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死地)와 생지(生地)

<설계자의 전쟁론> 1부 3장 | 제23화

by 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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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의 전쟁론>

1부. 광휘재림(光輝再臨)

3장. 작은 불꽃들

23화. 사지(死地)와 생지(生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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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Youtube_The Riverside Tavern취향에 따라 들어주세요 :)


조심스레 마을로 진입한 코르반의 병사들은 얼어붙고 말았다.


불탄 목책과 주저앉은 망루.

그 잔해들 사이로 도륙당한 마을 사람들의 사체가 즐비했다.

병사들은 혼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루벤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싸늘하게 식은 어미의 손을 꼭 쥐고 쓰러져 있는 아이.

고작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그 작은 손이 루벤의 가슴을 후벼 팠다.


“으흑.”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피 젖은 흙을 움켜쥔 루벤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손마디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것은 전쟁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들이 상정하고 훈련에 임했던 실전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에드먼드는 병사들을 다독이며 그들의 시신을 묻을 간이 무덤을 만들었다.

아르나바즈도 말없이 시신들을 수습하는 데 손을 보탰다.


오십여 구의 시신을 수습하고 간소하게나마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작업을 마친 병사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말없이 흐느끼던 루벤이 고개를 들었다.

전쟁터에 서기엔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년의 얼굴을 채 벗지 못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이게 정말 맞는 거예요?”


에드먼드는 말없이 루벤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흔들리는 눈빛을 잡아주듯,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고도 다정했다.


“루벤. 이건 잘못된 일이다. 네가 느끼는 감정은 틀리지 않았어.”


병사들의 표정은 잘 벼려진 칼날과도 같았다.

병사들이 쥔 무기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분노로 들끓는 병사들 틈으로, 아르나바즈의 건조한 목소리가 찬물처럼 끼어들었다.


“여긴 본대의 이동 경로 밖이야. 드라몬드가 너희들 마음에 드는 결정을 내릴지 의문이군.”


그 말에 루벤이 지지 않고 발끈하며 소리쳤다.


“당연히 찾아내야죠! 저런 짓을 한 놈들을 어떻게 그냥 둬요. 그렇죠, 도련님!”


물기 어린 루벤의 외침에 에드먼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 전장을 지배하는 건 정의가 아니라, 철저한 이득과 효율의 논리였다.


에드먼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인간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평화.

서로의 상처를 딛고 세워지는 공존.


가슴에 품었던 이상은 아득히 멀고, 눈앞의 현실은 지독히도 비참했다.

힘없는 자들은 언제나 짓밟히고 유린당할 뿐.


하지만 차가운 이성으로 전장을 꿰뚫던 그의 비범함도, 때로는 순수한 청년의 뜨거운 눈물 앞에서 속절없이 흔들리는 법이다.

아니, 그 눈물이야말로 꺼져가던 신념에 불을 지피는 불씨였다.


“후우.”


짧은 한숨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의 숨결에는 천 개의 단어를 품고 있었다.


에드먼드의 표정이 달라졌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가 내려앉았다.

타버리다 꺼진 불씨가 툭, 하고 허공을 비산했다.


바람마저 숨을 죽인 찰나.

천천히, 에드먼드의 입이 열렸다.


“눈물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작지만 또렷한, 그의 단호한 음색이 불타버린 마을을 얇게 덮었다.


에드먼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코르반의 병사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마주하며 말했다.


“죽은 자들에게 필요한 건 동정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대가다.”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전장의 판을 다시 짜기 시작한 설계자의 눈이었다.


그는 젖어 있는 루벤의 눈을 한 번 바라보고는, 가레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레스. 병력을 아까 그 감시터로 이동시켜 대기해 주십시오. 저와 아르나바즈가 본대로 가겠습니다.”

“이봐. 계속 지휘관이 본대를 비우는 게 말이 되나. 내가 가겠다.”


가레스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길을 막아섰다.


머리가 몸통을 놔두고 손발이 되어 움직이겠다니.

군 운용의 기본조차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아니오.”


에드먼드라고 그 모순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확고했다.


“안타깝지만 참모장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저 말곤 달리 없어 보입니다. 가레스, 가능하십니까?”

“그건...”


가레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꽉 막힌 놈의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흔들어, 기어이 본대를 움직이게 만들 사람.

그건 마레움의 영웅이자 저 맹랑한 지휘관, 에드먼드뿐이었다.


가레스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에드먼드를 돌아보았다.


“몸조심해라. 이 부대에 지휘관은 너 하나뿐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제 제가 무리하는 걸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에드먼드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가레스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는 무모한 돌진이나 숭고한 산화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위험한 도박은 피하고, 이길 수 있는 판만 벌인다.


주변 사람들에겐 매사 설렁설렁 임하는 것처럼 비쳤으나, 그것이야말로 에드먼드가 지닌 진정한 저력이었다.




지나온 길을 되짚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에드먼드가 지형지물을 꼼꼼히 외워둔 덕분이기도 했으나,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르나바즈와 함께 움직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구릉지 아래를 흐르는 거대한 철의 강물이 눈에 들어왔다.


엉덩이를 무겁게 깔고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대군.

저토록 요란하고 느린 행렬을 못 보고 지나치는 게, 오히려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에드먼드는 헛웃음을 삼켰다.


“아낙네들의 봄 소풍 행렬 같군.”


아르나바즈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바로 말머리를 사령부 쪽으로 돌렸다.


얼마 가지 않아,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걸어오는 터너가 보였다.


“면목 없습니다. 참모장 코빼기도 못 봤습니다. 식사 중이라 방해할 수 없다더군요. 전서만 겨우 밀어 넣고 쫓겨났습니다.”

“그런가. 고생했네. 본대와 합류해 쉬도록.”


에드먼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령부는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은 사자와 방패 문양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꼴은, 마치 적들에게 어서 와서 목을 베어가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코르반의 에드먼드다. 참모장 각하는 어디 계시지?”


호위병의 안내를 따라 시선을 돌린 에드먼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번쩍이는 백마 위에 올라탄 드라몬드를 향해 다가갔다.


“각하. 에드먼드 코르반입니다.”


에드먼드의 외침에 드라몬드가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는 여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오, 코르반 경. 무슨 일인가? 정찰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텐데?”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에드먼드의 보고는 명확했다.



습격당한 마을.

정규군 수준의 조직적인 움직임.


보고는 건조했다.

참혹한 죽음이나 목격자의 비통함 따위, 감정이 섞일 법한 이야기는 철저히 배제했다.

드라몬드에게 그런 감성이 통할 리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드라몬드는 두툼한 턱살을 주물럭거리더니, 이내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냥 진군하겠소. 우리가 받은 명은 라드 요새로의 집결뿐이니.”

“참모장 각하.”


거절은 예상 범주였다.

에드먼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단순히 촌락 하나가 불탄 게 아닙니다.”


에드먼드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마치 눈앞에 보이지 않는 지도를 펼치듯, 그는 본대의 위치와 북서쪽의 폐허를 차례로 짚어 보였다.


“이곳은 수도 마르셀리아와 라드 요새를 잇는 최단 경로이자 핵심 길목입니다. 본대가 요새에 주둔하게 되면, 우리의 생명줄인 군량과 물자는 전적으로 서쪽, 즉 이곳을 통과하게 됩니다.”


드라몬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요점만 말하시오. 본관은 한가하게 지도 놀음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소.”

“예. 알겠습니다.”


에드먼드는 천천히 손을 펼쳐 보였다.

마치 이해력이 떨어지는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처럼, 차분하고도 노골적인 손짓이었다.


“만약 우리가 이 마을의 참상을 무시하고 지나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적들은 우리의 등 뒤에 남게 됩니다. 향후 올라올 보급품들이 그들에게 약탈당하고 끊긴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에드먼드의 서늘한 경고에 드라몬드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애써 불안감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왕가의 병력이 알아서 하겠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에드먼드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보급이 끊겨 아군이 굶주릴 때, 왕가에선 원인을 찾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희생양을 요구하겠지요. 이 길을 지나간 책임자가 누구였는가? 하고 말입니다.”


드라몬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흔들리는 동공을 향해, 에드먼드는 확인 사살을 날렸다.


“그 화살은 정확히 각하를 향할 겁니다. 명백한 적의 징후를 무시한 대가. 그건 실수가 아니라 직무 유기라는 죄목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 무거운 책임을 홀로 지시겠습니까?”


책임, 그리고 죄목.

드라몬드는 사색이 되었다.


에드먼드는 예의 바르게 등을 펴며, 결정타가 될 한마디를 얹었다.


“이건 각하의 위신과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부디 각하의 그 깊은 혜안(慧眼)으로, 현명한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드라몬드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수습하며 턱을 문질렀다.

정중한 말투 속에 숨겨진 서늘한 칼날이 있었다.


‘빌어먹을 쥐새끼 같은 놈. 감히 나를 협박해?’


부아가 치밀었으나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탐욕의 주판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 상황을 잘만 비틀면, 눈엣가시 같은 놈을 합법적으로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그 공훈은 자신이 독차지할 수 있는 완벽한 그림이 그려졌다.


드라몬드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좋소. 귀관의 충정을 높이 사겠소.”

“현명한 판단입니다.”

“허나, 본대의 일정은 지체할 수 없소. 대군이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드라몬드는 짐짓 곤란한 척하며, 준비해 둔 덫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 토벌은 귀관의 부대가 전담하시오. 본대의 지원은 없소. 오직 코르반의 병력만으로 해결하시오.”


사실상 죽으러 가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드라몬드는 멈추지 않았다.


“조건은 두 가지요. 첫째, 보급로를 위협하는 적을 완벽하게 소탕할 것. 실패 시에는 병참선 확보 실패의 책임을 물어 군법에 부치겠소.”

“……”

“둘째, 기한은 하루. 딱 하루 주겠소. 내일 정오까지 임무를 마치고 본대로 합류하시오. 만약 정해진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드라몬드의 눈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전시 이탈 및 항명죄를 물어, 즉결 처형으로 다스리겠소.”


성공해도 본전, 실패하면 군법 회부, 늦으면 사형. 완벽한 독이 든 성배였다.

게다가 성공한다 해도 그 공훈은 ‘적절한 별동대 운용’을 지시한 드라몬드가 가로챌 게 뻔했다.


하지만 에드먼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었다.


“지당하신 처분입니다. 군법대로 하겠습니다.”


예상 밖의 반응에 오히려 드라몬드가 흠칫했다.

바로 그때였다.


“풉.”


적막을 깨고 터져 나온 맑은 웃음소리.

아르나바즈였다.


그녀는 킬킬대며 에드먼드의 곁으로 걸어 나왔다.


“재밌는 판이군. 나도 끼도록 하지.”

“뭐, 뭐라?”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그녀의 참전에 드라몬드가 기겁했다.

아르나바즈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그대와 함께라면 내가 찾던 답을 볼 수 있을 것 같거든. 나도 가겠다.”


드라몬드는 말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르나바즈는 기브라임 백작이 애지중지 모셔 온 귀빈.

그런 그녀가 험한 꼴이라도 당하면 백작의 불벼락을 맞는 건 자신이었다.


“아, 아르나바즈 경! 그건 안 되오! 저런 사지(死地)에 귀빈을 보낼 수는 없소! 그대는 본대와 안전하게……”

“어리석긴.”


아르나바즈가 드라몬드의 말을 싹둑 잘랐다.

그녀의 서늘한 눈빛이 화려한 갑주 속의 무능을 꿰뚫었다.


“그대 같은 자와 함께 있는 곳이야말로 진짜 사지(死地)다.”

“무슨…!”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드라몬드를 비웃듯, 손가락으로 에드먼드를 가리켰다.


“그에 비해 이 남자는 사지조차 생지(生地)로 뒤바꾸는 기적의 사내다. 5년 전에 이미 증명하지 않았나?”


아르나바즈는 멍하니 입을 벌린 드라몬드를 비웃듯, 에드먼드의 곁으로 걸어가 섰다.


탐욕스러운 지휘관의 면상에 날리는 통쾌한 한 방.

그것으로 충분했다.