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곡도의 용병

<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17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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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2장. 차가운 전조

17화. 쌍곡도의 용병




추천BGM

출처 : Youtube_The Riverside Tavern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시간을 다시 돌려 마르셀 왕국의 한쪽 귀퉁이, 브로바렌 평원.

사색이 된 관리들이 군수품, 아니 청구서를 끌고 드라몬드의 본대 막사로 복귀한 직후였다.


와장창!


사령부 천막 안에서 무언가 요란하게 깨지는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밖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이어지는 괴상한 고함에 어깨를 움츠리며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드라몬드의 보복은 신속했다.

코르반의 부대를 최전방 '정찰조'로 배속시킨다는 명령서가 날아온 것이다.


이를 전하러 온 관리는 아까의 굴욕감을 잊지 않고 표정으로 잔뜩 돌려주었다.


‘너무 들뜨고 말았구나.’


에드먼드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형 알베릭의 신신당부를 집결 첫날부터 어기고 말았다.


“낭패로군…”


에드먼드가 씁쓸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머리 위로 낯선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참모장 놈이 말한 그 맹랑한 애송이가, 바로 그대인가?"


서리처럼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 에드먼드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한겨울 설산에서 방금 걸어 나온 듯, 두꺼운 털옷으로 온몸을 감싼 장신의 여성이 서 있었다.


화창한 4월의 햇살 아래서는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듯한 차림새.

에드먼드의 시선은 옷차림이 아닌 허리춤에 고정되었다.


기묘하게 휘어진 쌍곡도(雙曲刀) 두 자루가 교차해 허리 뒤로 매달려 있었다.

언제든 역수로 뽑아 상대의 목을 떨굴 수 있는 지극히 실전적이고 살벌한 배치였다.


그녀는 털옷 사이로 드러난 눈을 가늘게 뜨고 에드먼드를 훑었다.

흥미와 경계가 반반씩 섞인, 먹잇감을 탐색하는 야생 동물의 눈빛이었다.


에드먼드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애송이인 건 맞습니다만, 맹랑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후."


그녀는 짧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털장갑을 낀 투박한 손을 불쑥 에드먼드에게 내밀었다.


"아르나바즈."

"에드먼드 코르반."


두 사람의 손이 가볍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녀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 에드먼드를 응시했다.


잠깐의 정적.

이내 건조하게 마른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사람을 베는 것과, 글자를 베는 것. 어느 쪽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 엉뚱함 속에는 폐부를 찌르는 서늘한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매사 침착하던 에드먼드조차 순간 숨을 멈췄다.


“……”


에드먼드가 입을 달싹였지만,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해 침묵했다.

아르나바즈가 비릿하게 웃었다.


"생각해 둬. 다시 물어볼 테니까."


그녀가 몸을 돌리자 두꺼운 털옷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불어온 서풍에 섬짓한 한기가 깊게 베어 있었다.




"푸엣취!"


루벤이 요란하게 재채기를 터뜨리며 비틀거렸다.

콧물을 훌쩍이며 옷깃을 여미는 그 모습에 에드먼드는 뺨을 긁적였다.


"작은 통쾌함의 대가가 너무 크군."


루벤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코를 쓱쓱 문지르고는 활짝 웃어 보였다.


"뭘요. 아까 그 자식들 표정 썩어들어가던 거 생각하면... 에취!"


루벤은 코를 팽 풀고는 양팔을 비비며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데…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요?"


불안함이 서린 눈빛이었다.

평생 쟁기질만 하던 이들에게 색적이니 정찰이니 하는 군사 용어는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아침의 소동 끝에 '정찰조'로 배속된 코르반의 병력들.

그들은 라드 요새로 향하는 길목에 넓게 산개하여 걷고 있었다.


“엣취! 에이씨, 더럽게 춥네…”


루벤이 코를 훌쩍였다.

그의 뒷모습에는 군장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었다.

수레가 감당하던 개인 장구류의 무게가 오롯이 병사들의 등 위로 전가된 탓이었다.


명분은 챙겼으되 실리는 잃었다.

놈들에게 한 방 먹이긴 했으나, 결국 제 살을 깎아 먹은 꼴이었다.


“제법 험지로군.”


가레스는 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평원을 벗어나자 좁은 가도를 따라 제법 험한 굴곡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징집병들에게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에드먼드는 자책하듯 고개를 숙였다.


‘자중해야겠어.’


옆에서 나란히 걷던 가레스가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가볍게 에드먼드의 등을 내리쳤다.


"뭘 의기소침해 있나.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군수품을 몽땅 뺏기고 분통이나 터뜨리며 걷고 있었을 거다. 뭘 했어도 결과는 같았다."

“맞습니다 도련님. 잘 하신 겁니다.”


코르반의 병사들도 가레스의 의견과 다르지 않았다.


짐은 무거워졌을지언정 자존심과 보급품은 지켰다.

그 자부심이 그들의 발걸음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 건 사소한 문제지. 암. 더 큰 문제는… 바로 저거야."


가레스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계절을 역행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따사로운 봄볕 아래서 두터운 털옷을 두른 여인.

하지만 그 투박한 털옷조차 그녀가 가진 야성적인 매력을 완전히 가리지는 못했다.


“예술이군. 선이 살아있어. 날것 그 자체야.”


그저 예쁘다, 아름답다의 표현이 아니었다.

거칠고 단단한 전사로서의 기품이 있었다.


두툼한 옷 속에 몸을 묻었지만 몸의 곡선은 제법 태가 났다.


건강하게 햇볕에 그을린 가무잡잡한 피부.

짙은 눈썹 아래 자리 잡은 단정한 입술.


“허리춤에 달린 흉악함까지. 대단한 매력이다.”


허리에 매달린 기이한 형태의 쌍곡도(雙曲刀) 두 자루만 아니었다면, 뭇 병사들이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보려 기웃거렸을 법한 미인이었다.


가레스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에드먼드의 옆구리를 능글맞게 쿡쿡 찔러댔다.


"이봐, 저 여자는 정체가 뭐지? 어디서 저런 여자를 데리고 온 건가. 제법 태가 나지 않나."

"가레스. 엘리는 어쩌고요?"


에드먼드가 쓴웃음을 짓자 가레스가 황급히 정색했다.

출정 전야, 엘리가 목에 걸어준 성화 문양의 목걸이가 햇살에 반짝였다.


“어험! 아니, 난 엘리뿐이지. 이건 그저 전술적인 관찰일 뿐이다.”


가레스는 다시 시선을 아르나바즈의 뒷모습으로 돌렸다.


“마레움의 영웅답군. 전장에 나서자마자 미녀 용병부터 꼬이다니.”

“비꼬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에드먼드는 가레스의 너스레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르나바즈.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그녀는 어느새 코르반의 병사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걷고 있었다.


딱히 에드먼드가 동행을 요청한 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돕겠다고 살갑게 나선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는 길이 같아 발을 맞출 뿐이라는 무심한 태도.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예사롭지 않았다.


“……”


능숙하게 바람의 결을 읽어 풍향을 읽었다.

지형의 높낮이를 눈에 담고 가끔은 들판에 남겨진 짐승의 배설물을 뒤적여 흔적을 쫓았다.


그 모든 과정이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이 불편한 동행을 계속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서로 닿을 듯 말 듯 미묘한 거리를 유지한 채.

문득, 아까 그녀가 던졌던 질문이 뇌리를 스쳤다.


‘사람을 베는 것과 글자를 베는 것.’


그녀가 묻고 싶은 본질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답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고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들은 한참을 더 걸었다.

태양의 고도를 가늠하던 에드먼드가 손을 들어 부대를 정지시켰다.


"전원, 저 위로 집결. 잠시 쉰다."


그가 지목한 곳은 가도가 굽어지는 지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반쯤 무너진 옛 감시탑 터였다.


탁 트인 시야, 등 뒤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줄 낡은 석벽.

그리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숲으로 이어지는 도주로까지.


그야말로 교본에 언급할 법한 최적의 휴식 장소였다.

물론 루벤을 비롯한 징집병들은 그저 다리 뻗을 곳이 생겼다며 좋아할 뿐이었다.


아르나바즈만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주변을 훑어보는 그녀의 눈에 흥미롭다는 듯한 이채(異彩)가 서렸다.


휴식 시간에도 에드먼드는 쉴 틈이 없었다.

그는 부대에서 가장 발이 빠른 터너를 불렀다.


"터너, 이걸 본대로 가져가라."


에드먼드가 건넨 것은 오는 내내 꼼꼼하게 기록한 양피지 보고서였다.

수원지(水源池)의 정확한 위치, 마차 바퀴가 빠질 수 있는 습지대와 우회로.

갈림길마다 남겨둔 아군만의 표식에 대한 설명이 빼곡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라.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본대가 길을 잃는다. 조심해서 다녀와라."

"예. 도련님."


터너는 긴말 없이 허리춤에 물주머니 하나를 더 챙기고는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려 나갔다.


점점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에드먼드는 잠시 씁쓸한 상념에 잠겼다.

마지막까지 고심하다 차출한 그는, 징집되던 날 만삭인 아내의 손을 놓고 온 예비 아버지였다.


‘살아서 아이 얼굴을 봐야 할 텐데.’


에드먼드는 세차게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냈다.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본대의 길라잡이 역할에 집중해야 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앞.

개개인의 절절한 사연 따위는 갈려 나가는 모래알에 불과했다.


황량한 고원 위에 무너진 감시탑이 묘비처럼 서 있었다.


그 사이로 쓸쓸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폐허의 그늘에, 코르반의 병사들이 바람을 피해 삼삼오오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스산해진 마음에, 에드먼드는 잠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그 흙먼지 날리는 길 끝을.


"전장에 나서는 건 오랜만인가 보군."


이제껏 침묵을 지키던 아르나바즈가 불쑥 입을 열었다.

행군과 정찰의 피로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한 그 익숙한 모습에, 에드먼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전장에 익숙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온 것 같은데."


아르나바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차가운 북풍 속에 핀 꽃처럼 서늘한 미소였다.


에드먼드가 그 의중을 살피듯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예리한 짐승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아직 감각은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야. 전장을 분석하는 전술가의 감각이."


그녀의 한마디에 에드먼드가 손을 움찔거렸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춤에 달린 쌍곡도로 시선을 옮겼다.


아르나바즈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난 그저 5년 전, 마레움에서 그대를 봤을 뿐이니까. 물론 깃발의 색깔은 달랐지만."


정체불명의 여인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 용병이었다.

5년 전에는 마르셀이 아닌, 제국의 녹을 먹었다는 소리였다.


아르나바즈는 먼 과거를 회상하듯 황량한 고원 아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뗐다.


"그때, 그대의 계책에 휘말려 전공을 세울 기회를 놓치고 말았지. 제국이 그대의 목에 건 현상금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사실, 알고 있나?"

"금시초문이군요. 대단한 일을 한 기억도 없습니다만."


에드먼드는 짐짓 너스레를 떨며 물었다.


"그래서, 제 목은 얼마입니까?"


무덤덤한 목소리.

하지만 그의 눈빛은, 아르나바즈의 쌍곡도 자루를 예리하게 쫓고 있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이 고요한 언덕은, 순식간에 둘 중 하나만이 살아 내려갈 수 있는 '생사의 투기장'으로 변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