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강물

<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11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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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2장. 차가운 전조

11화. 철의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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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식 직후.

브로바렌 평원으로 향하는 에드먼드와 오십 인의 병사들은 밝은 햇살 속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어휴… 더워.”


4월 중순의 공기는 변덕스러웠다.

습기를 머금은 흙냄새는 눅진했다.


이따금 구름이 걷히면 따가운 햇살이 정수리를 찔렀다.

병사들은 망토 깃을 여미다가도 이내 흐르는 땀을 훔쳐내야 했다.


선두에는 전투감각이 예민한 가레스와 데니스가 나란히 섰다.


척후 셋이 더 앞에서 움직였다.

창과 활, 소형 방패로 무장한 그들은 지형과 가도를 살피고 혹시 모를 적의 흔적을 찾았다.


덜컹.


대열 중간에는 세 사람이 한 조로 끄는 중형 수레 다섯 대가 자리했다.


수레에는 곡물 자루와 말린 빵, 소금 절임 고기, 그리고 말린 순무가 차곡히 실려 있었다.


취사용 냄비와 장작 다발, 망치·못·밧줄·곡괭이·도끼 같은 공병 도구도 함께였다.

작지만 전쟁을 버티기 위한 최소한의 장비들이었다.


그리고 수레 뒤에서는 에드먼드와 루벤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도련님, 그래도 대장은 노새라도 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루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말에 에드먼드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아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다고 쳐봐요. 도련님이라도 도망쳐야 하지 않아요?”


주변의 병사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하급 귀족이라 하더라도 그의 목숨은 여느 평민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그러니 위기의 순간, 달아나는 거라도 잘 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뺨을 긁적이며 태연하게 답했다.


“그런 상황 자체가 오지 않게 하는 게 내 역할이지.”


루벤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화답했다.


“믿음직한 말이네요.”


그러고는 목청을 가다듬고 자연스럽게 노래를 시작했다.


브로바렌으로 진격하는 오십 인의 용사들.
번쩍거리는 갑옷, 날카로운 창끝, 매서운 눈빛.

하지만 소 몰이용 작대기같이 휘휘 들고 걷는다네.


키득거리는 오십 인의 용사들.

루벤은 주변의 반응을 살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전설이 되기 위한 여정.

그런데 브로바렌이 어디야?
알게 뭐람. 고향을 나온 건 처음인데.

그래도 용사들은 걷는다네.
고향은 뒤로 멀어지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네.

그게 용사의 숙명. 그것이 전설의 시작.
오십 인의 용사들은 황금의 갑옷을 입었다네.


루벤의 노래의 끝, 정적이 흘렀다.


땅을 밟는 장화의 소리.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바퀴의 고른 음만이 남았다.


선두에서 가레스가 돌아보며 소리쳤다.


“인마! 누가 시작부터 초를 치냐!”


루벤이 억울하다는 듯 대꾸하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모두의 마음 한쪽이 습기를 머금은 종이처럼 눅눅해져 왔다.


병사들은 행군이 시작된 순간부터 틈만 나면 뒤를 힐끔거렸다.


대부분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코르반 영지를 벗어난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설렘과 두려움이 마음 한편에서 얇은 종이처럼 겹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드먼드는 그런 분위기 속에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군기를 흩트렸으니, 태형으로 다스려야겠군.”

“악, 도련님!”


병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들은 일부러 더 크게 웃었다.

불안함이 가시도록, 더욱 크게.




코르반 영지를 벗어나 백작령 직할 가도에 들어선 지 반나절.


먼지 자욱한 길 위로 낡은 갑주를 걸친 순찰대 십여인이 길을 막아섰다.

그들의 시선은 코르반의 짐수레를 끈적하게 훑고 있었다.


“멈춰라!”


가장 앞에 선 멧돼지 같은 사내가 앞장서며 손을 내저었다.


“거기, 지휘관은 누구인가? 이 가도는 백작 각하의 직할도로다. 보아하니 짐이 꽤 묵직한데, 통행세와 가도 유지비를 징수하겠다. 아, 시국이 시국인 만큼 ‘특별 호위료’도 가산하고.”


대놓고 주머니를 털겠다는 소리였다.

코르반의 병력이 어리숙해 보이니 강짜를 부리는 것이었다.


병사들 사이에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

에드먼드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통행세라. 얼마면 되겠습니까?”


에드먼드의 차분한 목소리에 잘 걸렸다는 듯 순찰대장이 쾌재를 부렸다.


“이게 싯가라서 말이지. 보아하니 짐수레가 요란한 것 같은데… 은화 쉰 개는 받아야겠어.”


병사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졌다.

은화 쉰 개면 허름한 농가를 한 채 올릴 수 있는 돈이었다.


모두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떠올랐지만 정작 에드먼드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좋소. 내 당장 드리지. 루벤, 펜과 잉크.”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루벤에게 그것들을 건네받고는 순식간에 여백을 채워나갔다.


기예에 가까운 유려한 필체가 양피지를 달렸다.

순찰대장이 눈을 떼지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에드먼드가 그에게 두 장의 서류를 들이밀었다.


[성화력 1015년 4월 15일. 코르반 남작령의 집징병 오십 인. 기브라임 백작의 가도 이용료 은화 오십 개. 전시 보급관 혹은 참모장 드라몬드 자작에게 청구할 것. 지휘관 에드먼드 코르반]


서류 귀퉁이에는 수령인 서명란이 공란이었다.

순찰대장은 내용을 보고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요?”

“보면 모르시오? 그대에게 주는 청구서요. 이대로 브로바렌 평원으로 가서 은화를 수령하시오.”

“뭐라?”


에드먼드는 짐짓 엄중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얼굴. 코르반의 병사들조차 마른침을 삼켰다.


“군령에 따라 움직이는 부대의 이동 비용은 소집령을 내린 자에게 있는 법이오. 그러니 냉큼 드라몬드 자작에게 가서 비용을 청구하시오. 공증을 위해 정확히 두 장을 작성하였으니, 어서 서명하시오.”


서류를 내미는 손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순찰대장이 뒤로 주춤거렸다.


“자, 잠깐. 뭔가 오해가 있는가 본데.”

“오해?”


에드먼드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은화 오십 개를 징수하는 게 오해란 말이오? 무장한 병력에도 이렇게 무도하게 구는데, 비무장인 상인들에게는 얼마나 착복을 했을지 알만 하오.”

“아니, 그게 아니라…”


순찰대장의 낯빛이 흑색으로 변했다.

에드먼드는 가차 없이 다시 서류를 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자, 어서 서명하시오! 그리고 그대의 주군에게 가서 비용을 청구하시오.”

“가, 가자!”


순찰대장이 황급히 휘하 병력을 이끌고 에드먼드에게서 멀어졌다.


병사들의 휘파람 소리.

루벤이 신나서 깡충깡충 뛰며 소리 질렀다.


“역시 우리 도련님이야!”


하지만 에드먼드는 기뻐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순찰대의 가도 이용료 징수는 정당했다.


‘문제는 액수다.’


으레 이 시기면 대규모 상단의 이동이 빈번했다.

그렇기에 이들이 무도한 요구를 하지 않고도 적당한 벌이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의 기운이 휩쓸고 간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고 삭막했다.


병사들의 환호 속.

에드먼드의 입가에 씁쓸함이 번졌다.


지금 텅 빈 것은 도로뿐만이 아니었다.


씨앗을 품지 못한 봄의 대지.


그 여백은 수확의 계절이 닥쳤을 때.

채워지지 않는 빈 곳간과 사람들의 곡소리로 여실히 드러나리라.




행군 이틀째 아침.

병사들은 이제 입을 굳게 다문 채, 보이지 않는 브로바렌 평원 쪽으로 시선만 고정하고 있었다.


첫날의 들뜬 마음은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병사들은 틈만 나면 보일 리 없는 고향 땅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겁게 가라앉는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지난밤은 유난히 길었다.


야영지는 에드먼드와 가레스가 신중하게 고른 장소였다.

가도에서는 언덕의 굴곡에 가려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는 구릉지 비탈 안쪽.


그곳에 수레 다섯 대를 반원형으로 둘러 방풍과 은폐를 동시에 잡았다.

절묘한 배치였으나, 그 자리를 찾기 위해선 제법 발품을 팔아야 했다.


하지만 좋은 자리도 첫 노숙의 설움을 달래주진 못했다.


낯선 잠자리와 눅눅한 4월의 밤공기.

차례로 돌아오는 불침번의 긴장감은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

타닥거리며 흩날리는 모닥불의 파열음.

밤늦게 가도를 지나는 상단의 바퀴 소리까지.

모든 게 예민한 신경을 긁어댔다.


"하아암…"


루벤은 퀭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며 입이 찢어지라 하품을 뱉어냈다.

밤새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며 잠을 설친 탓이었다.


그는 배낭과 혁대를 힘겹게 추스르고는 창을 지팡이처럼 짚었다.

늘 활기 넘치던 녀석이 이 꼴이니, 다른 병사들의 상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도련님… 아직 멀었어요?”


에드먼드의 얼굴은 오히려 상쾌해 보였다.

출정 준비로 영지에서 어떤 날들을 보냈는지 그 표정이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장비를 하나씩 챙기며 루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말해주면 좋을까. 희망적으로? 절망적으로?”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죠. 희망적으로 말해주세요.”


에드먼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길거리에선 하룻밤만 더 자면 된단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럼, 절망 편은 뭐였어요?”


에드먼드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틀 꼬박 더 걸으면 내일 저녁쯤엔 브로바렌 평원에 도착하겠지.”

“오, 젠장.”


루벤은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더 나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에드먼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칼집을 고쳐 잡았다.

“자, 이제 출발하자. 여정은 제법 남았으니까.”




“이제 곧 브로바렌 평원이다.”


이틀 뒤.

땅거미가 짙게 깔리기 시작한 시간.


선두에 선 가레스의 굵은 목소리가 대기를 갈랐다.


완만한 구릉지 너머, 시야가 일순간 탁 트였다.

아랑스게아 대초원의 끝자락이자 마르셀 왕국의 수많은 군마의 고향, 브로바렌 평원.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틈새로 쏟아진 햇살이 거대한 빛기둥이 되어 평원 곳곳을 사선으로 비추고 있었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대지.

그 광활함은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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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빛기둥 아래.

거대한 철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기브라임 백작령 전역에서 소집된 수많은 병력들.

그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평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뱀이 꿈틀대는 듯했다.


병사들은 숨이 막힐 듯한 장엄함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행군의 끝이자, 전쟁의 시작점에 도달한 것이다.


장엄한 침묵을 깬 건 역시 루벤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 다리가 부러질 것 같다며 징징대던 녀석이라곤 믿기지 않는 활기였다.


“와아, 도착이다!”

“아니, 아직은 아니지.”


에드먼드는 담담히 정정했다.


“집결지는 평원 북부니까.”

“에이씨. 그냥 그렇다고 해줘요.”


루벤은 입을 삐죽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지만 불평과는 달리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에드먼드가 인솔하는 오십 명의 병력.

그 작은 물줄기가, 마침내 평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철의 강물 속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시골 촌부들의 가벼운 발걸음이 비로소 전장의 무게를 짊어진 병사로 거듭나는 순간.

에드먼드의 시선은 본진 가장 깊은 곳, 화려한 천막을 향해 가늘어졌다.


코르반의 용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걸어 들어가는 곳이 든든한 아군의 품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늑대'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소굴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