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혈의 저울

<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10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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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2장. 차가운 전조

10화. 철혈의 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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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outube_Springs of Serenity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숫자를 맞춰라.’


루크레티나의 건조한 명령이 내려지고 이틀 동안.

진지 밖에서는 처형의 칼바람이 멈추지 않았다.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대지를 울리는 건조한 파열음은 밤새도록 병사들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것은 산 자들을 죽은 자로 치환하는 기계적인 소음이었다.


언덕 위에는 숫자를 맞추기 위한 검은 침묵만이 늘어섰다.

병사들은 그곳을 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눈을 돌렸다.


… 그리하여 사로잡힌 포로의 절반은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나머지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조성된 말뚝 숲에 박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 붉은 행렬 속에 섞인 민간인은 천여 명에 달했다.

반란군에게 식량을 내어주었거나 길을 안내했던 자들.


오직 반란과 무관함을 증명한 자치령의 신민들만이 그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지독히도 잔혹한 집행인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징벌인가.


피비린내 진동하는 막사 뒤편에서 병사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누군가는 혀를 찼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운 논쟁 끝에 남는 명백한 진실은 단 하나였다.


이번 원정에서 제국군이 흘린 피는 전무(全無)에 가까웠다는 것.

그 압도적인 결과 앞에서 병사들의 도덕적 고뇌는 생존의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나의 목숨을 온전히 지켜준 지휘관.

그들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를 기꺼이 전장의 신이라 불렀다.


병사들의 경외와 두려움을 동시에 독차지하는 제국의 상승(常勝)장군.

그녀의 이름은 루크레티나 발레리안이었다.




처형 집행 사흘째.

포로들의 '처리' 작업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루크레티나는 언덕 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의 발아래로 기괴한 숲이 펼쳐졌다.


끝도 없이 늘어선 말뚝들.

인간의 존엄이 철저히 부정당한 죽음의 숲이었다.


"푸르륵!"


전장을 수없이 누비던 그녀의 군마조차 본능적인 공포를 이기지 못했다.


녀석은 콧구멍을 한껏 벌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려는 듯 뒷발을 구르며 발버둥 쳤다.


코끝을 찌르는 짙은 피 냄새.

끊이지 않는 비명.


눈앞에 펼쳐진 생지옥은 짐승의 감각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광기였다.



하지만 고삐를 쥔 사령관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녀는 말을 달래주지도, 질책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고삐를 제어할 뿐이었다.


루크레티나의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공포도, 혐오도, 하물며 희열조차 없는 무기질적인 시선.

그녀는 그저 질서가 회복되는 과정을 건조하게 검수하고 있었다.


그녀의 한 걸음 뒤.

부관 카시우스 세르비우스가 창백한 안색으로 말고삐를 잡고 있었다.


아카데미아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 장교.

그에게 전쟁이란 질서 정연하고 이성적인 체스 게임이어야 했다.


문득 뇌리에 교본의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포로는 정보 자산으로 활용하라. 항복한 병사는 제국의 관용을 보여줄 도구가 된다.」


그것들은 참으로 근사한 문장이었다.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고결한 선(線)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는 끝없는 말뚝의 행렬만이 늘어서 있었다.


이 압도적인 괴리감은 단순한 교본의 오탈자가 아니었다.

피 묻은 현실이 잉크 냄새나는 교본을 비웃으며 뜯어고치고 있었다.


"윽…"


위장이 뒤틀리는 감각을 억누르며 카시우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금니를 깨물며 눈앞의 현실을 응시했다.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상관.

루크레티나 발레리안의 등 뒤에서 나약한 추태를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오직 정신력 하나로 흐려지는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다.


그때, 젊은 사령관의 건조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카시우스. 똑똑히 봐라.”


그녀는 채찍을 들어 피 냄새가 진동하는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저것이 제국의 질서다. 그리고 저런 지옥도를 그려낸 우리를 역사는 ‘성화(聖火)의 수호자’라 칭송하겠지.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서풍이 불어왔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그녀의 뺨을 스쳤다.


이틀 전의 흙먼지는 씻어냈다.

하지만 그녀에게 배어 있는 서늘한 전장의 냄새는 여전했다.

오히려 수천의 죽음을 집행한 뒤라 더욱 짙어져 있었다.


루크레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시우스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 위로 희미하고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나의 길은 명예나 영광이 아니라, 피와 탄식으로 포장된 길이다.”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카시우스의 흔들리는 눈을 꿰뚫듯 응시했다.


“그런데도, 자네는 이 길을 끝까지 따라올 수 있겠나?”


카시우스에게 이번 원정은 그리 무거운 과제가 아니었다.


반란군의 기세가 아무리 흉흉하다 한들 오합지졸의 무리들.

그는 이 전쟁을 가문의 이름을 높일 기회로만 보았다.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위한 탄탄한 발판.

그것이 그가 기대했던 전쟁의 무게였다.


물론 이 혈기 넘치는 청년이 토벌에 자원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국군 젊은 장교들의 우상이자 시기 어린 질투의 대상.

그녀의 곁에서 살아있는 신화를 직접 목격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그녀는 현존하는 제국의 장성들 가운데 가장 찬란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그야말로 전장의 초신성이었다.


바람이 잦아들었다.

그녀의 옆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밤하늘을 잘라낸 듯 칠흑같이 빛나는 머리카락.

핏기 하나 없이 투명하며 창백한 피부.


선은 가늘고 섬세했다.

그 안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단정함이 있었다.


그 존재감은 마치 성화(聖火)가 인간의 형상을 입고 지상에 내려온 듯했다.

고결하고 압도적이었다.


‘어찌하여…’


카시우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토록 아름답고 가녀린 육신에, 수만 명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도륙하는 강철 같은 의지가 깃들 수 있었을까.


카시우스는 외람된 시선으로 상관을 더듬듯 훑어보았다.


단순한 욕망이라기엔 무거웠다.

존경이라기엔 지나치게 은밀했다.


그 시선 끝에는 경외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이 모순적인 존재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엉겨 붙어 있었다.


“……”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원정길 위.


카시우스는 마침내 깨달았다.

제국 전체가 거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루크레티나는 성화(聖火)의 현현도, 강림한 전쟁의 여신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지독하리만치 고독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승리를 위해 병력을 장기말처럼 던지고, 적을 기만하며, 죄 없는 백성을 방패로 세우는 잔혹한 계산.

제국의 안녕을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한 군인의 삭막한 논리였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보았다.


모두가 잠든 새벽.

홀로 깨어 전사자 명부를 수없이 다시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충혈된 눈을.


그 잔혹한 수를 두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많은 밤을 뜬눈으로 자신을 갉아먹었는지를.


판단은 기계처럼 냉정했고 질서는 철저했다.

다만 그 지독한 냉정함이 타인의 눈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함으로 비쳤을 뿐이다.


카시우스는 ‘불패의 장군’이라는 껍질 속에 감춰진 진짜 얼굴을 엿보았다.


괴물이 되어서라도 제국을 지탱하려는 위태로운 인간.


그는 망설임을 지웠다.


속에서 치미는 구역질을 꿀꺽 삼켜내었다.

카시우스는 떨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따르겠습니다, 각하.”


그는 예를 갖추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남몰래 꽉 쥔 주먹은 하얗게 핏기가 가셨다.


“설령 그 길이 영광 없는 가시밭길이라 해도… 아니, 심연의 저 바닥으로 향한다 할지라도.”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서풍이 다시 거세게 불어왔다.

처형장에서 터져 나오는 절망의 함성이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한때 약초 무역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던 라비나르 자치령.

향긋한 풀 내음이 감돌던 그 땅에는 이제 잔혹한 피의 바람만이 몰아치고 있었다.


“돌아가자. 제도(帝都) 임페리움 마그눔으로.”


루크레티나는 망토 자락을 끌어 올려 코끝을 가렸다.

그리고는 건조하게 말을 덧붙였다.


“어서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군. 마침 그날도 가까워지고 있으니.”

“예, 알겠습니다…?”


카시우스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챘다.


‘그날’이라니.


영민한 부관의 뇌리에 전술 교범에는 없는 지식이 스쳐 지나갔다.

이내 의미를 깨달은 그의 얼굴이 껍질 벗긴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전장의 참혹함 앞에서도 의연하려 애썼던 청년이, 고작 단어 하나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 당황한 기색이 마음에 들었는지 루크레티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엉큼한 녀석.”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묘한 눈빛으로 부관을 응시했다.


“그래… 나도 다음 출정 전까지는 몸을 추스르는 게 좋겠지.”


이어지는 목소리는 서늘하면서도 건조했다.


“카시우스, 여자는 태생적으로 피에 익숙하단다.”


그녀는 말의 배를 걷어차며 앞서 나갔다.

카시우스는 멍하니 그녀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단순한 신체적 현상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평생을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하는 그녀의 운명을 뜻하는 것일까.


내 몸에서 흐르는 피.

적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피.

그것들을 모두 감내해야 할 일상이라는 뜻처럼 들렸다.


다시금 카시우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루크레티나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짧고 낯선 웃음.

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인간’의 조소였다.


… 이로써 그녀의 군공 명부에는 화려한 승전의 기록이 한 줄 더해졌다.


하지만 그 뒷면에는 수만 개의 원망과 저주, 그리고 ‘학살자’라는 오명이 또 한 장 덧씌워졌다.


어느새 태양이 서쪽 능선 너머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타오르는 노을에 물든 하늘.

발아래 흐르는 선혈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붉고 진득했다.


루크레티나는 그 핏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제국의 수도, 임페리움 마그눔이 뿜어내는 광기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서쪽 하늘을 응시하며 나직이 뇌까렸다.


“차라리 이곳의 비릿한 쇳내가 향수처럼 그리워질 거다.”


본능적인 예감이었다.

이 참혹한 도살장은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 돌아가야 할 곳은 보이지 않는 칼날과 기만이 판치는 제국의 심장.


루크레티나가 거칠게 고삐를 돌렸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말의 배를 걷어찼다.


그녀가 몰고 갈 피비린내 나는 바람.

그것이 대륙 반대편의 가장 평화로운 시골 마을까지 덮치게 될 줄은.


그때의 그녀는, 꿈에도 모른 채.




안녕하세요, <설계자의 전쟁론>을 쓰고 있는 밍당입니다.


본래 2장 시작과 함께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조금 늦은 2장 2화(전체 10화)에서야 뒤늦은 안부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간은 오롯이 작품의 몰입을 돕기 위해 댓글 기능을 닫아두었습니다.


작가로서 피드백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때로는 쓸쓸함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오늘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연재가 멈춰있던 문O아에 우연히 접속했다가, 지난 2월 5일 목요일의 조회수 그래프가 수직으로 치솟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니 아마 세 분께서 연재분을 끝까지 정주행해 주신 듯합니다.


문O아에 게시된 초고는 다이어트를 거치기 전이라 무려 21만 자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그 긴 글을 단 하루 만에 완주해 주신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쓴다'는 말이 그저 수사가 아닌, 작가를 움직이는 실체적인 동력임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본업의 영향으로 업로드가 지연되는 중, 직접 타 플랫폼을 찾아 정주행해 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곳 브런치에는 기존 연재분과는 또 다른 정제된 재미를 느끼실 수 있도록 정성껏 갈무리하여 업로드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매주 화, 목, 토요일에 성실히 찾아뵙고 최대한 빠르게 진도를 나가보려 합니다.


기존 연재분까지 신속히 업데이트하고 곧 새로운 이야기로 인사드릴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


오늘 제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즐거움이 되었다면, 저의 오늘의 역할을 다한 셈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작가 밍당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