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2장 | 제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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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단 한 마디.
허나 그 짧은 탄성 속엔, 등골을 스치는 기묘한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
대단히 기품 있는 여인이었다.
은빛 비단 외투가 부드럽게 흘렀지만 걸음엔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어두운 자주빛 머리카락이 얇게 물결쳤고 상체에서 떨어지는 매끈한 선이 허리를 스쳤다.
피부는 햇빛에 닿아 희고 투명해 보였다.
입술엔 옅은 붉은빛이 번져 있었다.
루크레티나보다 약간 큰 키였다.
하지만 몸은 균형이 잡혀 있어 과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저 이 여인을 떠올리면 될 것 같았다.
그녀는 깊은 보랏빛에 적갈색이 스민 눈으로 루크레티나를 바라보았다.
빛이 스칠 때마다 눈동자엔 미묘한 결이 번졌다.
속눈썹은 길고, 부드럽게 휘어 정갈한 선 하나처럼 떨어졌다.
그런 눈이 루크레티나에게 고정된 순간, 붉고 투명한 입술이 조용히 떼어졌다.
“제국의 검이시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본관을 알고 있소?”
여인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엔 교양과 자신감, 그리고 계산이 뒤섞여 있었다.
“대륙 변방의 촌부라도 각하의 무용담을 모른다 말하진 못할 겁니다. 이번 원정의 무훈은 저희 같은 상인들 사이에서도 자자합니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모라 상단을 이끄는, 이벨린 모라라 합니다.”
그녀는 오른손을 가슴께에 얹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루크레티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엔 경계와 호기심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제국의 인사법은 아니군. 에녹의 사람인가?”
“예.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한미한 태생이라 예법이 서툽니다. 부디 용서를.”
제국 북서쪽, 교역과 금화로 번성한 도시 연합.
미인이 많다더니 과연,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루크레티나는 속으로 짧게 납득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용무는 다 보셨소?”
“예, 각하.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녀는 다시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걸음마다 결이 있었고, 우아한 기품이 얇게 따라붙었다.
루크레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뒷모습을 좇았다.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부드러움 속에 숨은 칼날처럼, 어딘가 치명적이고, 불길한 매혹.
쉽게 헤아릴 수 없는 깊이.
마치 잠깐 틈 사이로 심연의 표면이 드러난 듯한 기분이었다.
세네카와의 접견은 짧았다.
두 사람 모두, 불필요한 말로 시간을 낭비할 성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루크레티나는 잠시 숨을 고를 만큼의 충격을 받았다.
전령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로 ‘새로운 군단의 편제’에 관한 논의였다.
라비나르 반란 이후, 제국은 깨달았다.
황제의 뜻이 즉각 닿는 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새로운 특임 군단의 창설이 결정되었다.
루크레티나가 이끌던 정예군을 중심으로 이번 라비나르 자치령에서 피해를 입은 잔여 병력을 재편성했다.
통상 제국의 한 군단은 전투병 구천 명에, 보급·공병·의무병 등 지원 병과 육천 명을 더해 총 만오천 명의 규모로 편성된다.
그러나 이번에 창설되는 특임 군단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전투병 육천, 지원 병과 이천. 도합 팔천 명에 불과한 작은 군단이었다.
하지만 제국에서 황제 직속으로 움직이는 군단은 이 반쪽짜리 군단이 유일했다.
그리고 그 군단의 지휘봉이 발레리안 백작 루크레티나의 손에 쥐어졌다.
서른도 되지 않은 장수에게 내려진 전례 없는 중책이었다.
“어째서 소관에게 이런 막중한 자리를?”
“물론, 경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싶소. 그러니…”
세네카는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특임 군단은 평시, 내무성이 직접 관할하는 예하 부대로 편성되오.”
하얀 눈썹 아래 감춰진 타오르는 눈동자.
세네카의 시선이 날카롭게 루크레티나를 꿰뚫었다.
“평시 통제권은 재무대신이 임명한 부사령관에게 귀속되지. 수도 임페리움 마그눔의 치안 유지, 이단 색출, 그리고 황실 경호를 맡을 것이오.”
전장에 투입될 때에만 예외가 있었다.
그때에 한해 지휘권은 루크레티나에게 돌아왔다.
명목상 사령관은 그녀였지만, 실권은 이 노회한 정치가의 손아귀에 있었다.
‘늙은 승냥이의 계략이군.’
그제야 루크레티나는 세네카의 의도를 읽었다.
그 노정객은 이번 기회를 틈타 군권에 손을 대려는 것이었다.
내무성이 아무리 막강하다 한들, 그 권세는 행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군사력이 없는 권력은 언제나 절름발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달랐다.
‘특임 군단’이라는 이름 아래, 수도에 머무는 병력의 절반을 자신의 손에 넣은 것이다.
루크레티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이 자리는 명예였다. 그리고 굴레였다.
특별임무가 부여되지 않는 한, 그녀가 쥔 지휘봉은 공허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에 나서지 않는 이상, 그녀도 그녀의 군대도 세네카의 명에 묶이게 될 터였다.
“다른 대신들도 찬성했습니까?”
이런 무도한 안건을 그들이 순순히 받아들였을 리 없었다.
특히 전쟁성의 군무대신이라면 결사 반대했을 것이다.
세네카는 잠시 미소를 그렸다.
입가에 걸린 선은 움직였지만,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안건은 섭정이신 태자저하의 의지요.”
그 한마디에 공기가 식었다.
루크레티나는 뒷목을 스치는 냉기를 느꼈다.
며칠 전, 연회장에서의 웃음이 떠올랐다.
광기에 가까운 그 미소와, 귓가에 스친 낮은 목소리.
“약조를 잊지 마시오, 발레리안 백작.”
세네카는 지금도 자신의 계산이 완벽하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크레티나는 알았다.
이 늙은 여우가 헤아리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황태자는 결코 통제받는 인물이 아니다.
그의 광포한 구상 속에선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루크레티나는 세네카의 비릿한 웃음을 외면했다.
썩은 꽃의 향기처럼, 그 웃음은 오래 머물 것 같았다.
군단의 재편이 끝났다.
그리고 새로운 특임 군단, 즉 13군단의 창설이 공식 칙령으로 내려졌다.
서명은 황제 바실리우스의 이름으로 찍혔으나, 칙령을 반포한 이는 섭정 도미티안 황태자였다.
젊은 영웅 루크레티나 발레리안이 이끄는 새 군단.
그 이름이 궁정에서, 시장에서, 병사들의 막사에서 동시에 울려 퍼졌다.
“상승 장군이 드디어 날개를 달았다!”
많은 제국 신민들은 환호했다.
질서의 붕괴를 막고 제국에 새 영광을 가져올 이상적인 장군과 그의 군단이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달랐다.
그들은 조소했고, 질시했고, 원망했다.
루크레티나의 출신을 떠올리며 비아냥을 섞은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은 차갑고, 잔혹했다.
“황제를 치맛자락에 감싸 군권을 얻은 창부일 뿐.”
그녀를 비하하는 말들 중 하나였다.
발레리안 가문이 무너진 뒤.
그녀가 어린 동생 에밀리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의 궁정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었다.
황제가 그녀의 미모에 눈을 돌린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얻은 모든 것은 허명으로 쌓인 것이 아니었다.
칼끝으로, 실력으로, 피로 증명한 자리였다.
“……”
그녀는 아첨도, 조소도 귀에 담지 않았다.
그런 소음은 언제나 전장보다 한결 조용했으니까.
다만 에밀리오와 클라우디아, 그리고 마리사가 정성껏 마련한 작은 연회만은 마다하지 않았다.
에밀리오는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넸고, 클라우디아는 끝내 걱정을 감추지 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사는 눈시울을 붉히며 수없이 손수건을 들었다 놓았다.
그 따뜻한 격려와 조심스러운 위로 속.
잠시나마 그녀는 자신이 싸워온 길의 무게를 잊고, 조용히 잔을 들어 올렸다.
성화력 1015년 4월 20일.
황궁 앞 성황(聖皇) 광장은 인파로 넘쳐났다.
젊은 영웅을 위한 제13군단 창설식, 그리고 사령관 취임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봐, 밀지 말라고!”
십만을 품을 만한 광장이 사람으로 메워졌다.
머리 위로 깃발이 흔들리고, 호기심과 열기로 들뜬 목소리들이 파도처럼 일었다.
근위병들은 대열을 지키느라 연신 함성을 질렀고, 몰려드는 구경꾼들을 밀어내며 질서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허나, 정작 주인공인 루크레티나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광장을 메운 인파를 향해 시선을 두었지만 그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후.”
전장에서 첫 군공을 세운 지 열 해.
그녀는 잠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칼과 피, 절규와 함성.
그 모든 길이 영광스러웠던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그건 찬란한 승리가 아니라, 끝없는 심연을 걷는 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심연을 걸어온 발끝이 황금빛 단상 위에 서 있었다.
휘황찬란한 정복 차림, 금실로 수 놓인 휘장과 장식.
“……”
그녀는 자신의 복장을 훑어보았다.
그녀가 평소 즐겨 입던 검은 정복 대신, 이날의 루크레티나는 한낱 전시물처럼 서 있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였다.
도미티안과 세네카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침묵한 채 정해진 자리에 섰다.
“와아아!”
수많은 함성 속에, 황제 바실리우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를 대신한 이는 섭정, 도미티안 황태자였다.
그는 월계관을 쓰고 황좌에 앉아 있었다.
찬란한 빛이 그를 감쌌지만, 그 미소는 여전히 광포했다.
기쁨과 광기가 뒤섞인, 위험한 빛이었다.
“발레리안 백작 루크레티나, 하스 백작 라드미르, 앞으로!”
의전서기의 목소리가 광장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루크레티나와 부사령관 라드미르 하스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라드미르는 세네카의 측근으로 이름난 인물이었다.
반백의 머리에, 눈빛은 잘 벼린 칼날처럼 매서웠다.
그의 시선이 잠시 루크레티나를 스쳤다.
냉정하고, 계산적이었다.
루크레티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이 남자는 감시자였다.
그 눈은 전장에서 적을 찾는 눈이 아니라, 세네카를 대신해 그녀의 숨결을 기록할 눈이었다.
“제국의 달이자 위대한 섭정, 도미티안 아우렐리안 태자 저하께 경배하라! 새로운 특임 군단이 적에게는 피와 절망을, 제국에는 빛과 영광을 안기리라!”
의전서기의 우렁찬 목소리가 성황 광장을 진동시켰다.
순간, 인파가 폭발하듯 환호를 터뜨렸다.
깃발이 흔들리고, 먼지가 하늘로 솟구쳤다.
광장의 곳곳에선 커다란 빵덩이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다녔다.
황태자가 ‘은혜’라 부르며 풀어낸 막대한 재물의 일부였다.
물론 그 재산의 대부분은 귀족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누가 그 따뜻한 빵의 향을 탓하겠는가.
배고픈 신민들은 빵을 움켜쥐며 환호했다.
그 함성 속에서 황태자의 이름은 마치 축복처럼 울려 퍼졌다.
“특임 군단 사령관, 루크레티나 발레리안, 앞으로!”
의전서기의 외침이 울려 퍼지자, 루크레티나는 천천히 옥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광장의 열기와 함성이 멀어지고, 오직 발소리만이 대리석 위를 울렸다.
황좌에는 도미티안이 앉아 있었다.
턱을 괴고 있던 그가 느릿이 몸을 일으켰다.
황금빛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붉게 번졌다.
그 불빛 아래에서 황태자는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왔다.
루크레티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찰나가 억겁으로 느껴지는 시간.
그 순간, 도미티안이 몸을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 이제 내게 어떤 광경을 보여줄 거요?”
차가운 숨결이 피부를 스쳤다.
전장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한 공포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루크레티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미티안의 눈빛은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좋은 표정이오. 그대는 그대로 있어주시오.”
낮게 이죽거리는 목소리.
그와 동시에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모든 숨이 멎었다.
그리고, 응축된 함성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와아아아!!”
수십만의 목소리가 파도처럼 광장을 뒤덮었다.
쏟아지는 찬사와 환호.
그러나 루크레티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깨달았다.
자신은 영웅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광인의 손아귀에 쥐어진 채, 가장 높은 곳에 전시된 '화려한 인형'일 뿐이었다.
- 제 3장. 작은 불꽃들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