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21화
… 역사라는 거대한 밤을 밝히는 것은 태양의 찬란함이 아니다.
그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흩뿌려진, 서로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작고 위태로운 ‘점(點)’들이었다.
사람들은 훗날 그것을 시대의 발화(發火)라 칭송했으나, 그 불꽃이 처음 피어오르던 순간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그것은 영웅의 장엄한 포효도, 하늘을 가르는 화려한 섬광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흙투성이 길 위에서 고립된 채 길을 찾던 지휘관이 내뱉은 낮은 신음이었고,
피 냄새 진동하는 전장 한복판에서 고요히 눈을 감던 사색하는 용병의 마른 기침이었다.
또한 천칭의 눈을 재며 대륙의 운명을 금화의 무게로 가늠하던 황금의 주판이 내디딘 은밀한 발소리였다.
각자의 자리에서 외로이 타오르던 이 불꽃들을 하나의 거대한 화마로 엮어낸 것은, 기적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 훨씬 더 진부하고도 숭고한 것이었다.
바로 ‘서로를 믿는다’는 그 가냘픈 신념.
사지로 향하는 병사의 어깨를 짚어주던 설계자의 손길과, 그 설계를 믿고 자신의 생을 내던진 이들의 투박한 진심이 맞부딪쳤을 때, 우연이라 불렸던 불꽃은 비로소 세계의 축을 굴리는 필연의 동력이 되었다.
그 찰나의 불꽃들이 모여 대륙의 지도를 바꿀 거대한 이야기가 되리라는 사실을, 당시의 우리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사가(史家)는 기록한다.
마레움의 그림자로부터, 용병의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황금의 주판으로부터.
우연한 불꽃은 이미 발화하였고, 이야기는 그 위태로운 믿음의 불씨 위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 리시아 문드리안의 회고록, <불과 그림자의 연대기> 3장, 작은 불꽃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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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드 요새로 향하는 길목, 무너진 감시터.
에드먼드와 코르반의 병사들은 말을 잃었다.
능선 너머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무언가가 대규모로 타오르는 낯선 광경에, 병사들 사이로 동요가 일었다.
"불... 불이야! 저기 봐!”
공포는 전염병처럼 번졌다.
당장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자, 반대로 공포를 이기려 앞뒤 없이 달려들려는 자들이 뒤엉켜서 혼비백산이었다.
그 혼란을 단숨에 잠재운 것은 가레스의 일갈이었다.
"전원, 동작 그만!"
가레스의 지독한 훈련에 길들여진 병사들은 외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훈련의 성과가 이런 곳에서 발휘될 줄은 몰랐으나, 가레스의 서슬 퍼런 구령에 혼란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엉덩이 가볍게 놀리지 마라! 지금부터 우왕좌왕하는 놈들은 걷어차 줄 테다!"
가레스 특유의 걸쭉한 호통에 그제야 병사들의 눈에 이성이 돌아왔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겁에 질려 군장을 주섬주섬 싸던 루벤은 본보기로 가레스의 군홧발에 엉덩이를 걷어차였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펄쩍 뛰어올랐다.
소란은 거기까지였다.
웃음기가 사라진 정적 속에서, 에드먼드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조금 전까지의 유약한 청년은 온데간데없고, 차갑게 가라앉은 지휘관의 눈빛만이 루벤을 향했다.
"지금 당장 불을 끄고 연기를 지워라. 위치가 노출된다."
서릿발 같은 명령에 루벤이 우물쭈물 움직였다.
에드먼드는 곧장 시선을 돌려 아르나바즈를 바라보았다.
"아르나바즈.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성능 확실한 난로가 옆에 있었으니까."
가벼운 농담이었다.
전투를 앞둔 용병 특유의 여유리라.
에드먼드는 빙긋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이내 그 웃음기를 거두고 눈빛을 단단히 고정했다.
흥분은 금물이다.
저 언덕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직 모른다.
단순한 화재일 수도 있지만, 약탈자나 적병이 파놓은 매복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에드먼드는 짧게 고개를 끄덕여 상황을 정리했다.
"좋습니다. 저와 아르나바즈, 두 사람이 선두에 섭니다."
"이봐. 사령관이 제일 먼저 머리를 들이밀겠다니, 제정신이야? 차라리 내가 가겠다.”
가레스가 펄쩍 뛰며 말렸다. 하지만 에드먼드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렇다고 루벤 같은 이를 보낼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가레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건 이들을 훈련한 가레스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아는 사실이었다.
검은 연기 기둥 하나에 공황상태에 빠지는 부대.
이들이 처한 냉정한 현실이었다.
에드먼드는 그 불길한 검은 뱀을 힐끗 바라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가레스, 등 뒤를 맡기겠습니다. 병력 중 쓸만한 녀석들 열 명을 추려서 후미를 지켜주십시오.”
만약 저것이 적의 함정이라면, 포위망을 뚫고 아군의 탈출로를 확보하는 것은 가레스 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우리가 적에게 발목이 잡히면, 그때 당신이 혈로를 뚫어주십시오. 믿겠습니다.”
신뢰가 담긴 눈빛.
가레스는 거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만 해 봐라.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
에드먼드는 옅은 미소로 답하고는 데니스를 불렀다.
“데니스. 자네는 궁수들을 데리고 아래가 보이는 언덕을 선점하라. 반드시 시야가 확보되는 곳에서 대기해야 한다. 내 신호가 있기 전까진 위치를 옮겨서는 안 된다.”
“반드시 사수하겠습니다.”
경비대 출신의 우직한 데니스라면 본대의 방패 역할을 충분히 해낼 터였다.
에드먼드는 나머지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명심해라. 절대 등을 보이고 도망치지 마라. 혼자 뒤처지는 순간 적의 매복에 당한다. 차라리 앞으로, 아군이 있는 곳으로 뛰어라. 그래야 서로의 등을 지킬 수 있다."
에드먼드의 경고에 병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하며 흘렸던 피땀 어린 훈련들이, 오늘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음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저, 도련님. 저는요?"
그때, 루벤이 쭈뼛거리며 활을 들어 보였다.
달포 간의 지옥 훈련으로 겨우 시위를 당길 줄 알게 된, 엉성한 솜씨였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진지했다.
"루벤. 너는 가레스와 함께 후미를 지켜라."
"저, 저도 선두로 갈게요. 도련님 곁을 지켜야죠!"
루벤이 용기를 내어 외쳤다.
에드먼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넌 후미가 어울린다. 만약 우리가 전멸한다면, 너는 반드시 살아서 본대와 합류해라. 그게 발이 빠른 너에게 주어진 임무다."
"도망가라는 말이에요? 그건 싫어요!"
"루벤."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다그치지 않았다.
다만 단호한 손길로 루벤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겁하게 도망치라는 뜻이 아니다. 본대는 언젠가 이곳에 당도한다. 네가 살아남아야 그들이 길을 잃지 않는다. 너는 그 길을 여는 사람이다."
"도련님…"
루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드는 그제야 안심한 듯 빙긋 웃었다.
"표정 풀어라. 별일 있겠어? 늘 하던 대로, 산책이나 다녀오는 거다."
"네… 넵!"
루벤이 활을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의에 찬 눈빛에, 주변 병사들의 눈에도 순간 생기가 돌았다.
"자, 이동합시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에드먼드의 지시에 따라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두가 비장한 얼굴로 망토 깃을 여미고 있었다.
바람의 방향, 매캐한 연기 냄새, 그리고 험한 지형의 고저 차.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은 에드먼드가 바닥을 박차며 명령했다.
"전군, 이동!"
두 개의 그림자가 표범처럼 구릉지를 향해 내달렸다.
그들의 첫 실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아르나바즈의 움직임은 격이 달랐다.
그녀는 에드먼드보다 빠르고 가벼웠으며, 그러면서도 주변의 흔적을 놓치지 않고 주의 깊게 길을 주파했다.
에드먼드는 그녀의 등 뒤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천만다행이었다.
저토록 노련한 전사가 아군이라는 사실이.
저런 자가 5년 전, 자기 목을 노렸다는 것에 간담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에드먼드는 거친 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그는 뼛속까지 두뇌파였다.
그런 그가 지금, 불타는 마을을 향해 전력 질주를 하고 있다니.
운명이란 참으로 짓궂었다.
검은 연기가 뱀처럼 똬리를 틀며 피어오르는 저곳.
지도상 소규모 마을이 표시된 바로 그 지점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뺨을 스쳤다.
이제는 굳이 아르나바즈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매캐한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폐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르나바즈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문득 발걸음을 급히 멈춰 섰다.
"잠깐."
그녀가 팔을 뻗어 에드먼드를 제지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을 응시했다.
흙먼지 묻은 길바닥 위, 이질적인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아르나바즈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 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마디.
불과 얼마 전까지 누군가의 손에 붙어 있었을 것이 분명한 물체.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반지를 끼우던 약지.
누군가의 소중한 신체 일부가, 길가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다.
아르나바즈는 덤덤한 얼굴로 손가락을 집어 들고는 씁쓸하게 뇌까렸다.
"방금 잘려 나간 것이군."
"후우… 헉. 휴우. 그, 그렇군요."
에드먼드는 무릎을 짚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억지로 호흡을 짓누른 그는, 이내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의 손바닥 위를 응시했다.
"가느다랗군요. 그리고... 절단면이 투박합니다. 단번에 베인 게 아닙니다."
에드먼드의 미간이 깊게 팼다.
하얗고 가는 약지에는 은가락지가 주인을 잃은 채 그대로 끼워져 있었다.
혹시나 하여 주변을 살폈으나 짐승의 발자국 따위는 없었다.
오직 사람의 흔적뿐.
아르나바즈의 목소리가 그림자처럼 낮게 깔렸다.
"금전이 목적이 아니군."
에드먼드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보통의 도적이라면 반지를 빼내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겠지만, 그랬다면 날카로운 날붙이로 단번에 베어냈을 터였다.
하지만, 이 절단면은 끔찍할 정도로 너덜너덜했다.
마치 무딘 날로, 일부러 천천히 톱질하듯 잘라낸 흔적.
피해자가 느꼈을 극심한 고통과 공포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아르나바즈는 손가락을 바닥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비릿하게 이죽거렸다.
"놈들은 살육을 즐기고 있어."
에드먼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단순한 도적 떼가 아니었다.
배가 부르고 오만하며, 잔혹한 살육자들.
게다가 마을을 습격할 정도의 배짱과 규모까지 갖춘 놈들이었다.
그들이 칼을 든 이유는 생존이나 돈이 아니었다.
유희(遊戱).
그것이 두 사람이 내린 소름 끼치는 결론이었다.
아르나바즈가 날렵하게 불타는 목책을 뛰어넘었다.
그 뒤를 따르던 에드먼드의 시야를 매캐한 연기가 장막처럼 가렸다.
"흡."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에드먼드는 숨을 멈추고 자세를 낮췄다.
화마(火魔)의 잔열이 피부를 핥았으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였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진 죽음의 무도회였다.
마을의 공터와 불타는 집들 사이로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얼추 세어보아도 쉰 명은 족히 넘는 숫자.
노인과 아이, 남녀를 가리지 않은 무차별적인 학살이었다.
하지만 에드먼드의 눈에 밟힌 특이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시신들의 '위치'였다.
"멀리 가지 못했어."
아르나바즈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시신들은 마을 입구나 외곽으로 도망치려던 흔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집 문 앞이나 우물가, 좁은 골목에서 쓰러져 있었다. 삶의 터전이 그대로 무덤이 된 셈이었다.
"도망칠 틈조차 없었거나, 도망칠 구멍이 아예 없었거나."
에드먼드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보통의 약탈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이들은 마을 안에서 꼼짝없이 당했다.
이는 적들이 마을 전체를 동시에 포위하고, 신호와 함께 한꺼번에 들이닥쳐 제압했다는 뜻이다.
단순한 도적 떼가 아니다.
조직적인 움직임과 압도적인 머릿수. 이것은 명백한 군대의 방식이었다.
에드먼드는 바닥을 살폈다.
진흙 위로 수많은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깊이 파인 말발굽 자국과 징 박힌 군화 자국.
놈들은 무거웠고, 거침없었다.
우물가에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쓰러진 여인이 있었다.
반쯤 허물어진 문간에는 서로 엉켜 숯덩이가 된 아이와 성인의 소사체(燒死體)가 나뒹굴었다.
에드먼드는 그 참혹한 광경을 묵묵히 눈에 담았다.
애도나 비분에 찬 절규는 없었다.
그저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볼 뿐.
"이걸 봐."
아르나바즈가 턱짓으로 마을 중앙의 우물을 가리켰다.
시선이 그곳에 닿는 순간, 에드먼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맑아야 할 우물물은 검붉게 죽어 있었다.
도살된 가축의 사체와 내장들이 둥둥 떠다니며 생명의 근원인 식수원을 맹독으로 바꾸고 있었다.
단순한 약탈이 아니었다.
이곳에 다시는 생명이 깃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명백한 악의가 담긴 초토화였다.
스르륵.
에드먼드는 품속에서 양피지 뭉치를 꺼냈다.
펜은 없었다.
그는 발치에 떨어진,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숯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각, 사각.
거친 숯이 양피지 위를 긁어내렸다.
굵은 입자 위로 검은 재가 묻어나며 비극이 기록되었다.
사망자 50여 명. 전원 몰살.
식수원 오염. 가축 도살 및 폐기.
적 규모 최소 1개 중대 이상. 기병 포함.
손에 묻은 숯검정이 마치 굳어버린 피딱지처럼 보였다.
아르나바즈의 예리한 시선은 놓치지 않았다.
검게 물든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떨리고 있음을.
기록을 내려다보는 에드먼드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마을을 삼킨 불길이 여전히 시뻘겋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숯검정이 묻은 양피지를 품에 넣었다.
이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학살한 적과 방관할 아군.
그들 모두에게 들이밀 '피의 청구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