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피, 타오르는 뱀

<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18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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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2장. 차가운 전조

18화. 쌍곡도의 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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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outube_The Riverside Tavern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대답 대신 짧은 침묵이 흘렀다.

고원의 메마른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훑고 지나가며 서글픈 소리를 냈다.


아르나바즈는 마치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발견한 아이처럼 에드먼드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리춤에 매달린 쌍곡도의 자루를 톡, 톡, 건드렸다.

규칙적인 박자.

마치 에드먼드의 남은 수명을 세는 소리처럼 들렸다.


“재밌군."


한참 만에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서늘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기 목숨값을 묻는 사냥감이라니. 보통은 살려 달라고 빌거나, 아니면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바쁠 텐데.”

"도망친다고 당신을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에드먼드는 여유로운 척 어깨를 으쓱였다.


셔츠 안쪽으로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축축하게 흘러 내렸다.

다만 겉으로 드러난 표정만큼은 짐짓 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물건의 가치를 묻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흥정을 하든, 포기를 하든 할 테니까요."

"흥정이라."


아르나바즈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끝에는 서늘한 검기가 서려 있었다.

동시에 명백한 호의 또한 섞여 있었다.


그녀는 위협적으로 쥐고 있던 쌍곡도에서 손을 떼고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제국은 굴욕을 잊지 않아. 특히 다 잡은 승리를 눈앞에서 놓치게 만든 장본인이라면 더더욱. 그들은 그대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부와 명예, 그리고 제국의 시민권까지 약속했지."


그녀가 고양이처럼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에드먼드의 귓가에 닿을 듯 나직이 속삭였다.


"제국 금화, 50솔린."


에드먼드는 순간 멎으려는 숨을 간신히 참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상상 이상이었다.

그 돈이면 척박한 변방의 번듯한 농가 열 채를 사고도 남을 거금이었다.


잘만 굴린다면 시골 마을의 영주 노릇을 하며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말 그대로 인생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금액이었다.


‘걸어다니는 봉신 계약서 처지군.’


5년 전 그날.

셀레스티움 제국이 자신에게 얼마나 깊은 원한을 품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르나바즈는 허리춤에서 쌍곡도 한 자루를 슬쩍 뽑아 들었다.

차가운 검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훑으며 읊조렸다.


"그러니 조심하라고. 마레움의 영웅. 그대의 목을 제국으로 가져가야 할 이유가 있는 자들은 충분히 차고 넘치니까.”

"아르나바즈, 당신은?"


에드먼드의 조심스러운 도발에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돈에는 관심 없어. 그저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바람결에 그녀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춤을 췄다.


병사들이 피운 모닥불에서 타닥, 장작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하고도 그리운 냄새가 두 사람을 감쌌다.

그것은 전장에 선 자들에게만 허락된, 고단하고도 그리운 향기였다.


"검으로 타인의 인생을 베어내는 일. 그 끝에 과연 무엇이 남는지. 그리고 내 손바닥엔 무엇이 고이는지."


그녀의 독백은 시처럼, 혹은 기도처럼 들렸다.

철학적인 자문.

오늘 아침, 그녀가 에드먼드에게 던졌던 질문과 결이 닿아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에드먼드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에드먼드 코르반, 그대에게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제게요?"


에드먼드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직 답을 구하지 못했거든. 5년 전 품었던 의문을.”


아르나바즈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마치 빛바랜 과거의 기억을 서랍 속에서 꺼내본 자의 눈이었다.


"마레움의 계책. 그땐 다들 당신을 겁쟁이라 비웃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대는 적을 속이고 아군을 보존했다. 명예를 모르는 귀족인가 싶었지"


아르나바즈의 시선이 휴식을 취하는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작은 솥을 걸고 허브티를 끓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병사들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서려 있었다.


그 평온한 풍경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 병사들의 눈빛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들은 당신을 믿고 있어. 지켜야 할 명예도, 사람도 없는 지휘관에겐 보내지 않는 눈빛이지.”

“과찬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에드먼드의 겸손에 아르나바즈는 고개를 저었다.


“저 드라몬드를 봐. 해야 할 일은커녕,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작자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자리에서 그대를 따라 걷고 있는 거야.”

"그렇습니까."


에드먼드가 대답하며 그녀를 보았을 때,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아르나바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두꺼운 털옷의 옷깃을 턱밑까지 단단히 여미고 있었는데, 그 손아귀에 핏기가 가실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추운 건가?’


에드먼드의 머릿속에 의아함이 스치는 찰나였다.


휘이잉.


매서운 고원의 칼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무너진 감시터의 돌가루가 회오리치며 두 사람을 맹렬히 스쳐 지나갔다.


“……!”


동시에, 이어지던 아르나바즈의 말이 뚝 끊겼다.

마치 지금까지의 대화가 환청이라 느껴질 정도로, 거짓말처럼 말이다.


"아르나바즈?"


대답은 없었다.

대신 딱, 딱,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사시나무 떨리듯 격렬하게 경련하는 그녀의 몸.

입술은 순식간에 핏기를 잃었다.


"추워…"


초점이 풀린 동공.

방금까지의 날카롭던 총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이성이 얼어붙은 듯한 눈동자.

남은 것은 그저 야생의 본능뿐이었다.


탁.


그녀의 손이 에드먼드의 멱살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무너지듯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히 묶어 두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풀려 내려왔지만, 그건 지금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잠깐, 아르나바즈…”


에드먼드는 반사적으로 물러서려다 멈췄다.

맞닿은 몸을 통해 전해진 한기가 섬뜩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너무 추워…"


잔뜩 움츠러든 아르나바즈는 에드먼드의 몸을 생명줄처럼 끌어안고 몸을 기댔다.

장신에 다부진 체격의 그녀였지만, 에드먼드의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떠는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에드먼드는 말없이 망토를 넓게 펼쳐, 덜덜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춥습니까? 일단 모닥불 쪽으로 가시죠."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에드먼드에게 몸을 맡겼다.

그 밀착된 모습에 병사들 사이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와 환호가 번졌다.


에드먼드의 부축을 받으며, 그녀는 파랗게 질린 입술로 귓가에 간신히 속삭였다.


“특이 체질… 이라…”


말끝이 힘없이 흐려졌다.

그제야 에드먼드는 의문이 풀렸다.


4월 중순의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두꺼운 방한복을 겹겹이 껴입은 이유.

그녀에게 이 고원의 바람은 단순한 추위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칼날이었다.


에드먼드는 서둘러 그녀를 안다시피 하여 모닥불 앞으로 옮겼다.

루벤이 이 기회를 놓칠세라 촐싹대며 끼어들었다.


"세상에! 사모님, 아니 형수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미리 감축드립니다!"

"쓸데없는 소리. 환자다. 빨리 뜨거운 차나 가져와."

"어... 넵."


에드먼드의 단호한 어투에 루벤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모닥불의 열기가 닿자, 창백했던 아르나바즈의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


에드먼드가 건넨 따뜻한 허브티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마신 뒤에야,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 하는 눈치였다가, 에드먼드의 구겨진 옷깃을 보고는 멋쩍은 쓴웃음을 지었다.


"깜짝 놀랐습니다. 지병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녀를 만난 이후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에드먼드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르나바즈는 핏기 없는 미소를 지었다.


"한빙체(寒氷體)라는 특이 체질이야."

"한빙체… 처음 들어보는 말이군요."


아르나바즈는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것은 마치 찻잔에 담긴 온기 한 조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절박한 몸짓 같았다.


"내 고향의 말이야. 혈관에 얼음 조각이 떠다니는 저주지. 한기가 스미면 이성이 얼어붙어."

"불편함이 크시겠습니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고원의 바람에도 사경을 헤맨다면, 북방의 노셀란이나 에녹 같은 혹한지에서의 활동은 꿈도 꾸지 못할 터였다.


그녀가 왜 비교적 온난한 지역에서만 용병 생활을 하는지, 그 이유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찌 보면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이런 체질을 가진 여인이 전장을 떠도는 용병이 되었을까.


에드먼드는 잠깐 의문을 던져 보았다.

그녀는 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미안하군. 그대에게 관심은 있지만, 이런 육체적인 관심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생각보다 품이 따뜻하더군."

"제가 몸에 열이 좀 많은 체질이긴 합니다."


쌍곡도를 다루는 냉철한 용병이자,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색가.

그러면서도 추위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이국적인 여인.


아르나바즈는 찻잔의 온기 대신 에드먼드의 체온을 기억하려는 듯 픽 웃었다.


"우리, 제법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은데."

"영광입니다. 언제든 난로로 써주십시오. 금화 50개짜리 최고급 난로입니다."


에드먼드의 너스레에 아르나바즈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는 사양하지 않겠다는 듯, 자연스럽게 에드먼드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어디선가 짓궂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보나 마나 루벤의 소행이리라.


혈색이 돌아온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그녀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에드먼드를 올려다보았다.


"따뜻해서 좋군. 성능이 제법이야."


그녀가 장난스럽게 에드먼드의 구겨진 옷깃을 만지작거리자, 곁에 있던 루벤을 비롯한 병사들이 참지 못하고 짓궂은 야유를 쏟아냈다.

고원의 찬 바람조차 잠시 잊게 만드는, 훈훈하고도 소란스러운 휴식이었다.


"크흠! 거, 날씨 참…!"


가레스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크게 토해냈다.

그는 젊은 남녀의 묘한 기류를 못 본 척해주려는 듯,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등을 돌려 고원 너머를 응시했다.


"지휘관이 청춘사업으로 공사다망하시니, 늙은이라도 경계를 서야지. 원."


가레스는 투덜거리며 먼 지평선으로 시선을 던졌다.

4월의 청명한 하늘, 평화롭게 흐르는 흰 구름.


하지만 다음 순간, 가레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잠깐."


가레스의 낮은 중얼거림에, 장난치던 루벤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본능적으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에드먼드가 묻자, 가레스가 손가락을 들어 바람이 불어오는 북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 구름 말이야. 모양이 좀 이상하지 않나?"


에드먼드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라기엔 지나치게 검었다.

게다가 밑동이 땅에 박혀 있었다.


바람을 타고 검은 띠가 뱀처럼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때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아르나바즈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기름 타는 냄새."

"예?"

"그리고… 썩은 피 냄새가 섞여 있어."


그녀의 눈빛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그것은 모닥불의 따스한 연기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터전이, 혹은 누군가의 목숨이 타오르는 명백한 재앙의 신호였다.


"불이다. 저 앞 구릉지 너머 무언가가 불타고 있다."


가레스의 나직한 경고와 동시에, 에드먼드는 품속에 있던 지도를 급하게 꺼내 펼쳤다.

짧았던 휴식은, 그것으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