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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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은 짧고 날카로웠다.
품격 있는 황궁의 연회장에서는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소음.
모든 시선이 소동의 발원지인 입구 쪽으로 쏠렸다.
연회장을 가득 채우는 타오르는 황금빛 머리카락.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렬한 그 색채가 좌중을 단숨에 압도했다.
“맙소사…”
숨죽인 비명들.
소동이 일어난 곳은 신분이 낮은 귀족들이 모여 있는 구역.
질서를 유지해야 할 근위병들은 석상처럼 굳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순간, 연회장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탄탄한 체격과 늘씬한 키.
조각처럼 수려한 이목구비 사이로 루비같이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황금사자’.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자에게 걸맞은 위용이었다.
하지만 그 찬란한 사자의 가죽 아래 웅크린 본성은 전혀 달랐다.
그것은 굶주린 야수였다.
거칠고 잔혹하며,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집어삼키기 위해 존재하는 포식자.
“과인을 빼놓고 황궁에서 연회라니, 섭섭하구려. 내 집 안방에 들어오는데 굳이 초대장 같은 종이 쪼가리는 필요하진 않겠지?”
“태자 저하… 제발… 흑.”
도미티안은 옆에 서 있던 젊은 귀족 영애를 짐승이 먹이를 채듯 한 손으로 거칠게 낚아채고 있었다.
그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인의 귓가에 뜨겁고 흉포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사냥감을 음미하듯, 그의 거친 손끝이 여인의 가녀린 몸을 노골적으로 훑어 내려갔다.
여인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는 그저 공포에 질려 몸을 웅크리는 것뿐이었다.
뚝.
악사의 손이 멈추며 현악기의 선율이 비명처럼 끊어졌다.
화려했던 연회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눅눅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생전 처음 겪는 수치심과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여인.
그 숨 막히는 고요를 더럽히는 것은 오직 황태자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뿐이었다.
“광인(狂人) 태자…”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 같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제국의 황태자 도미티안 아우렐리안을 표현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적확한 이름이었다.
에밀리오가 다급히 누이를 향해 속삭였다.
“누님. 자리를 피하시지요.”
“그럴 필요 없다.”
루크레티나는 황태자가 이 연회장에 나타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오랜 전장에서의 감각이 정확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황태자는 자신을 찾아왔다.
저 불쌍한 귀족 영애의 능욕도, 자신을 도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리라.
게다가.
"아윽…"
옆에서 들려온 소리는 신음이라기보다 억지로 삼켜 넣은 비명에 가까웠다.
황녀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루크레티나의 옷자락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꽉 붙잡고 있었다.
황녀의 품위나 체면을 신경 쓸 겨를은 이미 사라졌다.
눈빛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원초적 공포심만이 남아 있었다.
루크레티나는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황태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 사이로 순식간에 길이 열렸다.
“… 크흐.”
도미티안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는 시시해진 사냥감을 거칠게 밀쳐내고 흐느적거리듯 루크레티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크레티나는 두세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매끄럽게 부복하며 황태자에게 예를 올렸다.
공기마저 팽팽하게 굳었다.
“루크레티나 발레리안, 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오, 발레리안 경. 제국이 벼린 가장 날카로운 검이여. 편히 일어나시오.”
“성은이 망극합니다.”
도미티안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는 두 팔을 벌리며 과장된 몸짓으로 외쳤다.
“그래, 경은 이번에도 얼마나 쳐 죽인 거지? 사천? 오천?”
궁정에서는 감히 들을 수 없는 난폭한 말투였다.
주변의 귀족들은 벙어리가 된 듯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루크레티나는 동요의 기색 없이 입술을 뗐다.
“정확히는 사천일백구십오 명입니다.”
도미티안은 짧게 휘파람을 불며 웃었다.
“오오, 훌륭하군. 목을 쳤나? 구덩이에 묻어버렸나? 아니면, 꼬챙이 형에 처했나?”
루크레티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답했다.
“절반은 수급을 베었고, 절반은 본보기를 위해 말뚝 위에 세워 참살했습니다.”
비명조차 삼켜진 정적 속에서, 몇몇 귀부인들이 현기증에 휘청이며 몸을 지탱했다.
황태자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틈새로 킥킥, 웃음이 흘러나왔다.
“좋구려. 언젠가 과인도 그대를 따라 출정해야겠소. 언제 그 광경을 내게 보여줄 생각이오? 과인은 기다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조만간, 약속드리겠습니다.”
“좋소. 아주 좋소.”
도미티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걸린 미소.
그것은 짐승이 사냥감을 핥기 전 내뿜는 본능 같은 웃음이었다.
황태자는 시종의 손에서 황금의 술잔을 거칠게 낚아챘다.
찰랑거리는 금빛 액체가 그의 손가락을 적셨다.
아랑곳하지 않고 느릿하게 루크레티나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포식자가 사냥감을 몰아넣듯, 숨 막히는 접근이었다.
그녀의 등 뒤.
에밀리오의 어깨가 튀어 오르듯 움찔했다.
“이 경사스러운 날에, 이 몸이 친히 헌작(獻酌) 하지 않으면 상승장군에 대한 예가 아니지.”
도미티안의 크고 거친 손아귀가 루크레티나의 가녀린 어깨를 으스러지라 움켜쥐었다.
단단하게 정제되어 있던 그녀의 상체가, 억센 악력에 의해 불시에 휘청거렸다.
“……”
순간, 에밀리오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반사적으로 그의 오른손이 왼쪽 허리춤을 더듬었다.
텅 빈 허리띠만이 손바닥에 허망하게 잡힐 뿐이었다.
황태자는 에밀리오의 살기 어린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품 안에 갇히다시피 한 루크레티나를 나른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쥐고 있던 황금잔을 천천히 그녀의 쇄골 아래로 가져갔다.
“장군, 한잔하시오. 내 특별히 황족만이 마실 수 있는 귀한 술을 준비했소이다.”
차가운 금속 잔의 가장자리가 루크레티나의 기품 있는 가슴 윗부분을 꾹 눌렀다.
얇은 정복 너머로 딱딱한 이물감이 무례하게 파고들었다.
찰랑.
잔이 기울어지자, 끈적한 황금빛 액체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검은 정복의 옷깃이 적셔졌다.
그 안쪽의 희고 투명한 피부를 뱀처럼 타고 흘러내렸다.
오싹한 한기가 가슴골을 훑고 지나갔다.
루크레티나의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고요했다.
수치심도, 당혹감도 없었다.
그저 지독하리만큼 완벽한 무표정일 뿐.
“……!”
그녀의 등 뒤, 에밀리오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솟구쳤다.
존경하는 누이의 수모에 이성이 끊기기 직전.
그가 바닥을 박차고 튀어 나가려던 찰나였다.
탁.
루크레티나의 하얀 손이 벼락처럼 뻗어 나가 황금잔을 낚아챘다.
그대로 고개를 젖혀 독한 증류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
미간에는 단 한 줄의 미동조차 일지 않았다.
꿀꺽.
이내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비워진 잔.
다시 도미티안의 손바닥 위에 조용히 놓였다.
루크레티나는 술에 젖은 입술을 닦지 않았다.
대신, 아주 느릿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
그것은 굴욕을 견뎌내는 패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상대의 광기마저 비웃으며 집어삼키는, 진정한 포식자의 서늘한 미소였다.
루크레티나의 입술이 옅게 움직였다.
“성은, 깊이 새기겠나이다.”
“… 후, 크흐흐.”
루크레티나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잠시 뚫어지게 응시하던 황태자는 이내 스르르 팔을 풀었다.
“크흐흐… 흐흐.”
도미티안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숨 막히던 연회장의 긴장이 일순간 풀리는 찰나였다.
쫘악!
예고도, 살기도 없었다.
단지 손바닥이 허공을 가르는 파열음만이 적막을 찢었다.
“컥.”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황태자의 무자비한 완력에 휘말린 에밀리오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중심을 잃은 몸이 볼품없이 뒤로 날아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처박혔다.
쿵.
둔탁한 충돌음이 울렸다.
에밀리오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황태자는 바닥을 뒹구는 에밀리오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터뜨리던 웃음기는 거짓말처럼 증발해 있었다.
그는 낮게 이죽거렸다.
“발레리안 가문은 개를 훈련할 때 무는 법부터 가르치나 보군.”
“크윽…”
에밀리오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붉게 부어오르는 뺨을 감싸 쥐었다.
수치심과 분노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도미티안은 다시금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좋소. 아주 좋은 밤이외다! 자, 연회를 즐기시오, 제국의 영광들이여! 과인은 이만 물러가겠소.”
그는 술기운을 즐기듯 느슨하게 걸음을 떼다가, 문득 루크레티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약조를 잊지 마시오, 발레리안 백작.”
대답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루크레티나의 굳게 다문 입을 보며 광인 태자는 다시 한번 폭소를 터뜨렸다.
쾅!
황태자가 거칠게 황금의 문을 열고 나간 연회장.
술 냄새만 남고, 현악의 잔향은 얼음처럼 굳었다.
그가 사라지자 차갑게 얼어붙었던 장내의 공기가 서서히 풀려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낮은 한숨들.
그리고 거대한 위압감에서 벗어난 숨결들이 조금씩 연회장의 불빛을 되살려갔다.
“에밀!”
한쪽 편에서 황태자에게 짓밟힌 귀족 영애를 돌보던 클라우디아가 떨리는 다리를 다잡고 에밀리오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꿋꿋이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했다.
클라우디아의 팔은 덜덜 떨리고 있었으나 망설임은 없었다.
“……”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보다, 경애하는 누님의 위기의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에밀리오는 짓눌려 있었다.
피처럼 붉은 분노와 수치가 눈동자 속에서 서서히 번져갔다.
“누님,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신경 쓸 것 없다.”
루크레티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강한 술기운이 목을 스쳤지만,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녀는 젖은 옷깃을 손끝으로 가볍게 털어내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정도의 고통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고서야 승리를 거두던 날들에 비하면.
이 정도의 수치 또한 대수로울 리 없었다.
패배의 순간, 무너져 내리는 전열을 지켜보던 때에 비하면.
그 무엇도 전장의 고통과 비탄에 비할 바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의연히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클라우디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 송구하오나, 소관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예, 발레리안 경. 편히 쉬세요.”
에밀리오를 부축하던 황녀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가 서려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황녀는 남매를 번갈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황족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이는 루크레티나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황족 또한 클라우디아가 유일했다.
루크레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후우.”
남은 것은 젖은 옷깃과, 무겁게 가라앉은 달빛뿐.
루크레티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숨이 막힐 듯한 어둠이었다.
광인의 축배가 올려진 지금.
이제 제국은 물론, 대륙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륙의 서쪽,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고요한 평원조차도 예외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