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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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국의 심장 임페리움 마그눔.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한 승전 장군을 맞이하는 거대한 환영식이 황궁 앞을 수놓고 있었다.
장엄의 홀에 미처 입장하지 못한 하급 귀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의 경외 어린 시선이 향한 곳은 단 한 곳.
붉은 융단 끝, 문 앞에 선 영웅의 뒷모습이었다.
"저분이 그 루크레티나 발레리안 경이야."
"제국의 불패 장군이지."
수군거림 속에 담긴 것은 순도 높은 공포와 동경.
그 소란을 듣고 있던 루크레티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뒤틀렸다.
"불패(不敗)라…"
낮게 섞여 나오는 헛웃음.
세상은 그녀를 전장의 여신이라 추앙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기억 한구석.
5년의 세월로도 끝내 씻어내지 못한 진흙 얼룩 하나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
5년 전, 마레움 성채.
하늘이 뚫린 듯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서방의 주력군을 철저히 유린하고, 빼앗겼던 요새 코앞까지 당도한 상황.
승리는 목전에 있었다.
하지만 빗줄기 너머로 보이는 성채의 방비는 기이할 정도로 견고해 보였다.
북소리는 땅을 울렸고, 숲을 이룬 깃발은 맹렬히 나부꼈다.
적의 함정인가, 아니면 대규모 증원인가.
숨 가쁘게 몰아치던 진격의 기세가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지친 병사들로 섣불리 들이치기엔 성벽 위의 살기가 너무도 흉흉했다.
루크레티나는 신중론을 택했다.
무리한 돌격 대신 전열을 정비하고, 포위망을 굳혀 적을 말려 죽이기로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사흘 뒤.
성문을 부수고 진입했을 때 그녀를 맞이한 것은 텅 빈 성채뿐이었다.
폭우로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허장성세로 제국군의 발을 묶어두고 유유히 빠져나간 뒤였다.
"공성계(空城計)…!"
루크레티나는 이를 악물고 성벽 위로 달려 올라갔다.
비안개 너머.
멀어지는 서방군의 후미가 보였다.
그 대열의 끝자락.
마르셀 왕가의 사자 문양 깃발을 든 사내가 있었다.
그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면서도 뒤를 힐끗 돌아보고 있었다.
벌써 아스라이 흐려지는 두 사람의 거리.
“큭…”
저 자가 분명했다.
다 이긴 전쟁을 진흙탕으로 만들고, 범의 아가리 속에서 병력을 빼내 간 지휘관.
"……”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한 잿빛 머리카락의 청년.
자신의 계책이 맞아떨어졌음을 확인하고 탈출하는 전술가의 눈빛이 번쩍였다.
승리감에 도취된 웃음 따위는 없었다.
쏟아지는 호우 속.
루크레티나의 꽉 쥔 주먹은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입꼬리는 반대로 씰룩 올라가 있었다.
“제법이군…”
긴박한 상황에서조차 흔들림없는 애송이의 눈빛.
그것이 루크레티나의 뇌리에 깊숙히 박혔다.
그 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다음에 만나면, 그때는 제대로 겨루어 봅시다. 제국의 장군이여.'
그날 이후였다.
그녀는 자신의 발밑에 ‘불패’라는 단어가 놓이는 것을 그닥 달가워하지 않았다.
"루크레티나 발레리안 장군, 입장하시오!"
의전서기의 우렁찬 호명 소리가 회상을 찢었다.
루크레티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거울 속의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기만에 분해하는 미숙한 장수가 아니었다.
옷깃을 가볍게 털었다.
마치 5년 전 과거의 씁쓸함을 털어내듯.
끼이익.
백 년의 세월이 빚어낸, 인간의 손으로 만든 가장 거대한 신전.
그 심장부인 '장엄의 홀'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이곳은 입장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 되는 공간이었다.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쏟아내는 정오의 햇살은 오직 황제의 옥좌만을 비추었다.
홀 중앙에는 동방의 장인들이 십 년을 바쳐 짠 붉은 융단이 길게 깔려 있었다.
핏빛에 가까운 그 깊은 적색.
그 위를 걷는다는 건, 곧 제국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뜻이었다.
궁정 악사들의 선율이 공간을 진동했다.
도열해 있던 명문 귀족들조차 저도 모르게 등을 곧추세웠다.
그러나 루크레티나 발레리안은 흔들림 없이 고개를 들었다.
수많은 시선이 쏟아지는 융단 위.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건조한 표정으로 발을 내디뎠다.
조급함도, 머뭇거림도 없는 걸음이었다.
붉은 융단의 좌우.
제국을 지탱하는 관료와 귀족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루크레티나에게 꽂혀 있었다.
"천한 것이 오만하구나."
어디선가 흘러나온 짧은 독설이 신호탄이 되었다.
"쉿. 저 여자가 베어 넘긴 목이 몇 개인지 잊었나?"
"성화시여…"
탄식과 조소, 경멸과 공포.
홀 안은 보이지 않는 칼날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들과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오로지 황제의 옥좌만을 향해, 정제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화려한 색의 물결 속.
검은 정복의 그녀는 오히려 선명했다.
제국 최고의 장인이 빚어낸 옷은 장수의 기개와 품위를 동시에 드러냈다.
목깃에 수놓인 은빛 잎맥만이 그녀가 누구인지 희미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칠흑 같은 머리카락 위에 꽂힌, 흑금(黑金)의 브로치.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검은 장미.
그것은 그녀에게 훈장이자 사슬이고, 또한 맹세였다.
걸음마다 옷자락이 고요히 흔들렸다.
어둠 속 한 송이 꽃.
제국의 검은 장미라는 이명에 걸맞은 압도적인 존재감.
그녀를 조소하던 이들조차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루크레티나는 황제의 옥좌 앞에 멈춰 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의전서기가 황금빛 비단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리고 정제된 목소리가 황제의 교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루크레티나 발레리안은 성황 폐하의 은총에 힘입어, 이번 라비나르 자치령에서 준동한 역적 무리를 토벌하였다.
역적의 수괴, 갈데아의 보르크와 그 수하 열 명의 수급을 베었으며, 오천 명의 역도를 평정하였다.
또한 그들의 부락 스무 곳을 소탕하고, 혼란 속에서 흔들리던 성채 가리시움을 다시 제국의 질서 아래 두었다.
이 모든 전과는 출정 후 불과 달포 만에 달성된 것이다.
이에 성황 폐하께서는 장군의 공을 높이 평가하시어, 그 노고를 위무하기 위해 이 장엄의 홀에서 치하의 말씀을 내리신다.”
낭독은 짧고 간결했다.
노 황제는 언제나 화려한 미사여구를 따분해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늙은 의전서기는 다시금 선언하듯 말했다.
"또한 성황 폐하께서는 전승 장군의 수훈에 합당한 은사를 베푸신다.
금화 일백 솔린과 비단 스무 필.
그리고 발레리안 백작가의 흑금 인장석을 친히 하사하신다."
순간, 홀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멎었다.
금화 일백 솔린.
그것은 중형 선박 두 척을 사고도 남을 거금이었다.
허나 뒤이어 불린 이름의 무게에 비하면 사소한 덤에 불과했다.
"흑금 인장석이라고?"
"맙소사… 제국의 질서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건가."
귀족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흑금 인장석은 단순한 증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징세권과 사병의 보유, 그리고 제국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였다.
옥좌 그늘에 선 내무대신 세네카 벨라리우스의 미간이 깊게 패었다.
그가 지우라고 조언했던 항목을 황제는 오히려 가장 화려한 순간에 공표했다.
이제 루크레티나 발레리안은 단순한 날붙이가 아니라, 제국 정계의 거대한 해일이 되었다.
분주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들.
홀의 양단에 서 있던 귀족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결과라 여긴 이들.
뜻밖의 하사품에 경악한 이들.
새로운 정계의 균형을 계산하는 이들.
그리고 조롱 섞인 미소를 흘리며 입꼬리를 올린 자들까지.
귀족 대열의 가장 앞줄.
또 하나의 눈이 매섭게 반짝이고 있었다.
리키니우스 플라비우스 아우렐리안.
그는 단정한 턱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조용히 상황을 관망했다.
그는 이미 몇 해 전부터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이 젊은 장군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패는 많을수록 좋은 법.’
그는 머릿속에 장기판을 그리듯 루크레티나라는 말을 어디에 둘지 가늠하였다.
그의 입꼬리는 슬쩍 올라가 있었다.
웅성거림이 차츰 잦아들었다.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마지막 빛을 쏟으며 홀 안은 서서히 고요에 잠겼다.
수많은 시선이 다시 황제의 옥좌로 모였다.
황제는 천천히, 그러나 확고한 동작으로 얇은 손을 들어 올렸다.
쇠약한 손등에 새겨진 핏줄이 빛을 받아 은은히 드러났다.
그의 입술이 느리게 열리며 마치 먼 과거의 회상을 꺼내듯 중얼거렸다.
"내 충실한 종복이여… 내 뜻을 잘 이행해 주었도다. 편히… 쉬도록 하라."
그 목소리는 힘이 없었으나 홀 안의 누구도 감히 숨을 내쉬지 못했다.
바실리우스 아우렐리안 황제.
반백 년 넘는 세월 셀레스티움 제국을 통치한, 살아 있는 황권의 화신이었다.
그의 이름은 곧 질서였고 그의 통치는 곧 셀레스티움 그 자체였다.
의전서기가 즉시 고개를 들어 외쳤다.
"성황 폐하 만세! 셀레스티움이여, 영원하여라! 이로써 공훈식을 마치겠습니다."
함성 대신 울림이 남았다.
황제의 말 한마디가 공기 속을 천천히 맴돌다 대리석 벽에 부딪혀 사라졌다.
황제는 세네카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옮겨지는 발끝마다 붉은 융단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세월의 무게가 그 뒷모습에 내려앉은 듯했다.
루크레티나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홀에는 숨소리와 천장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만이 남았다.
“또 피 웅덩이가 들어서겠군.”
누군가의 중얼거림.
그것은 마치 예언과도 같은 말이었다.
신흥 귀족의 발흥은 언제나 정치적, 군사적으로 피바람을 몰고 왔다.
루크레티나에게 그 말이 들렸을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을 뿐이다.
황제의 뒷모습이 홀 뒤편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루크레티나는 잠시 그 자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붉은 융단 위의 발걸음이 다시금 고요히 움직였다.
피와 명예, 충성과 사슬이 한데 엉킨 길.
그 위를 걷는 발끝은, 끝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장엄의 홀 문이 열렸다.
쏟아져 나온 공기는 황궁의 인위적인 향수 내음보다 서늘했다.
문앞을 지키던 부관 카시우스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정복을 입었음에도 그녀의 몸에서는 여전히 비릿한 전장의 쇳내가 배어 나왔다.
루크레티나는 멈춰 서지 않은 채 부관에게 짧게 지시했다.
"병력을 정비하고 재편성하라. 곧 이동한다."
부관은 멈칫거리면서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가문의 부활이라는 영광을 만끽하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
카시우스가 조용히 반문했다.
"각하. 이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발걸음이 뚝 멈췄다.
루크레티나가 고개를 돌렸다.
단정하고도 유려한 얼굴 위로 비스듬한 조소가 번졌다.
"어디로든. 우리는 제국의 검이다. 자네의 검이 자네에게 의문을 품는 걸 본 적 있나?"
카시우스는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관은 짧게 고개 숙였다.
"… 알겠습니다.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루크레티나는 그대로 장엄의 홀을 지나쳐 황궁을 나섰다.
카시우스는 조용히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동쪽은 끝났다.
이제 서쪽이 남았다.
자신의 완벽한 숫자를 틀어지게 했던 유일한 오점.
루크레티나는 품 안의 인장석을 꽉 쥐었다.
그녀가 몰고 갈 피비린내 나는 바람은 이제 대륙의 서쪽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