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1장 | 제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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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봄바람이 대지의 녹음을 불러일으켰다.
망아지가 초원을 뛰어노는 창생의 계절.
코르반 성의 연병장에는 신음 섞인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드디어… 끝이다!”
“우오오오!”
만신창이가 된 병사들은 모두 자리에 주저앉아 넋을 잃었다.
마침내 가열찼던 훈련이 끝난 것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에드먼드는 징집병들에게 하루짜리 특별 휴가를 내렸다.
출정 전날.
가족들과 작별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병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연병장에는 무거운 적막과 애틋한 온기가 동시에 감돌았다.
마을 어귀, 터너의 오두막.
터너는 만삭인 아내의 배에 귀를 대고 있었다.
아내는 터너의 거친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그저 뱃속의 태동만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다녀올게, 아가야.”
“으흑.”
터너는 투박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안았다.
연병장 구석, 텅 빈 막사 뒤편.
데니스는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훈련 내내 짬밥을 얻어먹던 길고양이 서너 마리가 모여 있었다.
데니스는 아껴둔 육포 조각을 잘게 찢어 녀석들에게 던져주었다.
“많이 먹어둬라. 당분간은 챙겨줄 사람 없을 테니까.”
녀석들은 야옹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핥았다.
그에게는 이 작은 짐승들이 배웅해 줄 유일한 가족이었다.
제분소의 풍경은 조금 더 소란스러웠다.
루벤의 어머니는 아들의 가슴팍을 치며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이 썩을 놈아, 기어이 거길 가야겠냐! 밥이나 제때 챙겨 먹겠어?”
“아, 엄마! 걱정 말라니까! 이 루벤 님이 활 잡은 거 못 봤어? 내가 다 쓸어버리고 사두마차 타고 돌아올 거라고!”
루벤은 어머니를 달래며 잔뜩 허세를 부렸지만, 정작 그의 눈시울도 그렁그렁하게 젖어 있었다.
그 뒤편.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루벤의 아버지는 말없이 창고를 오가고 있었다.
“……”
그의 손에는 곱게 빻은 밀가루 포대와 말린 과일이 들려 있었다.
아들의 군장이 터지도록 쟁여 넣는 그 투박한 손길은 말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골 여관.
가레스는 평소의 호랑이 같은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거대한 곰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앞에는 축제에서 연을 쌓은 엘리가 서 있었다.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가레스의 굵은 목에 은색 펜던트를 걸어주었다.
“성화의 불꽃이 새겨진 목걸이예요. 이게 당신을 지켜줄 거예요.”
“엘리…”
가레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투박한 손이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가레스는 와락, 엘리를 껴안았다.
그의 거대한 품 안에서 엘리의 몸이 바스러질 듯 안겼다.
곰 같은 사내의 다부진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
에드먼드는 집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퀭한 눈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책상 위에는 보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징집병 훈련 최종 평가서 - 작성자: 가레스 발로르]
[보급품 수급 현황 및 개인별 지급 완료 보고]
[브로바렌 평원까지의 예상 경로 및 야영지 분석]
에드먼드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숫자 하나, 문장 하나를 꼼꼼히 씹어 삼키듯 확인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니, 완벽해야만 했다.
“후우.”
에드먼드는 펜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잠깐의 휴식.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허브티를 한 모금 마셨다.
채광창 너머 어둠에 잠긴 영지를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내려앉은 밤.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정겨운 코르반의 밤이었다.
지난 한 달.
그가 사랑하던 영지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운 시간들이었다.
‘살려서 돌아오겠다.’
어느새 창밖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긴 밤이 지나고, 마침내 동이 텄다.
이제,
지휘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마음은 가라앉았다.
영주 대리 알베릭 코르반은 검집에 꽂힌 롱소드를 왼손에 들었다.
짧은 헛기침.
그리고 연병장에 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출병의 날.
성화력 1015년 4월 15일.
에드먼드와 가레스, 그리고 오십 명의 징집병들이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
바람조차 쉽게 스치지 못할 만큼 팽팽한 정적이 감돌았다.
연병장 둘레에는 성으로 올 수 있는 영지민들이 죄다 몰려 있었다.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며, 누군가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이 장면을 보여주려 애썼다.
이야기에서만 들어왔던 영웅들의 출정이 눈앞에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징집병들은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는 얼굴을 찾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잠깐 웃음이 스쳤다.
달포 남짓한 시간.
그들의 눈빛은 놀랄 만큼 매서워져 있었다.
가레스의 훈련이 어떤 것이었는지,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알베릭이 입을 열었다.
“모두, 고된 훈련에 수고 많았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몸 건강히, 잘 다녀오길 바란다.”
징집병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였다.
알베릭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옮겨갔다.
에드먼드였다.
기쁨과 걱정, 미안함과 자부심이 짧은 순간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눈시울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알베릭은 검집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롱소드를 내밀었다.
“에드. 무사히 잘 다녀오려무나. 이건 너에게 맡기마.”
에드먼드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눈가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는 형이 건네는 검을 두 손으로 받았다.
“알겠습니다. 형님도 건강 조심하십시오.”
“음.”
짧은 대화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 더 붙일 말은 없었다.
알베릭이 한 걸음 물러났다.
에드먼드는 돌아서서 징집병들을 향해 섰다.
그를 향한 병사들의 눈빛은 ‘대리의 대리’에게 향하던 가벼운 시선이 아니었다.
묵직한 시선들이 교차했다.
에드먼드는 짧게 헛기침했다. 그러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건… 너희들이 무좀이라도 걸리는게 아닐까 하는 거다.”
징집병들 사이로 킥킥거리는 웃음이 번졌다.
웃음이 가라앉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발을 다치면 행군도, 전투도 끝이다. 그러니 발을 잘 관리해라. 특히.”
그의 시선이 한 명에게 멈췄다.
잘 익은 밀알 같은 갈색 꽁지머리의 청년, 루벤이었다.
그는 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리둥절했다.
“예? 저요?”
“그래. 너는 발 좀 잘 씻고 다녀라. 냄새가 지독하더라.”
연병장 전체가 와르르 웃음바다가 되었다.
루벤은 억울하다는 듯 손을 휘저었지만 에드먼드는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출정 전, 잔뜩 긴장한 병사들의 어깨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
에드먼드는 조용히 병사들을 훑어보았다.
엉성하게 엮은 천투구.
리넨을 덧대어 기워 올린 갑옷.
흔해 빠진 가죽 장갑을 낀 손마다 쥐어진 창.
겉보기에는 변변치 않은 징집병 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대신 꾸려 준 군대가 아니었다.
밭을 비우고,
집을 비우고,
서로의 삶을 내어주며.
에드먼드와 영지민들이 모두 함께 만들어 낸 군대였다.
“후우.”
에드먼드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바람마저 숨을 죽였다.
연병장에는 팽팽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는 허리춤의 롱소드를 천천히, 아주 신중하게 뽑아 올렸다.
스릉.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요를 갈랐다.
단 한 번도 피를 머금어 본 적 없는 기름칠 된 의전용 검신 위로, 잔인할 만큼 화창한 봄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 찰나.
평범한 쇠붙이에 불과했던 검이 하얗게 타올랐다.
모두의 눈동자 속에 그 빛이 박혔다.
그들에게 그 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사지로 향하는 그들이 믿고 따라야 할 유일한 이정표였다.
마치, 전설 속 성검(聖劍)처럼 눈부신 진격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검 끝이 하늘을 향했다.
에드먼드는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흔들림 없는 일갈을 토해냈다.
“전군, 출정한다. 브로바렌 평원으로!”
응축되었던 공기가 폭발했다.
“와아아아!”
함성이 성내를 울렸다.
병사들은 발밑의 창을 쿵쿵 내리찍으며 목이 터지라 소리쳤다.
영지민들은 눈물 섞인 환호와 함께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쳐다보는 이들 누구도, 이 모습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작고 용맹한 코르반 남작령의 군대는 브로바렌 집결지를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가득 실린 보급 수레들과, 사랑하는 이들의 마지막 시선과 함께.
에드먼드의 출정 함성이 멀어지던 그 시간.
셀레스티움 제국의 제3 영빈관.
외교 사절을 맞이한다는 명분으로 지어졌지만, 그곳에 환영의 온기 같은 것은 없었다.
제국의 위상을 과시하듯 벽면을 가득 메운 거대한 부조(浮彫)들은 위압적이다 못해 폭력적이었다.
사람을 맞이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방문객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짓누르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
하지만 그 영빈관의 가장 깊은 곳, 특별실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속닥속닥.
고래기름으로 만든 촛불은 이미 오래전에 꺼져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방 안.
그림자가 향기처럼 길게 늘어진 그곳에서 두 남녀가 은밀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둠조차 지우지 못한 유려한 곡선.
여인의 긴 머리카락 사이로 간헐적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옆에는 밤 갈색 머리를 단정히 넘긴 수려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야윈 듯하지만 다부진 체격, 진한 눈썹.
두 사람은 동방 제국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깃털 방석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 이벨린. 라비나르 자치령에서 벌어들인 상단의 수익이 어마어마하다고?”
“과장이에요, 라이너. 그저 손해는 안 본 정도랍니다.”
이벨린은 고혹스러운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쓸어 넘겼다.
그 모습에 라이너는 킥킥 웃음을 흘렸다.
“죽음의 상인다운 발상이었어. 루크레티나의 진압군이 자치령을 초토화할 걸 어떻게 알았지?”
“간단해요. 그녀가 되어보는 거죠.”
이벨린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허공에 뻗었다.
그러고는 작은 줄을 그었다.
마치 이름을 지우는 것처럼.
탐스러운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질서와 효율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그녀예요. 답은 뻔하죠.”
“그런가? 악녀끼리는 통하는 게 있나 보군.”
라이너의 조롱 섞인 웃음에 이벨린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극비에 루크레티나의 파병 결정을 입수한 그녀는 지체 없이 라비나르의 약재를 전량 매집했다.
피로 물든 자치령.
모라 상단은 땅에 흩뿌려진 핏자국마다 거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런 건 사소한 거죠. 문제는…”
그녀의 손엔 보고서 한 장이 쥐어있었다.
마르셀 왕국 남쪽의 항구도시, 세렌타에서 날아온 기묘한 소식이었다.
경쟁 상단인 ‘단치’에서 라비타의 금화 순도 저하 소문을 이용해 막대한 환차익을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더 묘한 것은, 그 흑막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제법 기개 있는 자가 변방에 있었군요.”
이벨린의 눈이 빠르게 보고서를 훑었다. 끝에 있는 이름이 눈에 걸렸다.
“에드먼드… 코르반.”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라이너의 반문.
이벨린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이름.
“아.”
이내 작은 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입가엔 미소가 가득 고였다.
“마레움의 새앙쥐였네. 후후.”
5년 전.
붕괴 직전의 서방군을 제국군의 아가리에서 빼낸 젊은 영웅.
덕분에 제국의 전선은 고착화 되었고, 그녀의 주머니는 찢어질 만큼 금화로 가득 찼었다.
“아, 어쩌면 좋아… 너무 즐거운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영빈관을 가득 메웠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이벨린의 웃음소리에 라이너는 혀를 내둘렀다.
“무서운 여자군.”
“네? 전혀요. 전 이렇게나 여리답니다.”
부드러운 살결.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
나른하게 굽이치는 곡선.
하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속으로는 천 개의 칼날을 품고, 밖으로는 만 가지의 정보를 쥐락펴락하는 여인.
그녀에게 아름다운 겉모습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일 뿐이었다.
“후후… 어디 있었나 했더니.”
범인(凡人)이라면 거대한 역사의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벨린에게 이 상황은 그저 조금 더 큰 장난감에 불과했다.
동쪽의 루크레티나 발레리안.
서쪽의 에드먼드 코르반.
어느 한쪽도 눈을 뗄 수 없는 흥미로운 영웅들이었다.
“하아…”
그녀는 열기를 품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제국과 전쟁.
피와 금화의 향기.
이벨린 모라는 그 비릿하고도 달콤한 냄새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붉은 입술 끝에 매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아아, 얼마나 즐거운가.
영웅들이 저마다의 이상(理想)을 걸고 지키려는 이 세상은,
고작 자신의 혀끝에서 놀아나는 '황금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 제 2장. 차가운 전조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