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벽한 청구서

<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14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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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2장. 차가운 전조

14화. 가장 완벽한 청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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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나가 붉은 융단 위를 걷고 있을 시각.

에드먼드는 집결지의 구름 위로 간간히 모습을 드러낸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긴장 속에서 곯아 떨어진 밤.

에드먼드는 홀로 깨어 있었다.


그는 어둠이 짙게 깔린 브로바렌 평원을 한참 응시했다.

그러고는 잠든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맨바닥에 망토 하나를 의지해 밤이슬을 맞는 처지.

타닥거리는 모닥불 불빛에 따라 병사들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는 잔뜩 웅크린 채 자는 루벤에게로 눈을 돌렸다.

방심한 표정에는 아직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순박함이 남아 있었다.


4월의 밤은 길고도 서늘했다.

마치 물기를 잔뜩 머금은 솜이불처럼 무겁고 축축한 침묵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새우잠을 자는 병사의 흘러내린 망토를 조용히 덮어주었다.


거친 숨소리, 잠꼬대,

그리고 장작 타는 소리.


에드먼드는 이 소란스러운 침묵을 지키기 위해, 밤새 뜬눈으로 어둠을 마주했다.




이튿날 새벽.

식사를 마친 코르반의 진영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뭐? 다시 떠들어봐. 뭐를 어떻게 한다고?"


루벤은 까치집이 지어진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소리쳤다.


코르반의 보급 물자를 무심하게 뒤적이던 관리의 손길이 딱 멈췄다.

두꺼운 양피지 철을 든 손이었다.


관리를 호위하던 덩치 큰 병사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살벌한 기세에 루벤이 흠칫하며 주춤거리자, 관리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촌놈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코르반의 군수 물자는 본대에서 통합 관리한다. 통합이라는 의미는 알고 있겠지?"

"이봐! 그건 우리 보급품이야! 네놈들이 뭔데…!"


루벤이 짐마차를 막으려 손을 뻗자 호위병 하나가 거칠게 그의 팔을 낚아채 비틀었다.

억센 완력에 제압당한 루벤은 고개를 돌려 악을 썼다.


"이봐 들! 다들 이리 좀 와 봐! 이 새끼들이 수작을 부린다!"


코르반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관리들을 에워쌌다.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포위된 관리의 얼굴에는 여유가 흘렀다.


그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펼쳐 보였다.


"이 촌 무지렁이들이. 군령장이다! 명령 불복종은 즉결 처형으로 다스린다!"


군령장.

그 무거운 단어 하나에 병사들의 기세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식어버렸다.


'처형'이라는 서슬 퍼런 협박 앞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무슨 일이시오?"


병사들 틈을 갈라 길을 내며 에드먼드가 걸어 나왔다.

아침부터 병사들의 발 상태를 점검하고 약을 챙겨 먹이느라 조금 늦은 참이었다.


관리는 에드먼드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샌님 같은 얼굴에, 먼지 묻은 옷차림.


그는 코웃음을 치며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보면 모르나? 군령장이다. 현 시간부로 너희들의 군수품은 본대에서 통합 관리한다. 그러니 잔말 말고 너희 지휘관에게…?"


거침없던 관리의 말문이 턱 막혔다.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에드먼드의 등 뒤에서 쑥 솟아오른 거대한 그림자, 가레스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위압감에 그는 황급히 자세를 고쳐 잡으며 짐짓 정중한 척 목소리를 깔았다.


"귀관이 지휘관이오? 군령장이 떨어졌으니, 병력을 물리고 협조해 주길 바라는 바요."

"군령장이라."


가레스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군령장이 아니라 도둑질 면허장이겠지."


정곡을 찌르는 말.

병사들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리자 관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욕적인 언사를 자제하시오. 군기는 엄정하오. 전시 상황이란 말이오!"

"엄정하다고?"


가레스는 말을 끊고 주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침부터 고주망태가 되어 비틀거리는 본대 병사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요란한 주사위 굴리는 소리.


가레스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관리의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게졌다.

그는 으드득 이를 갈며 꽥 소리를 질렀다.


"농담 따먹기나 하러 온 게 아니오! 당장 명을 집행하겠소!”

"좋소. 그리하시오."


대답은 관리의 예상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들려왔다.

사람 좋은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샌님 같은 청년이었다.


에드먼드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관리에게 다가갔다.

그 무해한 얼굴을 마주하자, 잔뜩 독이 올라와 있던 관리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암, 군기는 엄정한 법. 군수 징발과 지휘권은 모두 참모장 각하의 고유 권한. 그걸 위임받은 귀관이 절차를 밟겠다는데 누가 막겠소."

"그, 그렇소."


그의 얼굴에 대놓고 떨떠름한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원스럽게 말했다.


"좋소. 당장 이행하시오. 허나, 딱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만."

"뭐요?"


에드먼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처럼 순진한 눈빛을 가장해서.


"분명 징집 명령서에는 '최초 열흘 치의 보급은 영지에서 자체 조달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었소. 맞소?"

"그렇... 소."


징집령에 적힌 문구 그대로였다.

관리는 에드먼드의 의중도 모른 채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먼드의 입가엔 짓궂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체 조달이란 곧 자체 소비를 뜻하는 법. 그렇다면 집결 이후 열흘간, 이 물자의 소유권과 사용권은 오직 우리 코르반 병력에게 있다는 뜻이 아니겠소?"

"......!"

"그러니 본대에서 통합 관리를 하겠다면 그리하시오. 단, 규정대로 앞으로 열흘간은 우리 허락 없이 그 누구도 이 군수품에 손댈 수 없소. 영민하신 참모장께서 봉신의 신성한 권리와 의무를 침해하실 리는 없을 테니 말이오."


그제야 관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곳 브로바렌 평원에서 목적지인 라드 요새까지는 길어야 닷새 거리.

그런데 열흘 동안 '손도 댈 수 없는' 물자라니.


게다가 '통합 관리'를 하겠다고 큰소리 친 상황이었다.

고로 징발과 운송은 오롯이 본대 병력의 몫이었다.


결국 본대는 코르반의 짐을 뺏기는커녕, 제 발로 걸어와서 목적지까지 고이 모셔다드리는 수고로운 짐꾼 노릇을 자처한 꼴이 된 셈이었다.


에드먼드의 논리적인 압박에 몰린 관리가 얼굴을 붉혔다.


"이보시오! 지금은 전시요! 한가롭게 봉신의 권리 따위를 따질 때가 아니란 말이오. 본대의 필요에 따라 모든 물자를 긴급히 징발하는 건 당연한 조치요!"


전시와 긴급.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에 주위 병사들이 술렁였다.


하지만 에드먼드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관리를 쏘아보았다.


"긴급이라. 좋소. 한 가지만 더 묻겠소."


에드먼드는 천천히 한 걸음 내디디며 관리와의 거리를 좁혔다.


"지금이 정말로 본대의 보급이 바닥나 아군의 물자라도 징발해야 할 만큼 긴급한 상황이오?"

"그건… 전시에 대비하여 선제적으로…"


관리는 핼쑥한 얼굴로 변명하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이상하단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린 어제 막 이곳 브로바렌 집결지에 도착했소. 그런데 벌써 본대의 군량이 동났단 말이오?"


에드먼드의 날카로운 지적에 관리의 말문이 막혔다.

엄숙한 표정을 지은 에드먼드의 입이 날카롭게 열렸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본대 보급 책임자의 심각한 무능이거나 직무 유기요. 출정도 하기 전에 식량이 바닥난 군대라니. 당장 참모장 각하께 보고하여 책임자를 문책해야 마땅한 사안 아니겠소?"

"아니, 그게 아니라…”


책임자 문책이라는 말에 관리가 사색이 되었다.


에드먼드는 관리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긴급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상부의 명확한 명령서까지 무시하며 아군의 물자를 취하려는 행위.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아시오?"


관리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건 징발이 아니라, 약탈이오."


약탈.

그 단어가 주는 무게에 관리는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오오!!"


병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구경하던 옆 부대 병사들까지 혀를 내두르고 휘파람을 불어댔다.

순식간에 구경꾼이 불어나며 판이 커졌다.


반면, 처지가 역전된 관리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가셨다.

징발은커녕 손도 못 댈 남의 짐만 낑낑대며 끌고 돌아갔다간, 성질 더러운 드라몬드 자작에게 치도곤을 당할 게 뻔했다.


허나 에드먼드의 논리에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그러나… 하지만…"


관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의미 없는 단어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에드먼드는 얼어붙은 관리의 손에서 두꺼운 양피지 철을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얼떨결에 문서를 뺏긴 관리의 얼굴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만 가득했다.


에드먼드는 루벤을 돌아보며 짧게 손을 까딱였다.


"루벤, 펜과 잉크."

"넵!"


두 손으로 펜을 받쳐 든 루벤의 눈동자는 마치 성화의 기적을 영접하는 신도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숨을 죽인 채 에드먼드의 손끝을 주시하는 병사들의 시선.

좌중의 이목이 펜촉 하나에 집중된 순간이었다.


에드먼드는 거위 깃펜의 끝을 능숙하게 다듬으며 툭 내뱉었다.


"공사가 다망하신 귀관들을 위해, 내가 친히 군수품 목록을 정리해 드리리라."



사각, 사각.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양피지 위로 검은 글씨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식량 자루의 개수부터 취사도구, 공병용 삽, 심지어 예비용 못 하나의 숫자까지.

펜촉이 춤을 출 때마다 빈 여백이 빈틈없이,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채워져 나갔다.


루벤과 가레스, 심지어 멍하니 서 있던 관리조차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물 흐르듯 유려하면서도 기계처럼 정밀한 필체에 구경꾼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춤추는 거위 깃펜.

잉크 한 방울 튀지 않는 완벽한 제어.


별 힘도 안 들이고 순식간에 장부를 채운 에드먼드가 펜을 멈췄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문의 이름이 들어간 서명을 멋들어지게 휘갈겼다.

그러고는 빙긋 웃으며 넋이 나간 관리에게 장부를 떠넘겼다.


"확인해 보시오. 아마 오차는 없을 거요."


귀족의 서명이 박힌 공식 문서.

이제 이 종이 쪼가리는 라드 요새에 도착하는 순간, 본대가 물어내야 할 완벽한 '청구서'가 될 터였다.


"와아아아!!"


병사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주먹 한번 휘두르지 않고 펜대 하나로 거둔 압승.

이 낯설고 신기한 광경에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종이 한 장으로 판을 뒤집는 묘기.

병사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장부가 청구서로 뒤바뀌는 기적'에 열광했다.


"자, 어서 가서 참모장 각하께 보고하시오. 코르반의 군수품은 ‘정히’ 수령하였다고."


에드먼드의 담담한 미소.

가레스와 루벤의 흥분으로 붉게 상기된 얼굴.


상반된 두 표정이 아침의 유쾌한 반란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있었다.


"와아아아!!"


병사들의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 터져 나왔다.

통쾌한 승리였다.

에드먼드도 그 뜨거운 분위기에 취해 잠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관리들의 등이 멀어지고, 차가운 이성이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아차.'


환호성은 여전했지만, 에드먼드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이 방금 건드린 것은 단순한 보급관이 아니었다.

옹졸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자의 '역린'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