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감옥

<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15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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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2장. 차가운 전조

15화. 황금의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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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국의 수도 임페리움 마그눔.

그곳에선 개선 장군 루크레티나 발레리안을 위한 황제의 연회가 열렸다.


징소는 황제의 개인 정원.

일개 장수를 위한 연회에 황제의 정원이 열린다는 건, 그 자체로 특별한 총애의 증거였다.


“후우.”


하지만 정작 루크레티나의 표정은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유리잔에 담긴 최상급 와인을 살짝 맛보았다.

입안에 맴도는 향은 그윽하게 혀에 감겼다.


술에 조예는 없지만 루크레티나가 취한다는 건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희고 투명한 목선이 미묘하게 붉어진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그토록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찬란하게 빛나기에, 감히 시선을 오래 머물 수 없는 태양 같은 존재.


사람들은 그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녀를 흘깃거리며 이번 공훈식에 대해 속삭였다.

그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루크레티나는 그들의 속삭임을 개의치 않았다.


“누님.”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루크레티나의 입술이 미세하게 씰룩였다.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이 자신을 그렇게 부를 수 있었다.


“에밀, 왔구나.”


그녀의 유일한 혈육.

에밀리오 발레리안이었다.


그는 누이와 같은 검은 정복 차림이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정제된 그림 같았다.


에밀리오는 누이와 닮았으나, 결은 전혀 달랐다.

그가 내뿜는 공기는 서릿발 같은 칼날 대신 훈훈한 봄바람에 가까웠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

단정하고 온화한 미소.


제국 아카데미아의 이름난 수재이자 젊은 장교들의 귀감이었다.


하지만 루크레티나에게 그는 오직 한 가지 의미였다.

그녀의 세상에서 유일한 쉼터.


그가 다가오자 연회장의 시선이 일제히 흔들렸다.

특히 어린 귀족 영애들의 눈빛이 유독 반짝였다.


그는 싱긋 웃으며 잔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당연하죠. 누님의 역사적인 순간에 제가 빠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역사라.”


루크레티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에게 작위의 재서임은 감격이 아닌 필연이었다.


다만, 아직 미완이던 동생의 정치적 기반이 회복된 것.

그 한 가지가 그녀에게는 유일한 의미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붉게 물든 입술로 잔을 살짝 대었다가 뗐다.


눈 끝에 장난기가 비쳤다.

그것은 오직 에밀리오만이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다.


“역사적인 순간이란 건 이런 물렁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지. 보통은 전장이거나… 침대 위겠지.”

“누님, 또 놀리시는군요.”


에밀리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루크레티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와 유리잔을 부딪쳤다.


수많은 비단 빛이 얽힌 화려한 공간.

검은 정복의 두 사람은 오히려 한 점의 그림자처럼 깊게 빛났다.


“아, 발레리안 경. 여기 계셨군요.”


그때, 은회색 정복을 입은 한 여성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부드러운 아마빛 머리와 청명한 인상.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관록이 부족한 젊은 관료나 사관생도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자리의 그 누구라도 그녀를 모를 리 없었다.


루크레티나는 즉시 부복했다.

그러나 여인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녀를 제지했다.


“발레리안 경, 이러시면 부담스럽습니다.”

“예.”


루크레티나는 멈칫하다 가볍게 목례했다.


“우장(愚將) 루크레티나 발레리안, 황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자기소개를 하시네요.”


그녀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황제의 고명딸이자, 황위 계승 서열 2위의 황녀.

바로 클라우디아 아우렐리아나였다.


과하지 않은 기품.

서글서글한 인상.

그리고 타인을 편하게 만드는 친화력.


그녀는 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인이자, 루크레티나가 유일하게 마음의 거리를 좁힌 황족이었다.


“제국 최고의 명장께서 스스로 우장이라 칭하시다니요.”

“하찮은 재주로 역도들을 토벌했을 뿐입니다.”

“겸손하시기까지.”


클라우디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미소 지었다.


“발레리안 소공자께서 매번 경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던 이유가 여기 있었군요. 정말 대단하세요.”

“잠깐, 클라우… 아니, 전하.”


클라우디아가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내가 틀린 말 했나요?”


두 사람은 마치 제국 아카데미아 시절, 사관생도로 지내던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그들의 짧은 투닥거림을 지켜보던 루크레티나의 가슴 한켠이 묘하게 시큰거렸다.


에밀리오의 웃음.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이들과 누리는 행복한 시간.


그 찰나를 지키기 위해 수천, 수만의 목숨을 제 손으로 지워내고 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감상에 길게 잠기지는 않았다.

설령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수억의 목숨을 제 손으로 짓밟아 지워버리는 길일지라도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감상은 짧았다.

조용히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에 루크레티나가 고개를 돌렸다.


백발의 노신사, 세네카 벨라리우스 후작.

황제의 최측근이자 제국의 안살림을 쥐고 흔드는 ‘회색 여우’가 다가오고 있었다.


“……”


아카데미아 시절 그를 교장으로 모셨던 에밀리오와 클라우디아의 등이 본능적으로 꼿꼿하게 굳었다.

세네카가 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공이 컸소, 발레리안 백작.”

“과찬입니다, 각하.”


루크레티나는 몸을 낮추어 악수를 받았다.

손끝이 맞닿는 순간, 노정객의 시선이 뱀처럼 그녀를 꿰뚫었다.


“성황의 은총은 하해(河海)와도 같지.”


바닥을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명심하시오, 발레리안 경. 그 물은 마르기 시작하면, 모래 위의 피보다도 빠르게 증발하는 법.”


찰나의 정적이 연회장을 무겁게 눌렀다.

루크레티나는 짧게 숨을 내쉬며 차분한 미소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소관은 그저 성황 폐하의 검입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가 노회한 정객을 마주 보았다.


“그 물이 마르든 넘치든, 검은 그저 주인의 뜻이 닿는 곳을 벨 뿐.”

“음.”


세네카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작은 체구였으나, 그 뒷모습에는 제국을 짊어진 자 특유의 서늘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후우.”


클라우디아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혀끝을 살짝 내밀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분 앞에 서면, 뱀 앞의 개구리 신세네요.”

“그야, ‘질서’라는 단어가 사람의 형체를 빌린 분이셨으니까.”


에밀리오가 반사적으로 맞장구쳤다.

제국 아카데미아는 사관생도들에게 철저한 규율을 강요하기로 정평이 난 기관이었다.


특히 세네카가 교장을 역임하던 시절은 그 기강이 가혹하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 시절을 견뎌낸 두 사람에게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루크레티나는 세네카와 맞잡았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지고 가느다랬지만, 위엄이 배어 있는 손.

수십 년간 제국을 지탱해 온 노정객에게 어울리는 손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세네카의 손은 그저 제국을 입맛대로 저울질하는 승냥이의 손일 뿐이었다.


루크레티나는 짧게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술기운 탓인지 생각이 너무 깊어지고 있었다.


“이거 참. 대단한 전승이었소.”


세네카와는 결이 달랐다.

지독하리만큼 날카롭고, 메마른 목소리.


제국 원로원 참의원장이자 황제의 이복동생, 리키니우스였다.


온화하게 입매를 올린 미소와 단정하게 다듬은 수염, 그리고 절제된 몸짓.

제국 정치의 중추,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자였다.


“젊은 영웅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자리로군. 그리고… 제국의 미래를 짊어질 주역들까지 말이야.”

“숙부님.”


클라우디아가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리키니우스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가볍게 턱을 까딱였을 뿐이었다.


그는 다시금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온기 대신 서늘함이 감돌고 있었다.


루크레티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참의원장 각하.”

“겸손도 지나치면 예의에 어긋나는 법이지. 하지만 그 절도 있는 기개만큼은 참 보기 좋구려.”


형식적인 축하와 격려.

하지만 루크레티나는 피부를 타고 오르는 한기에 작게 몸서리쳤다.


권력, 그리고 오직 정치적 승리만을 탐하는 자.

눈앞의 사내 역시 제국의 ‘정치 괴물’ 중 하나였다.


제국 원로원 참의원장.

허울은 좋지만 실권은 미비한 그 직함 하나에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오늘은 그대를 위한 날이니 마음껏 즐기시오. 앞으로도 제국을 위해 건승하길 바라겠소.”


리키니우스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는 다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뱀처럼 매끄럽고, 칼날처럼 위험한 행보였다.


클라우디아는 정말 아찔하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빨리 장군님 곁을 떠나야겠어요. 오시는 분들마다 하나같이 제국의 거물들이시니.”


물론 그런 말을 내뱉는 그녀 자신 또한 제국의 거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처럼 스스럼없이 대중에게 다가가는 붙임성 좋은 황녀는 제국 역사상 전례가 없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녜요, 농담이에요. 사실 저도 장군님과 에밀…”


클라우디아가 서둘러 말을 고쳤다.


“… 발레리안 소공자와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잘 없으니까요.”


클라우디아는 지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국의 성스러운 불꽃을 짊어진 자.

그 화려한 수식어 뒤에 숨겨진 자신의 처지를 비웃는 듯한, 씁쓸한 자조가 섞인 표정이었다.


클라우디아는 제국 아카데미아를 차석으로 졸업한 당대의 인재였다.

하지만 졸업 후 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녀는 아무런 관직이 없는 ‘무관(無官)’의 처지였다.


황태자의 정치적 견제.

그녀의 길고도 어두운 회랑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을 연금된 듯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화려한 연회장 한구석에서 날카로운 균열이 일었다.



“꺄아악!”


젊은 여인의 비명.

격식과 품위가 지배하는 황실 연회장에서는 결코 들려서는 안 될 불협화음이었다.


찰나의 순간, 감미로운 선율을 연주하던 악단이 손을 멈췄다.

귀족들의 우아한 담소도 단칼에 베인 듯 끊겼다.


넓은 연회장에 물을 끼얹은 듯한, 부자연스럽고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히익…”


옆에 서 있던 클라우디아가 거칠게 숨을 삼켰다.

그녀는 루크레티나의 옷자락을 부서질 듯 꽉 움켜쥐었다.


손끝은 물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루크레티나의 팔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잠시 후.

정적을 깨고 연회 관리 서기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것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예우의 외침이 아니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공포를 간신히 억누르며 내뱉는, 비명에 가까운 단말마였다.


“세, 셀레스티움의 달의 수호자이자, 성황의 은총으로 충만하신…”


서기의 목소리가 보기 흉할 정도로 덜덜 떨렸다.


“도미티안 아우렐리안 태자 저하, 납시오!”


선언과 동시에, 연회장의 모든 숨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찬란했던 황금빛 공기는 순식간에 잿빛으로 얼어붙었다.


음악도, 미소도, 웅성거림도 사라진 지독한 적막.

그 정적을 뚫고 루크레티나는 등 뒤를 스치는 서늘한 살기를 느꼈다.


“어찌 이리들 얼어붙어 있는가? 아, 내가 초대장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 다들 기분이 상한 모양이지?”


나직이 이죽이는 목소리가 연회장을 채웠다.


제국을 집어삼킬 가장 흉포한 황금의 짐승.


그것이 마침내 목줄을 끊고, 연회장 한복판으로 난입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