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와인

<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12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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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2장. 차가운 전조

12화. 빵과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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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outube_路地裏の音楽書庫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에드먼드가 인솔하는 오십 명의 병력이 평원으로 합류했다.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병력이 띠를 이루며 느릿느릿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규모 면에서 코르반이 단연 열세였다.

보통 일백, 많게는 이 백을 헤아리는 타 영지의 병력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했다.


사람이 모이면 으레 그렇듯, 병사들의 눈은 끊임없이 자신들과 상대를 비교하고 있었다.

경비대 출신으로 병사들의 부장 역할을 맡고 있는 데니스가 두꺼운 목을 풀며 에드먼드에게 말했다.


“확실히… 병력은 우리가 가장 적은가 봅니다.”

“그렇지? 우린 작은 영지니까.”


에드먼드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숫자가 전부는 아니었다.

다른 병력은 하나같이 쟁기질하다가 끌려온 농부 티를 벗지 못해 후줄근하기 짝이 없었다.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끌려왔으니 표정이 좋을 리 만무했다.


반면, 코르반의 병사들은 잘 먹고 잘 훈련받은 강병의 태가 났다.

가레스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건 괜한 일이 아니었다.


“가레스에게는 큰 빚을 졌어.”

“저 도깨비 아저씨가 잘난 게 아니라, 우리가 잘난 거죠.”


루벤이 짐짓 가슴을 펴며 말했다.

물론 가레스가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추는 건 잊지 않았다.

들었다간 당장 선두에서 달려와 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을 테니까.


서로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말소리가 닿을 만큼의 거리에 징집병들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어림잡아 이 백은 될 법한 무리에서 질문이 날아왔다.


“이봐, 너흰 어디서 왔냐?”


그들의 말에 질세라 루벤이 목청을 높였다.


“우린 지옥에서 왔다! 너희는?”


양쪽 대열에서 동시에 폭소가 터졌다. 하지만 웃음의 결은 사뭇 달랐다.


상대방에겐 그저 유쾌한 농담처럼 들렸을 대답.

하지만 루벤과 병사들은 킬킬대면서도 어금니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오는 길이 심심하진 않았겠군. 우린 엘라임에서 왔다.”


상대편 대열에서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라임.

광업과 수운이 발달한 북동쪽의 부유한 영지였다.

힘깨나 쓴다는 장정들이 모인 곳이니 체력만큼은 자신 있을 터.


하지만 그들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갑옷은커녕 손에 든 것이라곤 도리깨나 낫, 녹슨 도끼 같은 농기구뿐이었다.


잘 무장한 코르반의 병사들 옆에 있으니 더 비교되었다.

마치 근위대와 농민군을 나란히 세워둔 꼴이었다.


저벅저벅.


어느새 두 대열은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아까 그 엘라임 병사가 루벤을 향해 소리쳤다.


“지옥에서 온 애송아! 부디 살아서 돌아가라!”


순간, 행렬 위로 정적이 스쳤다.


투박한 격려였지만 그 말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그들이 속한 백작령은 오랫동안 전화(戰火)를 잊고 산 땅이었다.

대부분에게 이번 전쟁은 생애 첫 징집이자, 난생처음 마주하는 공포였다.


'전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막연한 불안감이 거대한 먹구름처럼 모두의 가슴을 짓눌렀다.


루벤은 쑥스러운 듯 뺨을 긁적였다.

그러고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점심때 아껴둔 빵 한 덩이를 꺼냈다.


휙.

허공을 가른 빵이 엘라임 병사의 품에 안겼다.


“받아라! 너도 무병장수해서 증손자까지 보고 죽어라!”

“오오!”


환호성과 야유가 뒤섞여 터져 나왔다.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낄낄대고 있었지만, 그 눈빛들엔 깊은 연민이 고여 있었다.


비록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들이었다.

허나 서로의 생존을 빌어주는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 훌륭한 전우들이었다.


에드먼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가고,

누군가는 땅으로 돌아가리.

모두가 살아서 돌아갈 순 없으리라.


그들이 서로에게 빵을 건네며 생존을 빌어준들, 결국 병사란 거대한 전장의 작은 소모품에 불과했다.

개개인의 애틋한 사연이나 눈물과는 상관없이.


과연 기브라임 백작은 이 순박한 목숨들을 어떤 저울 위에 올리려는 걸까.


등골을 스치는 서늘한 예감.

에드먼드는 이유 모를 소름에 몸을 떨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징집병들은 지정된 야영지에 짐을 풀었다.


모두 족히 이천은 넘어 보이는 병력이었다.

드넓은 브로바렌 평원은 순식간에 인파로 뒤덮였다.


에드먼드와 가레스는 사령부 막사를 향해 소란스러움을 헤치고 나아갔다.


눈에 들어오는 건 군대가 아니라 시장 바닥 같은 오합지졸의 풍경뿐.

구석진 곳곳에서는 왁자지껄한 고성과 함께 주사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한편에선 보급품을 두고 고성이 오갔다.

각 영지에서 가져온 물자와 백작이 푼 물량을 놓고 보급관끼리 멱살잡이 직전까지 간 모양새였다.


가레스는 혀를 쯧쯧 찼다.

그의 표정 한구석엔 묘한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군.”

“그러게 말입니다.”

“걱정했던 것보단 상황이 심각하지 않은 모양이야.”


저 멍청할 정도로 평화로운 분위기.

적어도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올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에드먼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백작 성격에 그렇게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진 않습니다만.”


하필이면 일 년 농사를 좌우할 파종기에 병력을 징발했다.

그렇기에 백작은 합당한 공훈을 세워야만 체면이 설 것이다.


이는 곧 전술적 합리성이 배제된 지휘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병력의 효율적인 운용이나 보존 따위는 무시한 채, 오로지 전과를 올리기 위해 병사들을 사지로 내모는 무리한 명령.


에드먼드가 이곳에 오는 내내 마음을 놓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임시 사령부 막사에 도착했다.


양피지 철을 든 관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가레스의 왼쪽 눈가를 가로지르는 흉터를 보더니 침을 삼켰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어느 영지에서 오셨습니까?”


가레스는 헛기침하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그 틈을 타 에드먼드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코르반 남작령의 영주 대리, 에드먼드 코르반입니다.”

“아, 네? 아… 코르반.”


관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무안함을 감추려는 듯 황급히 양피지를 뒤적였다.

명단의 맨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코르반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총 오십 명이군요. 병력 편제는… 보병 마흔에 궁수 열 명. 맞습니까?”


수치를 읽어 내려가던 관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그마한 시골 영지의 편제치고는 기형적일 만큼 이례적인 비율이었다.


에드먼드는 그의 질문에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빠짐 없이 준비 끝났습니다.”

“예… 뭐, 알겠습니다.”


관리가 손짓하자 대기하던 병사들이 코르반의 진영 쪽으로 움직였다.

에드먼드는 징집명령서를 건네며 슬쩍 운을 띄웠다.


“백작께서는 여기 계십니까?”

“아니오. 본대와 이미 라드 요새로 출발하셨습니다. 현재 이곳은 참모장 드라몬드 자각 각하께서 통제하고 계십니다.”


드라몬드 자작.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기브라임 백작의 심복이자, 탐욕에 있어서는 주군에게도 뒤지지 않은 위인.


그리고 한달 전.

코르반 남작령을 손에 거머쥐려 했던 음흉한 계략가였다.

에드먼드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짧은 한숨을 삼켰다.


그는 가레스를 막사 밖에 대기시킨 채, 안내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


막사 안은 ‘임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천막 가장자리는 금실로 마감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발목이 묻힐 듯 두툼한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다.


그 사치스러운 융단 위로 진흙과 먼지가 어지럽게 짓이겨져 있었다.

중앙에는 윤기가 흐르는 최고급 흑단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시골 영지에선 구경조차 힘든 투명한 유리잔.

그 안에는 피처럼 붉은 와인이 반쯤 채워진 채 달콤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핑 도는 현기증을 느꼈다.

임시 사령부가 아니라, 임시 금고 같은 모습이었다.


눈이 시릴 만큼 번쩍이는 은빛 갑주를 빈틈없이 껴입은 사내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안내온 관리가 잽싸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네자, 참모장의 얼굴에 기름진 미소가 억지스럽게 번졌다.


“오오, 이게 누구시오. 귀한 손님이 왔구려. 마레움의 젊은 영웅이여!”

“참모장 각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에드먼드는 드물게도 사교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눈빛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5년 전.


라드 요새에서의 첫 만남 때도 드라몬드는 지금처럼 번쩍이는 무구를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비규환의 격전지를 목전에 두고도, 갑옷에 먼지 한 톨 묻히지 않고 철군했던 사내였다.


세월이 흘러도 그 본성은 여전했다.

고작 집결지에 도착했을 뿐인데, 거동조차 버거워 보이는 화려한 의장용 갑주를 꽉꽉 채워 입고 있다니.


전장이 아니라 열병식에라도 나선 듯한 그 태연함.

어떤 의미에선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


드라몬드는 끈적한 시선으로 에드먼드를 훑어내렸다.

먹잇감을 앞에 둔 뱀처럼, 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래. 오시는 길은 평안하셨고?”

“예. 참모장 각하의 두터운 인덕 덕분에 오는 내내 무탈했습니다.”


에드먼드가 짐짓 송구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 병력 준비는 차질 없이 끝나셨소?”


그 묘한 억양 속에 숨겨진 가시.

에드먼드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손바닥만 한 시골 영지에 ‘궁수 열 명’이라는 할당량이 떨어진 이유.

단순한 행정적인 실수가 아니었다.


에드먼드는 서늘한 감정을 꾹 눌러 담으며 담담히 답했다.


“예. 분부하신 대로, 빠짐없이 준비했습니다.”

“호오.”


드라몬드의 눈썹이 꿈틀했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는지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실망한 듯하던 그의 눈빛이 이내 맹수처럼 번뜩였다.

더 크고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눈치였다.


“역시 마레움의 영웅은 다르군. 그렇다면 이번에도 남다른 공훈을 기대해 봐도 되겠구려?”


남다른 공훈.

과연 이 탐욕스러운 위인은 코르반의 병사들을 어떤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걸까.


‘애초에 이번 소집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백작과 참모장의 성정을 미루어 보건대, 그것이 왕가에 대한 불타는 충성심의 발로가 아님은 확실했다.

에드먼드는 속내를 감추고 고개를 조아렸다.


“고작 한 줌의 병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참모장 각하의 의중을 따를 뿐입니다.”

“좋소. 돌아가서 여독을 푸시오. 이동은 내일부터니까.”


드라몬드는 축객령을 내리듯 손을 휘저었다.

그의 시선은 이미 에드먼드를 떠나 흑단 탁자 위에 있었다.


브로바렌 평원의 작은 축소판.

그는 붉은 깃발 모형 하나를 툭 쳐서 넘어뜨렸다.

마치 전쟁놀이에 심취한 어린아이처럼.


에드먼드는 쓰러진 깃발을 두 눈에 담은 채, 조용히 뒷걸음질 쳐 막사를 빠져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비릿한 향유 냄새가 한숨을 타고 허공에 흩어졌다.


“후우.”


허영에 눈먼 지휘관은 언제나 화려한 전공을 갈망한다.

그리고 그 욕망의 제단에 바쳐지는 것은 늘 이름 없는 병사들의 피다.


에드먼드는 소란스러운 본영을 바라보았다.


질서도, 군기도 없는 오합지졸의 무리.

그 굶주리고 탐욕스러운 눈빛들이, 유독 잘 정비된 코르반의 짐마차를 끈적하게 훑고 있었다.


"밤이 길겠군."


이곳은 든든한 아군의 진영이 아니었다.

서로를 노리는 승냥이들의 소굴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