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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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끝났나?"
아르나바즈가 물었다.
그녀는 이미 쌍곡도를 갈무리하고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숯검정이 묻은 손으로 양피지를 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필요한 건 다 적었습니다."
"그럼 본대에는 뭐라고 보고할 셈이지?"
그녀는 타다 만 집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약탈은 끝났고, 놈들은 이미 떠났어. 게다가 이곳은 본대가 향하는 라드 요새 경로에서 한참 비켜난 곳이다. 드라몬드 녀석이라면 '가던 길이나 가자'고 할 게 뻔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탐욕스럽고 게으른 드라몬드에게, 이미 털려버린 빈 껍데기 마을 따위는 관심 밖일 터였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본대에 알려 즉각 토벌을 건의할 겁니다."
"토벌? 드라몬드가 움직일까?"
"움직이게 만들어야죠."
에드먼드의 목소리에는 물기 하나 없는 건조한 논리가 담겨 있었다.
"이곳은 기브라임 백작령과는 빗겨난 곳이지만, 수도 마르셀리아와 라드 요새를 잇는 핵심 병참선 중 하나입니다. 놈들을 방치하면 향후 수도와의 보급선이 위협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가리켰다.
"게다가 놈들의 움직임은 조직적입니다.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정규군이거나 용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건 치안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군사적 위협입니다. 드라몬드도 그 정도 셈법은 알아들을 겁니다."
완벽한 논리였다.
군사적 득실을 따지는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만한 정론.
하지만 아르나바즈는 이해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에드먼드를 쏘아보았다.
마치 껍데기를 벗겨내고 알맹이를 보려는 듯한, 송곳 같은 눈빛이었다.
"코르반. 그럴싸한 논리를 말하고 있지만, 그대의 내면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군."
에드먼드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서릿발 같은 입김이 나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항상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눈동자가 드물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숯덩이보다 뜨거운, 억눌린 분노의 색이었다.
"백성을…"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마치 심연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리 같았다.
"백성을 지킬 의지가 없는 군대는, 출병하기 전부터 이미 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에드먼드의 시선이 우물가에 쓰러진 아이의 시신에 머물렀다.
그는 자신의 망토로 아이의 유체를 가렸다.
그 움직임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지켜야 할 대상을 외면하는 힘은 군대가 아닙니다. 그건 그저 무장한 야수일 뿐이죠."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파고들 만큼.
"그런 야수 같은 군대라면, 차라리 패배해서 사라지는 편이 낫습니다. 그러니 나는 놈들을 움직일 겁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에드먼드의 분노는 조용했지만, 향하는 곳은 분명했다.
적만이 아니라, 의무를 버린 아군.
생명을 숫자로만 셈하는 전쟁 그 자체.
그것을 부정하려는 오래된 신념의 포효였다.
아르나바즈는 그 뜨거운 눈빛을 묵묵히 받아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그게 진짜 이유겠지."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쌍곡도의 자루를 툭 쳤다.
"질문에 대한 답이 되겠어.”
사람을 베는 것과 글자를 베는 것.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에드먼드의 답변은 간결했다.
글자로 생명을 베어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렵고도, 잔혹한 길이었다.
아르나바즈의 시선이 에드먼드의 손에 머물렀다.
거친 양피지를 꽉 누르고 있는 그의 손가락은 시커먼 숯검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피딱지와도 같은 검붉은 색이었다.
‘검보다 펜이 무겁다는 말, 이제야 알 것 같군.’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칼로 베는 것은 눈앞의 적, 단 하나의 생명이었다.
저 남자가 펜으로 베어내고 있는 것은, 이 참혹한 현장의 무게 그 자체라는 것을.
기록되지 않은 죽음은 잊힌다.
잊힌 죽음은 비극조차 되지 못한다.
에드먼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그 참혹한 현장을 떨리는 손끝에 온 힘을 실어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담은 것이었다.
“이 기록은…”
에드먼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우물가에 버려진, 흙투성이가 된 아이의 인형에 닿아 있었다.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훗날, 이 학살을 자행한 자, 그리고 방조한 자들의 목을 겨눌 청구서가 될 겁니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마을을 삼킨 불길이 여전히 시뻘겋게 일렁이고 있었다.
펜 끝으로 수많은 목숨을 짊어져야 하는 지휘관의 고뇌가, 그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에드먼드가 폐허 속에서 헤매고 있을 즈음, 루크레티나와 제13군단이 마레움 성채에 당도했다.
‘늙은 귀부인(Old Lady)’.
제국의 서쪽 끝을 지키는 이 거대한 성채는 그 이명(異名)답게 고고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한때는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제국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명성에는 금이 가 있었다.
5년 전, 서방의 기습에 허무하게 함락되었던 탓이다.
비록 루크레티나가 직접 나서 탈환했으나, 한 번 뚫린 방패는 더 이상 전설이 될 수 없었다.
성채 따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뚫리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방벽이 아니다. 누가, 어떻게 지키느냐다.
제국의 수뇌부만 그 사실을 모를 뿐.
루크레티나는 가까워져 오는 늙은 귀부인의 성벽을 바라보며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도합 팔천의 군세가 질서 정연하게 마레움으로 진입했다.
정상 편제의 절반도 안 되는 군단이었지만, 제국 정예의 품격은 여전했다.
루크레티나는 보급 물자를 직접 챙기며 내성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마주한 방어 사령관, 가이아누스 벨라리우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세네카 벨라리우스의 친족이었다.
제국 군부까지 뻗친 세네카의 권력이, 이 최전방 요새의 사령관 자리까지 뻗치고 있었다.
그는 반백의 머리카락을 거만하게 쓸어 넘기며 손을 내밀었다.
“오오, 이런 변경지까지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소. 여독을 푸시길 바라오.”
가이아누스의 눈이 루크레티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마치 진열된 상품의 값어치를 매기는 상인의 눈빛처럼.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걸고 맞잡은 손을 필요 이상으로 오래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루크레티나는 손이 떨어지자마자,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요새의 방어 수준을 확인하고 싶소. 그래야 이단자들의 요새 공략에 투입할 병력을 가늠할 수 있을 테니.”
“방어 수준?”
가이아누스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귀관도 잘 알지 않소. 마레움은 난공불락이요. 일천의 병력으로 능히 일만의 군세를 막을 수 있는 성채란 말이오.”
“그렇다면 딱 그 일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원정군으로 차출해도 문제없다는 뜻이오?”
루크레티나의 목소리에서 기가 차다는 기색이 묻어났다.
또 성벽만 믿는 멍청이였다.
지휘관이 이 모양이라면, 천하의 마레움 성채라 한들 일주일이면 깃발을 꽂을 자신이 있었다.
가이아누스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이 성은 무적이오.”
“그것참 다행이군.”
루크레티나의 대답에는 명백한 조소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가이아누스는 그조차 칭찬으로 들었는지, 과장되게 팔을 벌려 채광창 너머를 가리켰다.
“이런 변두리에 온 것도 다 그대의 복이오. 이곳만큼 안전하고 풍족한 곳은 없으니까.”
가이아누스는 탁자 위에 놓인 최고급 비단 지도를 손으로 쓸었다.
지도 위에는 병력 배치나 적의 예상 침투로 대신, 근처 영지에서 공수해 온 특산물 목록과 연회 일정표가 붉은 잉크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보시오. 서방 놈들이 감히 이곳을 넘볼 수나 있겠소? 우리에겐 이 견고한 성벽과, 무엇보다 제국의 위엄이 있지 않소!”
루크레티나의 시선이 지도 구석,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선반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뜯지도 않은 정찰 보고서들이 쓰레기처럼 처박혀 있었다.
그중 가장 위의 보고서를 뽑아 들었다.
먼지가 뽀얗게 허공을 흩날렸다.
가장 위에 올려진 것은 지금부터 약 2주 전의 기록이었다.
‘마지막 정찰 보고가 보름 전이라니.’
기가 찼다.
적은 코앞에서 칼을 갈고 있는데, 최전방 지휘관은 비단 지도 위에서 와인잔이나 기울이며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있었다.
이것은 여유가 아니었다.
직무 유기, 아니 제국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차오르는 구역질을 억누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성벽은 돌덩이일 뿐, 그 위용을 지키는 건 병사들의 피와 땀이오.”
루크레티나는 가이아누스가 들고 있던 와인잔을 싸늘하게 응시했다.
"그런데 귀관께서는, 병사들의 피를 와인으로 착각하고 계신 것 같소."
"뭐요?"
가이아누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짐짓 너그러운 척,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앙탈 부리는 애첩을 귀엽게 봐주는 호색한의 눈빛이었다.
"검은 장미라더니, 역시 가시가 제법 매섭구려. 하지만 너무 날을 세우지 마시오. 이곳 마레움은…”
루크레티나는 빠르게 손을 올려 그에게 보였다.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는 뜻처럼 보였다.
그녀는 질렸다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좋소. 귀관의 안락한 생활이 계속되길 바라오. 소관은 주둔지로 돌아가겠소.”
그러고는 더 듣지 않고 칼같이 돌아섰다.
라드와 마레움 회랑을 잇는 요충지이자, 서방으로 통하는 유일한 숨구멍.
온갖 물산이 집결하는 번영의 땅, 마레움 성채.
가이아누스의 말대로 이곳은 풍요로웠다.
하지만 루크레티나의 눈에 그 풍요는 독이 든 성배이자, 적을 유혹하는 양날의 검일 뿐이었다.
등 뒤에서 가이아누스의 끈적한 목소리가 거머리처럼 따라붙었다.
"라비타의 와인이 아주 일품이오. 언제 밤새 대국을 논해 봅시다. 검은 장미여."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삼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접견실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시우스가 그녀의 등장에 등을 곧게 폈다.
그는 라비나르 토벌전 이후 정식으로 13군단의 참모진으로 합류한 상태였다.
카시우스는 조심스럽게 사령관의 안색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각하. 짧은 접견치고는 표정이 어두우십니다.”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카시우스.”
루크레티나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의미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접견이었다.”
“재밌는 말씀이군요.”
카시우스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명백한 조롱. 안 봐도 뻔한 그림이었다.
“무능한 장수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겠나.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수행한다.”
루크레티나는 미련 없이 내성 통로를 걸어 나갔다.
카시우스가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랐다.
마레움을 비추는 햇살.
짙은 구름을 뚫고 한 가닥의 빛줄기가 사선으로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루크레티나는 서쪽, 그러니까 라드 요새가 위치하고 있을 회랑 너머를 응시했다.
잿빛 노을.
마치 그날의 애송이가 떠오를 법한 색이었다.
“우리는 라드 요새를 공략한다.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루크레티나의 의연한 모습에, 카시우스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루크레티나가 서쪽 하늘을 응시했다.
등 뒤엔 무능한 아군. 앞에는 유능한 적.
그녀가 걷는 길은 영광의 융단이 아니었다.
추락하면 끝장인 위태로운 '외줄'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