제 두 번 다시는, 이 평화로운 풍경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