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평온, 긴 그림자

<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19화

by 밍당

✿《<설계자의 전쟁론> 1화 보기》



<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2장. 차가운 전조

19화. 짧은 평온, 긴 그림자




추천BGM

출처 : Youtube_Strings of Eternity 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성화력 1015년 4월.


후대의 역사가들이 '전환기'라 부른 이 시기는, 사실 징후 없는 재앙의 연속이었다.


대홍수,

은광의 발견,

그리고 금화 순도 저하 사건.


작은 물줄기가 모여 거대한 파도가 되듯, 제국은 조용히 혼란의 바다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친절한 전조나 신탁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각자의 어둠 속에서, 손끝으로 시대의 형태를 더듬어갈 뿐이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바꾸게 될 루크레티나 발레리안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휴식을 덤덤히 받아들이려 했다.

라비나르 반란 토벌과 공훈식의 소란이 지나간 뒤, 비로소 찾아온, 짧고 귀한 평온이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오랜만에 돌아온 자신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집은 성벽의 두번째 안쪽, 하급 귀족 거주지에 있었다.

장식 하나 없는 2층 석조 건물.


흙 한 줌 없는 돌벽에 끈질기게 달라붙은 담쟁이넝쿨만이 유일한 치장이었다.

화려했던 발레리안 가문의 현재를 보여주는 듯한, 건조하고 투박한 안식처였다.


바실리우스 황제의 치세에 제국은 눈부신 중앙집권화를 이루었다.

그 결과, 귀족들에게서 영토를 회수하고 작위만을 남겨주었다.


한마디로 봉신령 없는 명예직.

이번에 복권된 발레리안 가문 또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차라리 다행이군.’


하지만 루크레티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낫다고 여겼다.

관리할 땅이 없다는 건, 그만큼 얽매일 곳도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짧은 기억이 스쳤다.


부친이자 선대 발레리안 백작이었던 그 나약한 남자.

불타오르던 백작령과 성난 농민들의 함성.


모두 오래전의 일이다.

관리할 영지 따위, 이제 없는 편이 더 나았다.


괜히 숨을 고르듯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두꺼운 나무 현관문을 밀었다.


끼익.


낡은 경첩 소리가 고요한 집안을 흔들자, 안쪽에서 반가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딘가 그리운 목소리였다.


“루카 아가씨!”


세상에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세월 묻은 목소리에는 언제나처럼 오래된 온기가 배어 있었다.


그늘 속에 묻혀 있던 마른 그림자가 햇살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손에는 여느 때처럼 낡은 걸레가 들려 있었다.

그 한결같은 모습에 루크레티나는 픽, 하고 실소를 흘렸다.


“마리사, 청소 같은 건 사람을 쓰라 했잖아.”

“아가씨. 제 역할이 바로 그 청소하는 사람이랍니다.”


그녀는 포근하게 웃었다.

루크레티나의 세상이 아직 색채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던 시절부터 곁을 지켜온 사람, 마리사였다.


젊은 날엔 보는 이가 숨을 죽일 만큼 빼어난 미모를 가졌던 그녀.

흐르는 세월은 그녀에게 또 다른 깊이를 선물했다.


화려한 꽃잎은 졌어도 그 자리에 그윽한 기품과 온기가 내려앉아, 마치 봄 햇살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너진 발레리안 가문을 홀로 지탱하는 마지막 사용인.

그리고 루크레티나에게 남은 유일한 집안의 숨결이었다.


“……”


루크레티나는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지도 어느덧 반년.

작년 가을부터 이어진 군사 작전의 끝에 강철 같은 정신력도 조금은 닳아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문지방을 넘는 순간, 오랫동안 단단히 굳어 있던 피로가 살짝 풀리는 듯했다.


“미안. 오자마자 들렀어야 했는데.”

“아뇨, 아가씨의 군공은 이곳까지도 다 들려옵니다. 아, 차를 내올게요.”

“응.”


마리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화덕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루크레티나는 조용히 눈에 담았다.


오래 함께한 혈육 같았다.

조금 굽은 등마저도 정겨워 그녀는 괜히 코끝을 슥 만져보았다.


그날 저녁.


에밀리오와 클라우디아가 준비한 조촐한 환영식이 루크레티나의 집에서 열렸다.

황녀와 백작, 그리고 백작가문의 소공자가 함께한 식탁치고는 놀라울 만큼 소박했다.


식탁 위에는 마리사의 완고한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절반은 채소로, 나머지는 소고기와 닭고기 요리로 채워져 있었다.


푸성귀가 지나치게 많은, 딱 그녀 다운 식단이었다.

루크레티나는 포크를 들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사, 나를 들판의 염소로 만들 셈이야? 너무 푸르잖아.”


마리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레이디는 식탁 앞에서 불평하지 않는 법이랍니다.”


루크레티나는 피식 웃으며 당연하게도 고기부터 집어 들었다.


오래간만에 실력을 발휘한 마리사의 솜씨 덕분에 그 어느 요리 하나도 궁정에 내놔도 손색이 없었다.

특히 대륙의 진귀한 음식을 마음껏 먹고 자란 클라우디아였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조리법을 배우고 싶어요.”


황녀가 조리실에 들어서는 모습을 상상한 다른 세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정작 클라우디아만 멀뚱히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그렇게 루크레티나에게 주어진 짧은 휴식은 조용히, 그러나 느리게 흘러갔다.


오랜만에 찾아온 마음의 고요.

포근한 햇짚으로 채운 낡은 침대 위에서 맞이하는 아침.


마리사가 내온 향긋한 허브티 한 잔.

그리고 창문을 열 때마다 스며드는 햇살의 냄새.


그녀는 직접 먼지를 털고 창문을 닦으며 집 안에 다시 사람의 온기를 불어넣었다.

전장의 부름이 닿기 전까지 그 고요를 천천히 음미하듯 즐겼다.




마리사와 함께한 여유로운 시간도 잠시였다.


집에 돌아온 지 닷새째 되는 날, 마리사의 놀란 듯 목소리를 높였다.

루크레티나는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조용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황궁에서 전령이 온 것이었다.

문이 열리고, 헐렁한 백색 린넨 셔츠를 걸친 그녀가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그 순간 전령의 발걸음이 약속이라도 한 듯 멎었다.

뺨 위로 가느다랗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줄기, 그리고 셔츠 깃 사이로 어렴풋이 드러난 유려한 쇄골선.


‘제국의 검은 장미’라는 서늘한 이명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무방비할 정도로 나른한 자태였다.

전령은 넋을 잃은 듯 굳어 있다가, 이내 황급히 시선을 허공으로 비껴냈다.


“어흠.”


마리사가 짧은 헛기침과 함께 서둘러 그녀의 옷깃을 여몄다.

하얀 살결이 천 뒤로 감춰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전령이 깍듯하게 경례를 올리며 입을 뗐다.


“발레리안 백작 각하, 세네카 경의 전언입니다. 금일 정오까지 내무성 접견실로 오시라 합니다. 새로운 군단 편제에 관한 일이라 하셨습니다. 시간에 맞춰 마차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전령이 돌아간 뒤, 루크레티나는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내무성이라니.

그녀와는 인연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제국 내무성은 말 그대로 국내 행정과 민생, 그리고 치안을 다루는 기관이다.

전쟁성의 군무대신이라면 몰라도, 세네카가 있는 자리는 군권을 통제할 권한이 없다.


아무리 제국의 권신이라 해도 다른 문벌 귀족들은 그런 월권을 쉽게 허락하진 않는다.

그녀는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 마리사가 들고 온 옷을 받아 들었다.


단정하게 차려입는 것이 레이디의 기품이라며 종알종알 잔소리를 늘어놓는 마리사의 말은, 언제나처럼 한 귀로 흘려보냈다.




제국 내무성의 인장이 새겨진 황금빛 마차가 어떤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외성을 차례로 통과했다.


마차 안, 루크레티나는 홀로 앉아 있었다.


문득 차창 너머의 천을 살짝 들어 바깥 풍경을 엿보았다.

마리사가 옆에 있었다면 분명 교양 없다고 꾸중을 들었을 행동이었다.



“……”


제국의 자부심, 팔중성벽(八重城壁)이 창밖을 스쳐 갔다.

이백 년간 쌓아 올린 견고한 돌의 파도.


하지만 루크레티나의 눈에 비친 그 안쪽은 이미 곪아 있었다.

최근 발생한 라비나르의 반란이 그 증거였다.


원인은 고작 서류 한 줄, 누군가의 안이한 서명이 담긴 세율 인상안이었다.

총독은 세금을 쥐어짜는 데는 과감했으나, 낫을 든 신민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빨리 도망쳤다.


황궁에 가까워질수록 도로는 매끈해졌지만, 그 길을 걷는 이들의 표정은 유난히 짙은 그늘이 고여 있었다.


“후우.”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길가에서 매질당하는 어린 노예 소녀의 마른 팔 위로, 희미한 낙인이 보였다.

열 대엿살이나 되었을까. 가느다란 팔이 더욱 가녀리게 보였다.


제국은 팽창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바실리우스 황제의 치세에 최대 영토를 일구었으나, 이제는 기마 민족과 동방 제국이 쳐놓은 그물망에 갇혀 서서히 마모되는 중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

위정자들은 늘 그렇듯 가장 쉬운 답을 꺼냈다.


전쟁.

그들에게 전쟁은 선포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쉬운 놀이였다.


하지만 루크레티나가 아는 전쟁은 달랐다.


병참, 편제, 사기, 그리고 외교전.


그 모든 요소를 정교하게 맞물려 '패배의 여지'를 지워나가는 설계의 과정.

그 고통스러운 계산 끝에 겨우 손에 쥐는 것이 승리였다.


그러나 지금의 제국은 오직 칼끝의 힘으로만 모든 문제를 뚫으려 한다.


“……”


멀어지는 성벽을 보며 루크레티나는 서늘한 예감을 씹어 삼켰다.


제국이 선택한 마지막 해법이자, 가장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

오늘따라 유독 기묘하게 느껴졌다.




황궁 서쪽, 제국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내무성.

황궁을 에워싼 7대 행정기관 중에서도 그 위용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도로와 치안, 도시 행정 전반을 거머쥔 이곳의 수장은 세네카 벨라리우스.

문벌 귀족들의 견제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자였다.


건물은 수장인 세네카의 취향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대리석 기둥과 황금빛 돔.

정문에 새겨진「질서와 정의」라는 문구 아래로, 금빛 제복을 입은 근위병들이 기계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 서슬 퍼런 정제함 속에서 루크레티나는 비릿한 권력의 냄새를 맡았다.

사람들이 이곳을 경외와 악의를 담아 이렇게 불렀다.


‘소황제의 집무실’


안내를 따라 들어선 복도에는 황제의 색인 붉은 융단이 끝없이 깔려 있었다.


그 권위의 색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걷는 오만함.

차가운 대리석 벽을 타고 반사되는 흰빛이 눈이 시릴 만큼 번쩍였다.


서류를 든 관리들이 숨죽여 오가는 그 복도는, 마치 화려하게 치장된 무덤 같았다.


이윽고 도착한 접견실 앞.

세밀한 금세공이 촘촘히 박힌 육중한 나무문이 루크레티나를 가로막았다.


과할 정도로 화려한 취향.

솔직히 이런 장식을 즐기는 사내와 마주 앉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네카는 그녀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벽과 같은 인물이었다.

짧게 숨을 내쉬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문틈에서 묘한 기척이 흘러나왔다.


접견실의 공기와는 결이 다른 온도.

부드러운 비단 향이 얇은 막처럼 공기를 덮었다.


“어머.”


단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묘한 우아함이 스며 있었다.


루크레티나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피비린내보다 더 위험하고, 지독하게 달콤한 '맹독'의 향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