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9화
… 흔히 전쟁을 타오르는 화마(火魔)에 비유하곤 한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길,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열기,
그리고 비명조차 태워버리는 화염의 파도.
그러나 대륙을 휩쓴 그 불길의 시작을 따라가다 보면, 사가(史家)들은 역설적이게도 지독하리만큼 시린 ‘냉기’와 마주하게 된다.
그 거대한 화마는 결코 갑작스러운 폭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준비된, 수많은 ‘차가운 전조’들이 응집된 결과였다.
그것은 반역의 싹을 잘라내는 서늘한 칼날의 감촉이었고,
그것은 보급로의 결빙을 계산하는 무심한 펜촉의 소리였다.
동쪽의 황궁에서,
서쪽의 진흙탕 길 위에서.
시대는 이미 얼어붙기 시작했다.
차가운 침묵.
그것이야말로 장차 닥쳐올 대화재를 위한 가장 완벽한 땔감이었다는 사실을, 당시의 우리는 깨닫지 못했다.
불꽃이 튀기 전.
대륙은 이미 숨이 막힐 듯한 전조의 냉기 속에서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 리시아 문드리안의 회고록, <불과 그림자의 연대기> 2장, 차가운 전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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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파릇했던 라비나르 자치령의 대지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병사들은 시신 더미 사이를 오가며 확인 사살을 하고 있었다.
창끝은 정확했다. 날붙이는 틈새를 한 치도 남김없이 훑었다.
“……”
기계처럼 반복되는 움직임이었다.
짧은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미 숨이 끊어졌거나 공포에 질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자들뿐이었다.
까악.
까마귀 울음소리가 평원의 적막을 깨트렸다.
들판을 메운 것은 적의 시신만이 아니었다.
제국군이 '미끼'로 몰아세웠던 자치령의 피난민들.
그들 또한 반란군과 한데 뒤엉켜 구분 없이 잔해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딸이었을 이들.
이제는 피와 진흙 속에 잠겨 이름 없는 침묵으로만 남았다.
전투 개시 전, 참모들은 지도를 가리키며 난색을 보였다.
"피난민 행렬을 미끼로 쓴다면 반란군을 평지로 끌어낼 수는 있겠지만, 백성들의 희생이 너무 큽니다. 민심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원정 사령관 루크레티나 발레리안은 차가운 눈으로 전장 모형을 내려다보며 명했다.
"그들을 저지선 앞쪽으로 몰아라. 역도들은 제 부모 형제가 섞인 행렬을 향해 활을 쏘지 못할 것이다."
반란군은 인간 방패로 내세워진 그들의 동족들을 보고 동요했다.
대형이 흐트러지며 주춤거렸다.
사령관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기병대가 측면을 부수고 들어갔고, 중보병들이 정면을 압박했다.
이윽고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모든 화력을 투사했다.
아군을 제외한 살아있는 모든 것을 향해 화살 비가 쏟아졌다.
"전장에 무고(無辜)한 백성은 없다."
루크레티나는 승전보를 가져온 부관 앞에서 담담히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시신으로 뒤덮인 들판이 아니라, 다음 작전 구역의 지도를 향해 있었다.
"반란군을 숨겨주고, 그들에게 식량을 대준 순간부터 저들은 더 이상 제국의 신민이 아니다."
최소한의 자원으로 전쟁을 끝내기 위한 효과적인 선택.
그 결론은 아군마저 전율하게 했다.
“미친 짓이야. 이건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다.”
피 칠갑을 한 고참 병사가 떨리는 손으로 투구를 벗었다.
아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교환비로 따지면 기적에 가까운 대승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얼굴에는 승리의 희열 대신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민간인과 적을 한꺼번에 갈아버린 승리.
제국 병사들 어느 누구도 감히 환호성을 지르지 못했다.
“……”
사령관의 진지 안은 마치 패잔병들의 집결소처럼 기이하리만큼 조용했다.
승전의 나팔도, 전리품을 나누는 왁자지껄한 소음도 없었다.
병사들은 발소리를 죽이며 오갔다. 말들조차 주인의 긴장을 읽은 듯 투레질을 멈췄다.
완벽하게 통제된 규율이 주는 숨 막히는 압박감이 공기를 지배했다.
그 적막의 중심.
제국의 검은 장미가 피어 있었다.
피를 먹고 자란, 가장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꽃이.
살아있는 모든 것을 갈아 넣은 승리 뒤편.
원정군 사령관의 진지는 놀라울 만큼 소박했다.
목책과 망루, 해자의 깊이까지.
진지의 모든 배치는 오직 효율과 방어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장식은 없었다.
가문의 영광을 새긴 깃발, 금박 전리품, 벽면을 채울 초상화의 빈자리.
그 공백을 채운 것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서늘한 기능미뿐이었다.
유일한 상징물은 검은 쌍두독수리 깃발뿐.
그것이 제국의 권위이자,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유일한 신호였다.
그 표장대는 제국의 수도를 떠난 지 열여드레 만에 처음으로 땅에 내려왔다.
쿵.
묵직한 울림과 함께 쇠로 된 깃대 끝이 대지를 파고들었다.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 검은 독수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
그 자리에는 포승줄에 묶인 사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라비나르 자치령의 반란 수괴.
한때는 영웅이라 불렸으나, 이제는 제국군 발아래 짓눌린 패배자였다.
"성황 폐하의 대리인이신 루크레티나 발레리안 사령관께 무릎 꿇어 경의를 표하라."
부관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승리의 선언이라기보다, 지루한 행정 절차를 낭독하는 것에 가까웠다.
패배자의 거친 숨소리가 적막을 찢었다.
그의 시선이 검은 독수리를 지나, 나무 의자에 앉은 적장에게 닿았다.
아름답지만 차가운 눈매.
그 안에는 오직 건조함과 약간의 피로만이 묻어 있었다.
수천 명을 도륙하고 돌아온 지휘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단정한 자세.
전장과는 동떨어진 이질감이었다.
"… 경의라고?"
보르크의 입술이 비틀렸다. 피 섞인 침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내 백성들을… 너희들이 지켜야 할 제국의 신민들을 방패로 삼아 짓이겨놓고, 이제 와서 권위를 논하는가."
그가 토해내는 목소리는 영혼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절규에 가까웠다.
짓뭉개진 동족의 시신 위로 홀로 살아남아 숨 쉬고 있다는 죄책감.
그 끈적하고 무거운 감정이 보르크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잠식했다.
그의 충혈된 시선이 한 사내에게 꽂혔다.
루크레티나의 곁, 그림자 속에 숨죽여 서 있는 자.
보르크의 살기가 허공을 따갑게 찔렀다.
“……”
그는 한때 보르크가 등 뒤를 맡겼던 최측근이었다.
누구보다 지리를 잘 알았고, 누구보다 믿음이 두터웠던 자.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 아군을 팔아넘겼다.
동족을 학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대가.
그는 지금 승리자의 곁을 차지하고 있었다.
배신자는 보르크의 시선을 외면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독할 정도로 효율적인 공정의 결과였다.
성벽을 치기 전에 먼저 믿음의 성채에 금을 낸다.
의심이라는 쐐기를 박아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유도한다.
균열이 벌어지는 순간 망설임 없는 일점집중(一点集中). 쏟아지는 화력 투사.
그것은 감정이 배제된 완벽한 해체 작업이었다.
"끄으으…!"
기수들이 쇠로 된 깃대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보르크의 목덜미를 짓누르는 무언의 압박.
패배자의 예를 갖추라는 강요였다.
하지만 보르크는 시퍼런 핏대를 세우며 버텼다.
짓눌린 성대 사이로 짐승 같은 신음이 거칠게 새어 나왔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절차를 멈춰라."
흐트러짐 하나 없는 바른 자세.
그 모습에는 원정의 무게가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광택이 죽은 흙먼지투성이 갑주.
서류를 쥔 장갑 위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딱딱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운 자의 거칠어진 얼굴.
그러나 그 피로 속에서도 에메랄드빛 눈동자만은 흔들림 없이 형형했다.
"사령관 각하, 이는 제국의 승리를 기록하는 절차로…"
부관이 규정집을 읊듯 조아렸지만 루크레티나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입맞춤을 받아낸다고 전쟁에 이기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감정 없는 눈으로 보르크를 응시했다.
승리자의 오만함도, 살육에 대한 죄책감도 없었다.
무너진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가장 무거운 추를 올려놓은 냉철한 집행자의 얼굴이었다
"보르크. 네가 질서를 어지럽혔기에 제국은 결단을 내렸다. 결과는 네가 보는 대로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변명이 아니었다.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오직 제국의 안녕과 질서를 지킨다.
그 대명제 아래 움직이는 군인의 삭막한 논리였다.
"이 자의 신병을 인계해라. 추후 제국의 법도에 따라 합당한 처분이 내려질 것이다."
루크레티나는 다시 서류 더미로 시선을 돌렸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여유 따위는 없다는 듯 흙먼지 앉은 펜을 다시 쥐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탁자 위에 펼쳐진 보급 장부를 건조하게 훑어 내렸다.
[제3 보병대, 화살 소모량 4천 발. 예상치보다 2할 초과]
[징발된 밀가루, 곰팡이 발생 보고]
눈앞에서 한 자치령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은 다음 행군을 위한 숫자를 맞추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녀에게 보르크의 처분은 이미 종결된 안건일뿐이었다.
오히려 비에 젖은 밀가루 50포대의 손실이 당장 해결해야 할 진행 중인 위기였다.
승리란 화려한 축포가 아니다.
이런 지루하고 꼼꼼한 숫자들의 합(合)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깨 위로 전장의 핏물과 먼지, 수만 명의 생사를 결정지은 책임감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털어내지 않았다.
그 무게조차 계산에 포함된 상수(常數)라는 듯이.
그녀의 시선이 어둠 속에 숨죽여 선 사내에게 머물렀다.
옛 주인을 팔아넘겨 제국의 승리를 앞당긴 일등 공신.
루크레티나는 그 부역자에 대한 처우 또한 잊지 않았다.
"카시우스. 그에게 약속한 금화를 지급해라."
사내의 얼굴에 안도의 화색이 도는 것도 찰나.
서늘한 명령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즉시 군법에 따라 탈영병으로 처리해서 노역장에 넘겨라."
"… 뭐요?"
자신이 기대했던 영광과는 전혀 다른 판결이었다.
당혹감에 입을 떼려는 그를 향해 루크레티나가 무심하게 덧붙였다.
"동족의 정보를 판 자를 내 군대에 둘 순 없으니까."
그것으로 끝이었다.
항변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보고서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다음 안건, 보고해."
절규하며 끌려 나가는 사내의 등 뒤로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만이 진지를 차갑게 채웠다.
지독하게 성실하고 묵묵한 손길.
그녀는 피로 얼룩진 손으로 다시 제국의 질서를 기록해 나갔다.
“……”
잠깐의 정적.
카시우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각하, 포로들의 처우가 남았습니다만.”
사각거리던 펜촉 소리가 뚝 끊겼다.
“포로?”
루크레티나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건조한 반문이 먼지를 머금고 막사를 울려 퍼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촛불 그림자가 창백한 얼굴 위로 깊게 드리워졌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카시우스를 향했다.
한겨울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
이내 짧고 단호한 선고가 떨어졌다.
“우리 군에 적의 생존자는 없다.”
“하오나, 이미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 자들이…”
다급히 말을 잇는 부관을 향해 핏자국이 엉겨 붙은 장갑 낀 손이 들렸다.
무언의 제지.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듯 그녀는 다시 펜을 잡았다.
삐걱거리는 갑주 소리 뒤. 그녀의 등은 여전히 꼿꼿했다.
“이미 전멸로 기록했다. 숫자를 맞춰라.”
명령은 짧았다.
다시금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막사를 차갑게 채웠다.
현실을 서류에 맞추라는 질문도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단절.
카시우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인간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건조함에 그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서류 위를 달리는 펜촉이 멈추는 순간.
카시우스의 머릿속에는 막사 밖에서 벌어질 참상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전멸(全滅)로 기록했다.'
그 말은 결코 기록을 조작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루크레티나가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서류를 덮으며 나직이 덧붙였다.
"이제 숫자를 맞추러 가야겠지."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사 밖, 포로들이 모여 있는 언덕 위.
거대한 제국의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